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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42)화 (41/159)

42화

“풉. 세바스찬이 안 챙겨 준 거예요? 아무리 평민 신분으로 위장했다지만 컨셉에 너무 충실한 거 아니에요?”

“아침에 좀 바빴을 뿐이야.”

그러고 보니 아침에 좀 늦게 왔었지? 그나저나, 돈도 못 챙길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고? 이 빈틈없는 사람이?

일리온답지 않게 변명하는 것이 유치해서 자꾸 웃음이 삐져나온다.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해 입을 틀어막고 어깨를 들썩이자 일리온이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뭐가 그렇게 웃긴가?”

“아니, 그렇잖아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 말에 기분이 나쁜 모양인지, 일리온은 고개를 돌려 버리고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잠깐만, 삐지지 마요. 제가 가져왔으니까요.”

다급히 일리온을 잡으며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들어 보였다.

“알았네. 다녀와.”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종종걸음으로 가게 앞으로 향했다. 가게 안에는 여러 가지 빛깔의 사탕이 병에 담겨 고급스럽게 포장되어 있었다.

이 세계에서 사탕은 꽤 고급 음식으로 취급됐다. 설탕을 만드는 과정이 쉽지 않았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가게 앞에 서서 한참을 뭘 먹을까 행복한 고민하던 난 막대 사탕 몇 개를 집어 들고 계산을 했다.

가게를 나오자, 일리온은 보기 드물게 당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름 일리온을 당황하게 하는 데는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하던 나조차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어쩐지 놓치기 아까운 구경거리라 일부러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으아아앙! 엄마!”

“저기. 저…….”

길을 잃었는지 어린아이가 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있었고, 하필이면 그 옆에 서 있던 일리온은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아이를 달래고 있었다.

안절부절못하는 양손이 갈피를 못 잡고 허공에서 꼼지락거린다.

저렇게 당황한 얼굴이라니. 카메라가 있으면 찍어 놓고 평생 놀려 주고 싶을 정도였다.

달래려는 의지만 열심히 어필하던 일리온은 이번엔 허리를 숙이고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역효과였다. 아이는 일리온의 얼굴을 보더니 더 놀란 듯, 거리가 떠나가라 울어 재꼈다.

아이를 울린 파렴치한으로 낙인이 찍힐 듯해 서둘러 달려갔다.

“꼬마야, 왜 울고 있어? 엄마를 잃어버렸니?”

아이는 내 얼굴을 보더니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울지 마. 누나가 엄마 찾아 줄 테니까.”

눈물을 닦아 주며 사탕을 건넸다.

“누나가 엄마 찾는 동안 먹고 있을래?”

“이게 뭔데요……?”

“사탕이야. 달콤하고 맛있어.”

사탕 껍질을 까서 손에 쥐여 주자 아이는 입에 넣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새 눈물이 쏙 들어가 사탕 먹는 데 여념이 없었다.

“하아…….”

한시름 놓은 일리온이 뒤에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우는 아이에게 혼이 쏙 빠져 버린 모양이었다.

“일리온은 애들이랑 영 사이가 안 좋네요. 애들 달래 본 적 없어요?”

“없어.”

“에이, 그래도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울면 달래 준 적은 있잖아요.”

“…….”

내 말에 일리온은 아이를 가만히 쳐다보다 입을 다물었다. 또 자기가 하고 싶은 말에만 대답하는 나쁜 버릇이 나왔다.

“이런, 애를 달래 본 적이 없다니 곤란한데…….”

“뭐가?”

의아한 일리온의 얼굴을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야 전 혼자서 육아를 감당할 자신이 없는걸요. 공작님이 애를 달래 본 적도 없다고 하시니 벌써부터 걱정이 돼서요.”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군. 어차피 애는 보모의 손에 자랄 텐데.”

“어머나, 애는 당연히 부모의 손에 자라야죠. 보모한테 맡긴다니, 그렇게 무책임할 수가!”

난 하던 말을 멈추고 일리온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면 일리온의 아버지나 어머니에 대해선 아는 게 없었다.

안타깝게도 내가 알고 있는 건 비셉이 했던 저질스러운 농담뿐이었다.

그에게 부모님에 대해 물어보려다 입을 다물었다.

궁금하긴 했지만, 한편으론 이런 걸 물어봐도 괜찮은지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내게 부모님 얘기를 물으면서 불편해하던 게 이런 의미였나. 막상 그들의 입장이 되니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저기, 누나.”

“응?”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데, 아이가 내 옷을 잡아당겼다.

“엄마 찾아 줄 거지?”

“그럼. 지금부터 찾으러 갈까?”

난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의 손을 잡았다.

***

아이의 엄마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아이가 길을 잃은 거리를 조금 따라 올라가다 보니, 아이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며 거리를 헤매고 있었다.

그녀는 우리에게 고맙다며 연신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그렇게 아이를 돌려보낸 뒤, 봉투에서 주섬주섬 사탕을 꺼냈다.

“하나 먹을래요?”

“아니.”

“왜요. 공작님 것도 일부러 사 온 건데.”

억지로 권유하자, 일리온은 마지못해 하나 받아 들어 입 안에 넣었다. 그러더니 인상을 팍 구겼다.

응, 그거 계피 맛이야.

난 속으로 키득거리며 딸기 맛 사탕을 꺼내 입에 물었다. 계피 맛은 할머니의 사탕 봉투 속에서도 지뢰였다.

제일 싫어하는 맛.

내가 또, 우리 친애하는 공작님을 위해 특별히 준비했지.

“그렇게 달콤한 게 싫어요?”

표정이 안 좋은 일리온을 보며 일부러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좋은 기억이 없어.”

“왜요?”

“단 걸 먹은 다음엔 항상 머리가 아팠거든. 속이 안 좋거나.”

“어렸을 때부터요?”

“처음엔 꽤 맛있게 먹었던 것 같은데…….”

왜 갑자기 먹기 싫어지게 됐는지는 본인도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뭐, 사람의 입맛은 변하기 마련이니까.

반면 내 경우는 어린 시절부터 한결같이 달콤한 음식을 좋아했다.

하도 사탕을 많이 먹어 충치가 생겨서 의사 선생님께 혼나기도 했는데, 그날 이후로 할머니가 집에 있는 사탕을 모조리 치워 버리기까지 할 정도였다.

그게 서러워서 길바닥에서 사탕 사 달라고 엉엉 울기도 하고.

벌써 20년 가까이 지난 일을 떠올리며 입 안에 굴러다니는 사탕을 오도독하고 씹었다.

칼날처럼 날카롭게 잘린 단면이 온기에 사르르 녹아내리며 점점 동그랗게 변한다.

“참, 오늘 저녁은 제가 가고 싶은 데로 가도 돼요?”

“어디 가고 싶은 데라도 있나?”

“엘코르사요!”

이번 여행의 내 유일한 목표. 메뉴 하나에 드레스 한 벌 값은 우습게 넘는 호화 레스토랑!

이 모진 역경과 고난 속에서도 아직까지 집에 안 가고 일리온의 뒤를 따라다니는 이유는 오직 이것뿐이었다.

목적만 달성하면 내일이라도 당장 집에 보내 달라고 일리온을 조를 생각이다.

집으로 귀환하는 아티팩트 가격이 상당하겠지만, 그게 뭐? 어차피 내 돈 나가는 것도 아닌걸?

“공작님은 돈 안 가져오셨으니까 제가 사 드릴게요.”

내가 씩 웃으며 말하자 일리온은 떨떠름한 얼굴로 마지못해 대답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 보였지만 어쩌겠어? 돈이 없으면 조용히 해야지.

***

“저, 죄송하지만…….”

점원은 우릴 보고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입장 불가능하십니다.”

“……네?”

“예약하지 않으신 손님은 입장이 불가능하십니다.”

그는 눈을 힐끔거리며 일리온을 바라보았다. 물어보는 사람은 난데 왜 뒤에 있는 일리온 눈치를 보는 거람.

돈이 있는 사람은 나거든요? 쟤가 아니라?

난 일부러 점원에게 얼굴을 들이밀며 다시 한번 물었다.

“기다려도 안 돼요?”

“안 됩니다.”

그는 이번엔 좀 더 단호하게 거절했다. 대체 왜 안 된다는 거야? 내가 이걸 먹으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이대로 돌아갔다가는 꿈에서도 땅을 치고 후회할 것 같아, 점원을 상대로 좀 더 질척거려보기로 했다.

“그럼 오늘 예약하고 가면 내일 먹을 수 있나요?”

“죄송하지만, 예약이 모두 차서 안 됩니다.”

“그럼 예약 가능한 날을 알려 주세요.”

“당분간 예약이 꽉 차 힘들 것 같습니다.”

대체 되는 게 뭐야?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

점원은 내 앞에서 안 된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날 들여보낼 생각이 없던 것처럼.

“수고 많네. 윌리엄.”

점원과 눈싸움을 할 기세로 노려보고 있자, 방금 레스토랑에 도착한 것으로 보이는 손님이 점원에게 인사를 건넸다.

통통하게 배가 볼록 나온 남자는, 털이 잔뜩 달린 고급 코트를 입고 있었고, 그의 옆에는 모델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아름다운 여성이 동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윌리엄은 남자를 보자마자 공손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점원의 이름까지 알 정도면 꽤나 단골인 모양이었다.

“드뷔어 남작님. 어서 오십시오.”

“그래, 자리는 있나?”

“물론이죠. 금방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잠깐만. 이게 무슨 상황이지?

“아까는 예약을 해야 한다면서요.”

둘의 대화를 가만히 듣다 결국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죄송하지만, 손님은 입장이…….”

“아아, 잠깐. 윌리엄.”

드뷔어 남작은 손을 들어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던 윌리엄을 제지하곤 날 바라보았다.

“아가씨는 이 레스토랑이 처음이라 잘 모르나 본데, 여긴 평민이 함부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야. 귀족들만 받는 곳이라네.”

“하지만, 안내 책자에는 그런 말은 어디에도…….”

“그야, 어지간한 평민은 꿈도 못 꾸는 곳이니까.”

“돈이라면 있어요.”

내 소심한 반박에 남작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돈 좀 있는 가문 여식인가 본데, 이런 가게는 돈이 다가 아니라는 걸 알아야지.”

남작의 반응에 잔뜩 약이 오른 나는 일리온을 바라보았다. 공작의 지위든, 인맥이든 뭐든 남용해서 어떻게 좀 해 달라는 신호였지만 일리온은 어깨만 으쓱해 보였다.

아까 돈이 없다고 놀린 것에 대한 복수야?

“뭐, 정 먹고 싶다면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지. 아가씨만 괜찮다면 나랑 동행하는 건 어떤가?”

이대로 포기해야 하나 싶던 차에, 배불뚝이 남작이 내게 의외의 제안을 해 왔다.

“대신 뒤에 서 있는 애인은 빼고, 아가씨만.”

뒤에 있는 애인? 일리온을 빼고 가자는 얘기야?

하, 남작님 내가 아무리 게 요리가 먹고 싶다지만, 가자고 한다고 그렇게 아무나 홀라당 따라…….

“갑시다!”

일리온 빼고라니, 땡큐지!

신이 나 발걸음을 옮기는데 뒷덜미를 턱 하고 잡혔다.

“윽.”

“어딜 가?”

일리온이 잔뜩 짜증 난 얼굴로 내게 물었다.

“남작님께서 모처럼 같이 먹자고 하시잖아요.”

난 남작의 눈치를 보며 그에게 들리지 않게 작게 속삭였다.

“그런데?”

“지금 일리온 빼고 먹는다고 삐졌어요?”

“너…….”

“알았어요, 알았어. 내가 일리온 것도 좀 싸 달라고 할게요.”

해맑게 웃자 일리온은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렇게 아무나 졸래졸래 따라갈 셈인가?”

“저도 아무나 따라가지는 않는다고요.”

“그럼?”

“돈 많고 잘생긴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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