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출장 당일 아침, 릴리는 내게 두꺼운 털 코트를 하나 건네주었다.
“코트?”
“네. 포르토는 북쪽 지역이니까요.”
“많이 추워?”
옷은 생각보다 묵직했다. 이걸 걸쳐야 할 정도로 춥다는 건가? 추운 건 싫은데…….
“그런데, 릴리 넌 안 가?”
내게만 두꺼운 털 코트를 주고 자신은 빈손인 게 의아해 물어보자 릴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번 출장은 공작님 혼자 가시기로 했거든요.”
“……뭐?”
“모르셨어요? 말씀드린 줄 알았는데?”
릴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번은 출장이라기보단, 시찰에 가까워서요. 신분을 숨기시고 마을을 돌아보실 예정입니다.”
막 도착한 세바스찬이 한마디 거들었다.
“시찰이요? 그래서 이런 옷을 입으라고 한 거였구나.”
오늘은 평소에 입던 드레스 대신, 움직이기 편한 바지와 셔츠에 두툼한 재킷을 걸치고 있었다. 가진 옷 중에 가장 수수한 옷이었다.
그나저나 사찰이라니. 그럼 또 둘이서 돌아다녀야 한다는 얘긴가? 그건 좀 싫은데…….
“그런데, 공작님은요?”
당연히 세바스찬과 같이 올 거라 생각했던 일리온이 조금 늦었다. 평소 같으면 누구보다도 먼저 나와서 늦게 나오는 나를 타박했을 텐데. 늦잠이라도 잤나?
“곧 나오실 겁니다.”
그렇게 얘기하는 세바스찬의 표정은 어딘지 조금 어두워 보였다.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볼까 했지만, 세바스찬의 말대로 일리온은 곧 내려왔고 난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일리온은 내려오자마자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며 짧게 사과를 건넸다.
“공작님 방에는 시계가…….”
“그럼 바로 가지.”
“아, 아니 잠…….”
지난번에 내게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려 했지만, 일리온은 내 말을 칼같이 잘라 버리고 아티팩트를 발동했다.
아니, 잠깐 기다려 봐. 내 말 아직 안 끝났잖아? 너랑 단둘이는 안 갈 거라고. 야, 잠깐!
“……말이 안 끝, 으으 추워.”
일리온에게 무어라 한마디 하려는데, 입술을 닫기도 전에 몸속으로 파고드는 한기에 난 서둘러 릴리가 챙겨 준 코트를 둘렀다.
“무슨 말?”
“……아니에요.”
이미 와 버렸는데 이제 와서 말해 봐야 무슨 소용이야.
“시찰하러 온 거라면서요?”
“그래.”
“알면서 말 안 해 주신 거죠.”
뚱한 표정으로 일리온을 바라보자 그가 무슨 소리냐며 물었다.
“뭘?”
“릴리도 안 따라오고, 세바스찬도 안 따라오는데, 혼자서 어떻게 축제를 즐겨요?”
“날 도와주러 온 거 아니었나?”
“……아니. 그렇긴 한데.”
그렇게 말하면 내가 할 말이 없긴 하지.
웬일로 일이 잘 풀릴 때부터 알아봐야 했는데.
일리온은 일하라고 내버려 두고, 릴리랑 둘이서 축제 구경하려고 했던 내 계획이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춥다고 했던 게 농담은 아닌 모양인지, 입가에선 연신 김이 새어 나왔고, 외투의 틈 사이로 바람이 파고들었다.
이렇게 추운 줄 알았으면 그냥 일리온한테 돌아올 때 게 몇 마리만 사 오라고 하는 건데.
“가지고 있어.”
연신 춥다며 오들오들 떨고 있는 내게 일리온이 목걸이를 건넸다.
“이게 뭔데요?”
“갖고 있으면 좀 따뜻할 거야.”
마법이 걸린 목걸이인 모양인지 따스한 온기가 새어 나왔다.
웬일로 날 다 챙겨 준담? 안 그래도 겨울에 약했기에, 난 그가 건네는 물건을 냉큼 받아 들었다.
하늘은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질 것처럼 꾸물거렸다. 눈이 올 것 같은 하늘을 걱정스레 바라보다, 일리온의 뒤를 따랐다.
“여기가 포르토예요?”
“응.”
우리가 도착한 곳은 마을의 광장처럼 보였는데,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사람이 많았다.
“제가 기사에서 읽었는데요, 저녁엔 야시장도 열린대요! 이따 저녁에 보러 와요!”
“일을 도와주러 온 것 치곤, 놀 계획을 알차게도 짜 왔군.”
“모처럼이잖아요?”
일리온의 뒤를 따르며 집요하게 일 다 끝나고 놀아도 되냐고 묻자, 일리온은 마지못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실에선 축제나 여행을 즐길 여유조차 없었기에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거리나, 수많은 노점상, 공연이 펼쳐지는 광장의 모습은 내 기분을 한껏 들뜨게 하기 충분했다.
모처럼 왔으니, 릴리 몫까지 즐기지 않으면 억울하기도 했고.
“그러고 보니 어디서 묵을 거예요?”
“숙소라면 세바스찬이 예약해 뒀어.”
“혹시, 전대 황비님께서 묵은 적이 있다던 그랜드 포르토 호텔이에요? 거기 카페가 그렇게 예쁘다던데!”
“글쎄. 평민이 그런 고급 호텔에 묵을 것 같지는 않은데.”
역시나 한껏 부푼 내 기대를 톡 하고 터트려 버리는 재주는 남달랐다.
“숙소까지 평민에 충실할 필요는 없는 거 아닌가요?”
“불평하는 건가? 나야말로 따라오라고 강요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는 일리온의 입가엔 미소가 걸려 있었고, 그게 비웃음이란 걸 확신한 나는 입을 다물었다.
이렇게 된 거 다 포기하고 집에 간다고 할까? 여기 계속 있어 봐야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을 것 같은데?
일리온의 말대로 그랜드 포르토 호텔은 평민의 신분으로 묵기엔 무리가 있었다.
우리가 오늘 묵을 숙소엔 아기자기한 카페도 없었고, 한국 사람이라면 놓칠 수 없는 조식 또한 제공되지 않았다.
그 대신 달빛과 함께 한겨울의 냉기가 고스란히 들어오는 모던한 금속제 창문과 흙의 기운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자연 친화적인 공간, 지푸라기 침대, 그리고 철저한 보안 시스템까지 준비된 곳이었다.
더불어, 종종 방문하는 바퀴벌레와 쥐 친구들은 아무것도 할 게 없는 이 칙칙한 공간의 적당한 유희 거리가 되어 주었다.
정말이지, 너무도 완벽한 잠자리에 난 허망하게 철창을 바라보았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고 하던데, 틀렸다.
늦었다고 생각했으면 진짜 늦은 거 맞아.
“공, 아니 일리온…….”
“왜?”
“우리 이대로 감옥에서 하룻밤 묵는 거예요?”
“…….”
뭐라 말 좀 해 봐! 진짜 우리 여기서 묵는 거 맞냐고!
***
세바스찬이 예약한 숙소는, 하루 숙박에 5실버 정도 하는 평범한 여관이었다. 1층엔 주점이 있고, 2층엔 방이 놓여 있는 평범한 여관.
숙소의 모습을 보자마자 후회가 밀려왔다.
사람이란 참 간사한 법이다. 공작의 약혼녀로서 푹신한 침대에서 며칠 놀고먹었다고 벌써 딱딱한 침대에 거부감이 드는 걸 보면.
그것도 모자라…….
“침대는 제가 쓸 거예요!”
“…….”
“이건 양보 못 해요. 바닥에서 바퀴벌레랑 같이 자고 싶진 않다구요.”
내 말에 일리온은 그냥 말없이 팔짱을 끼고 있었다.
사람은 두 명인데 예약된 방은 하나뿐이었다. 침대도 더블 사이즈로 간신히 두 사람이 누울 수 있는 정도의 크기였고.
세바스찬이 예약했다고 했을 때부터 의심했어야 했는데…….
일리온과 나, 둘 중 그 누구도 달가워하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축제 기간이라 달리 남은 방도 없다고 해서 할 수 없이 짐이라도 놓기 위해 들어왔다.
“다른 숙소를 알아보지.”
“뭐, 그러셔도 상관은 없지만, 저는 공작님과 같이 자도 상관없는데요?”
“이 넓은 마을에 남은 방 하나 정도는 있겠지.”
그렇게 말하는 일리온은 정말로 나랑 같이 자는 게 싫은 듯한 표정이었다.
“저랑 같이 자는 게 그렇게 싫으세요?”
그 이유를 알면서도, 일부러 일리온 주변을 알짱거리며 신경을 거스르자 일리온은 관자놀이를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짐 풀었으면 빨리 나와. 그리고 밖에서는 공작님이라 부르지 말고.”
“네? 그럼 뭐라고 불러요?”
“적당히 부르고 싶은 대로 불러.”
“진짜요? 그럼, 아저씨? 삼촌? 오빠는 어때요? 아니면…… 여보?”
일리온의 뒤를 따르며 뭐라고 부를지 던지는데, 역시나 짜증이 났는지 뒤돌아섰다.
“……그냥, 이름으로 불러.”
“그러죠. 뭐. 참, 전 아기 새라 불러 주세요.”
“…….”
당연한 말이지만, 내 말은 아주 가볍게 무시당했다.
하여튼 자기가 대답하고 싶은 말에만 겨우 대답한다니까.
“그런데, 뭘 조사하는 거예요?”
“작년부터 이 지역 상권이 이상한 것 같다는 보고가 들어왔어. 상단 쪽에서도 계속 적자만 나고 있는 상황이고.”
“왜요?”
“무역을 하게 되면, 돈이 되는 물건과 되지 않는 물건을 적절하게 섞어서 팔게 돼. 이득이 높은 물건만 가져가려 한다면, 그 지역에서 반발을 사게 될 테니까.”
하긴, 거래는 신뢰도 중요한 법이니까. 난 고개를 끄덕이며 일리온의 말을 들었다.
“그런데 최근 지역 상회 쪽에서 노골적으로 돈이 되지 않는 물건만 상단에 넘기려 한다더군.”
“그럼 돈이 되는 물건은요?”
“다른 상단에 넘기는 거지.”
“음, 그럼 셀레스타인 상단 쪽에서 좀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고 물건을 가져오면 되는 거잖아요. 더 비싸게 가져온다던가?”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돈을 얼마를 준대도 안 팔겠다고 한다더군.”
“왜요?”
“그걸 지금부터 알아봐야지.”
일리온은 내 질문에 그렇게 대답했지만, 표정을 보아하니 짐작 가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이번 시찰은 그걸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거고.
상단이니 거래니, 딱히 흥미가 없는 나로선 그저 고개만 끄덕이며 일리온의 뒤를 따랐다.
주변 분위기를 보기 위해서인지 일리온은 가게 이곳저곳을 방문하며 상점가를 둘러보았다.
물건을 사지 않아도 가게를 둘러보는 건 즐거운 일이었기에 난 그의 뒤를 졸졸 쫓으며 새로운 물건을 구경하는 데 정신이 없었다.
“헐, 뭐가 이렇게 비싸?”
마을 기념품으로 연필 세트가 놓여 있길래 무심코 집어 든 나는 학을 떼며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기념품이야 어딜 가도 비슷한 게 널려 있기 마련이고, 수도에서도 황가의 문장을 수놓은 기념품은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수도의 연필 세트가 1실버 남짓인데 반면, 이곳은 2실버가 살짝 넘었다. 질도 한참 떨어져 보이는데, 인건비, 공임, 운반비를 고려하더라도 이건 지나치게 비쌌다.
그러고 보니 연필 세트뿐만이 아니고, 이 기념품 가게 제품의 가격이 전체적으로 높게 책정이 되어 있었다.
아무리 축제 특수라지만 이건, 좀…….
기념품 가게를 나온 우리는 그 옆에 있는 채소 가게와 빵집, 수산 가게를 차례로 들렀다.
북쪽 지역이라 채소가 잘 나오지 않아 비싼 건 이해가 갔지만, 바로 옆이 항구인 이 도시의 생선 가격이 수도와 비슷한 건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였다.
빵 역시, 아무리 밀가루를 다른 도시에서 가져온다고 해도 상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도시치고는 비싼 듯했다.
그러나 물건이 왜 이리 비싸냐 물어도, 상인들은 요즘 물건이 안 들어와 어쩔 수 없다며 대답을 피했고, 계속 꼬치꼬치 캐물으려 하면 화를 내며 쫓아내기까지 했으니 조사가 쉽지만은 않았다.
큰 소득 없이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데 지친 나는 잠시 일리온을 붙잡았다.
“공, 아니 일리온.”
“왜?”
“저 다리 아파요.”
“…….”
“아아, 사탕 하나 먹으면 좋겠다.”
저 멀리서 팔고 있는 사탕을 바라보며 중얼거리자 일리온이 날 빤히 바라봤다.
“……사탕이요. 사탕.”
“…….”
“설마, 약혼녀가 이렇게 간절히 애원하는데 안 사 주실 거예요? 고작 사탕 하난데?”
“돈을…….”
일리온은 난감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돈을?”
“안 가져왔다.”
“……네?”
얘가 지금 뭐라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