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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40)화 (39/159)

40화

처음부터 상황을 좀 더 잘 살폈더라면, 우리의 대화가 이 지경이 되도록 그냥 두지 않았을 테지만 난 여러모로 피곤한 상태였고 사소한 것까지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결국, 이 상황을 피할 대답이 필요했고, 동시에 여전히 일리온이 날 끔찍하게 싫어할 만한 대답이어야 했다.

순간 떠오른 답이 이것 하나뿐인 건 애석한 일이었다.

다만 확신은 있었다.

일리온이 절대 부정할 수 없는 애정 표현이면서도, 동시에 그가 끔찍하게 싫어할 만한 행동이었으니까.

“이제 됐죠?”

“……뭐?”

“애정 표현이요. 보여 드렸잖아요.”

그러니 질겁을 하든, 혐오하든, 화를 내든 어쨌건 일리온은 반응을 보일 것이고, 그럼 난 그 틈에 이 대화의 주도권을 가져와야 했다.

살아남기 위해선 그 방법뿐이었다.

그러나…….

“…….”

“저, 공작님?”

일리온은 아까부터 아무 말도 못 하고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좀 심했나? 그래도 너무 억울해하지는 마. 넌 원래도 성녀랑 키스 한 번 못해 볼 테니까.

아닌가. 이쪽이 더 억울하려나?

어째, 영 정신을 못 차리는 일리온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멍하니 서 있던 그는 그제야 내게서 한 발 물러서더니 입가를 가렸다.

생각보다 훨씬 느린 반응 속도였다.

저런……. 평생 여자 친구도 사귀어 본 적이 없는 남자한텐 너무 자극이 컸던 모양이다.

“이, 이 무, 무슨…….”

일리온은 답지 않게 말을 더듬었고, 그의 목덜미로 검은 반점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게 보였다. 감정 동요가 꽤 큰 모양이었다.

하긴. 끔찍하게 싫겠지. 하지만 여기서 끝낼 생각은 없었다.

“아버지께서 조신하게 행동하라고 그렇게 당부하셨는데, 제게 이런 짓까지 시키시고. 정말 너무하세요.”

난 부채를 펼치며 부끄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뭐? 무슨!”

“첫 키스는 결혼식에서 하려고 아껴 둔 건데.”

“이건, 그대가 먼저!”

“그래도 이걸로 공작님께서 제 마음을 좀 알아주시겠죠?”

“뭐?”

“이걸로도 모자란다면, 제가 무엇으로 더 증명해야 할지……. 혹시 이것보다 좀 더 확실한 게 필요하신가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눈을 깜박이며 일리온을 바라보자 그는 손으로 눈가를 가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대화의 주도권은 완전히 내게 넘어온 듯 보였다.

“이걸로 그냥 넘어갈 거라 생각하지 마.”

네, 네. 그러세요. 어차피 얼마 안 남았는데…….

일리온의 경고를 적당히 흘려들으며 난 그의 뒤를 따라 연회장으로 향했다.

그나저나 성녀는 어쩌고 날 찾아온 걸까?

원작에서 일리온은 늦은 시각까지 성녀와 테라스에서 시간을 보냈었다.

첫 만남에서 성녀는 일리온의 저주를 눈치채고, 일리온의 몸에 새겨진 신성력이 약해졌다며 축복을 걸어 줬다. 그리고 그녀가 걸어 준 축복 덕분에 온몸에 퍼진 검은 반점이 눈에 띄게 줄어들게 되었다.

아무리 약혼녀가 걱정된다고 할지라도, 그 정도 사건이 일어나면 내가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아니면 벌써 축복을 받은 건가?

비슷하게 흘러가면서도 묘하게 어긋나는 이야기에 미간에 주름이 생기도록 고민을 거듭하는데 돌연 벽에 부딪혔다. 일리온의 등이었다.

나는 대체 왜 멈춰 서냐는 표정으로 얼굴을 들었다.

“또 도망칠 생각을 하는 모양이군.”

“……네?”

독심술이라도 배웠니?

“포기해.”

“아직 절 믿지 못하시는 거예요?”

“그대가 날 좋아한다는 건 믿도록 하지. 하지만 도망갈 생각이라면 관둬. 두 번째는 무사하지 못할 테니까.”

그래, 현명하게 생각해서 네게서 도망치는 건 불가능한 것 같길래 포기했어. 난 이래 봬도 포기가 빠른 사람이거든.

“꼭 협박이라도 하시는 것 같네요.”

마지못해 뾰로통하게 대꾸하자, 일리온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글쎄. 이왕이면 애원이라고 해 두지. 그편이 좀 더 그대의 취향이지 않나?”

“어머나, 로맨틱하기도 하셔라. 그럼 드디어 절 아기 새라 불러 주실 건가요?”

내가 씩 웃으며 대꾸하자, 일리온은 기가 찬 듯 헛웃음을 짧게 터트리곤 고개를 돌려 버렸다.

역시 넌 아직 멀었어, 애송아.

타이밍을 놓치지 않기 위해 난 재빨리 말을 더했다.

“사실 저도 공작님을 부를 애칭을 몇 개 생각해 봤는데요, 들어 보실래요?”

“아니.”

“일단 들어 보시고 골라 주세요.”

“싫어.”

***

아침부터 일리온은 기사단 일로 잠시 자리를 비웠다.

일리온이 없는 날은 정정당당히 땡땡이칠 수 있는 얼마 없는 기회였지만, 이런 황금 같은 날 난 여전히…….

“…….”

집무실이었다.

안타깝게도 루카스의 감시는 현재 진행 중이었고, 감시당하는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지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루카스는 기사단 일로 안 가 봐도 돼요?”

“네. 전 괜찮습니다. 그리고 공작님께서도 아가씨를 신신당부하셨거든요.”

루카스는 활짝 웃으며 답했다. 이 얼마나 성실한 사람인가!

어른들이 친구를 잘 사귀라는 게 다 이런 이유에서였다. 같이 다니는 친구가 너무 성실하면 다른 한쪽도 억지로 따라야 하거든!

젠장.

“아가씨, 아무리 공작님이 안 계신다지만 그런 자세는…….”

“편하지.”

소파 위에 누워서 신문을 보며 대답했다.

신문에 가려 잘 보이지는 않지만, 릴리는 아마도 한숨을 내쉬고 있을 것이다.

오늘 신문의 메인 주제는 얼마 전 승리한 전쟁이었다.

전쟁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상대국을 일방적으로 무력으로 찍어 누른 이야기는 황제의 강인함을 칭송하기에 충분했다.

딱히 궁금한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무심코 펼친 페이지 내내 황제의 이야기만 나오니 자연스레 머리가 아파져 왔다.

이 세계에 발을 들인지 2개월. 누구보다도 바쁘게 보낸 2개월이었지만 난 여전히 이곳에 있었다.

어차피 걸을 가시밭길이라면 천국이 낫다고 호기롭게 시작한 일이었으나, 차근차근 가시밭길을 걸어 지옥으로 향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미련한 인간인가.

오이디푸스의 신화처럼, 운명을 거스르려는 모든 시도가 결국은 운명으로 귀결되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소설의 강제력인지 뭔지가 일을 이렇게 꼬아 버린 게 아니냐 하는 말이다. 그게 아니고서야 사고를 치는 족족 일이 틀어질 리가 없었다.

“하아…….”

“땅이 꺼지겠네요.”

릴리는 테이블에 차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차라리 꺼졌으면 좋겠어.”

“농담도 참.”

진심이야.

복잡한 머리를 식히려고 읽기 시작한 신문이었으나 여전히 머릿속은 복잡했다.

굳이 보고 싶지도, 알고 싶지도 않은 황제와 관련된 페이지를 적당히 넘기자 그제야 조금 재미있어 보이는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포르토 대게 축제?”

“어머, 그러고 보니, 그 지역도 곧 대게 축제 시즌이었네요?”

“게라고?”

“……네. 관심 있으세요?”

여기도 게가 있단 말이야?

“안 그래도 공작님께서 잠깐 포르토 쪽으로 출장을 다녀올 거라 하시던데…….”

“출장?”

“예. 급하게 확인할 일이 있다고 하시던데요.”

아니, 지금 성녀를 만나러 갈 시간도 없는데, 출장을 갈 때야?

답답한 마음에 신문을 걷어 내고 몸을 일으켰지만, 생각해 보면 원작에서도 연회 이후로 일리온의 등장이 잠시 뜸하긴 했었다.

“가자.”

“……예?”

“공작님 일하시는데 도와드려야지.”

그래, 아무리 일리온의 등장이 뜸하대도 나까지 가만히 있을 이유는 없었다. 소설 밖에선 소설 밖의 일에 충실해야 하는 법.

이대로 일리온을 보낼 수는 없지.

혼자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킥킥대자 릴리가 영 못 미더운 얼굴로 날 바라봤다.

“정말 도우러 가시는 거예요? 게가 드시고 싶으신 건 아니구요?”

어머, 티 많이 났어?

무심코 침이라도 흘렸나 싶어 입가를 손바닥으로 쓸어 보았지만, 다행히 깨끗했다.

“겸사겸사 즐기고 오자는 거지.”

“공작님께서 허락하실까요?”

“우리가 언제는 허락받고 한 일 있니?”

내가 당당하게 말하자 릴리가 심각하게 고민을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네요.”

***

“안 돼.”

“얌전히 있을게요.”

“그래도 안 돼.”

“말 잘 들을게요.”

“축제에 가고 싶은 거라면 다른 곳도…….”

“공작님 일을 돕고 싶은 거라니까요?”

“이번 일은 그대의 도움이 필요 없네.”

왜 이렇게 단호해? 오늘따라 완고하게 나오네.

후, 내가 웬만하면 이렇게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나는 천천히 감정을 잡으며 처연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공작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저희 가문은 가난해서 게 요리를 단 한 번도 먹어 본 적이 없어요.”

“…….”

“앞으로 누군가 제게 게를 먹어 본 적이 있냐 물으면 전 뭐라고 할까요? 책에서 본대로, 입에서 녹아내리는 맛이라고 적당히 둘러대면 될까요? 아니면 싫어한다고 거짓말을 하면 될까요?”

“…….”

“다음번 연회 때 대화 주제로 게가 나오면 어떡하죠? 아마 전 한마디도 못 하고 있겠죠? 안 그래도 영애들이 절 별로 안 좋아하던데, 이 기회에 아예 왕따가 될지도…….”

“과장이 좀…….”

일리온이 입술을 달싹이며 대꾸하려 했지만, 끼어들 틈을 주지 않기 위해 재빨리 말을 가로챘다.

“아마 이번 기회를 놓치면 평생 게가 뭔지도 모르고 사교계에서 외면당하며 살게 되겠죠. 하지만 어쩔 수 없죠. 공작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니까요. 그래도 전 공작님을 원망하지 않을 거예요.”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내 구구절절한 사연을 들은 일리온은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정말 얌전히 있을 건가?”

“네! 절대 방해하지 않고 얌전히 있을게요.”

단호하게 안 된다고 하던 아까와는 다르게, 맘이 조금 바뀐 듯해 황급히 일리온의 책상 앞으로 다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손바닥 뒤집듯 바뀐 내 행동에 일리온은 어이없는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좋아. 단, 그대에게 위치 추적 마법을 걸어도 된다고 허락한다면 그 요청을 들어주겠네.”

“……공작님 그거 사생활 침해…….”

“싫다면 포기하게.”

역시 그냥 들어줄 생각은 없구나?

“그럼 어쩔 수 없죠.”

일리온이 뭘 걱정하는지 알겠지만, 아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난 당분간 이 저택을 벗어나려고도, 일리온에게서 도망치려고도 하지 않을 테니까.

배로 늘어난 경비병과 매일같이 날 따라다니는 루카스를 뚫을 자신도 없거니와, 공작가를 적으로 돌릴 생각도 없었다.

일이 이렇게 돼 버린 거, 지금 시점에서는 일리온이 성녀에게 반해 내게 파혼하자고 하는 것이 더 빠를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나대로 파혼 이후의 일에 대한 계획을 준비할 생각이었다.

돈이라면 충분했고, 제국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운 몇몇 나라에 대한 조사도 이미 끝났다.

나머지는 신분 세탁을 도와줄 사람을 알아보고, 후보지 중에 한군데를 고르기만 하면 된다.

추가로, 일리온에게 미움받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내 계획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그러니,

“위치 추적 마법, 걸어 주세요.”

흔쾌한 승낙에, 일리온은 날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공작님께서 저를 그리 걱정하시니, 이참에 마법을 걸어 두는 것도 괜찮겠네요. 이것 참, 절 그렇게 아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다니까요?”

“…….”

오늘도 역시나 그의 감시를 애정이라고 부르는 내 순수함에 정신을 못 차리는 일리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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