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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39)화 (38/159)

39화

이번엔 정말로 발을 밟을 뻔했다. 내가 생각해도 엄청난 반사 신경으로 간신히 발길을 틀어 바닥을 짚지 않았다면, 분명 밟았을 것이다.

“……노, 농담이 지나치십니다.”

얼얼하게 아픈 발바닥을 뒤로하고 간신히 웃어 보였으나 클라우스는 내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내 어색한 웃음소리만 이어질 뿐이었다.

그는 로맨틱한 의미로 이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실없는 말을 종종 내뱉는 사람이지만, 절대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지금은 괜히 자극하지 말자. 이유가 뭐든 더 이상 클라우스의 관심을 받는 건 곤란했다.

“당장은 바라는 소원이 없사옵니다. 나중에 혹여 생기게 된다면 그때 부탁드릴게요.”

“그래? 어쩔 수 없군. 내가 그때까지 기억하고 있다면 들어주도록 하지.”

“…….”

그래. 이런 사람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역시나 빈말이었다는 사실만 깨달을 뿐이었다.

“그보다, 어째서인지 겁을 먹었군, 그래?”

“기, 긴장해서 그러합니다.”

“그런가?”

그렇게 말하는 클라우스의 표정은 조금 전까지와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사람을 많이 죽이다 보면, 긴장과 공포 정도는 구분할 수 있게 되더군.”

“……네?”

그는 나른한 목소리로 대수롭지 않은 듯 엄청난 이야기를 꺼냈다.

“그래서 궁금해. 난 오늘 그대에게 쭉 친절하게 굴고 있는데, 어째서 이렇게나 겁에 질린 걸까?”

마음을 들키기라도 한 듯, 사람을 꿰뚫어 보는 듯한 푸른색 눈동자만 하염없이 바라보는데 그가 스텝을 멈추고 내게 인사를 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음악이 멈춰 있었다. 나 역시 서둘러 치마를 들어 올려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즐거웠네. 그럼 다음에 또 보도록 하지. 라벤느.”

거짓말로라도 그렇겠다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숨이 막힌 듯 말이 나오지 않았고, 발이 바닥에 붙은 듯 걸음을 뗄 수 없었다.

그렇게 한동안 멀어지는 황제를 바라보다 간신히 사람들 틈 사이로 몸을 숨겼다.

가슴이 답답했다.

화장실이든, 파우더룸이든, 아니면 길을 잃어 황성 한가운데에 갇히든 상관없을 것 같았다. 그저 저 푸른 눈동자가 닿지 않는 곳으로 벗어나고 싶었다.

***

간신히 연회장을 빠져나온 나는 인적이 드문 복도에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구름이 끼어서인지 오늘따라 유독 달도, 별도 보이지 않았다.

될 수 있는 한 황제에게 책잡히지 않기 위해 노력했는데, 그런 태도가 오히려 독이 되었던 것일까?

태연함을 연기하는 거라면 이미 이골이 났다고 생각했는데 클라우스에게는 그것도 소용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아직도 손끝이 차가웠다.

일리온이야 아무리 미쳐도 내 목을 뎅강 자르지 않을 거라는 털끝만 한 믿음이라도 남아 있지만, 황제는 정말로 그럴 놈이었으니까.

내일이 되면 그는 성녀가 보는 앞에서 그녀의 수발을 드는 하녀의 목을 자를 것이다. 그녀가 성녀에게 불손했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진짜 목적은 따로 있었다. 황제는 단순히 성녀를 정신적으로 괴롭히기 위해서 하녀의 목을 자른 것뿐이다.

지금까지 그런 모습이 직접적으로 나타나지 않은 이유는, 그가 본모습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었다.

클라우스는 형제들을 모조리 죽이고 황위에 올랐다.

그러나 즉위 당시 그의 발판은 그리 단단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반대하는 귀족들이 많았다.

현재는 그의 공포 정치와 더불어 정복 전쟁으로 인해 황권이 과거에 비해 많이 단단해진 상태였고, 황제는 차츰 자신의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시작점에 있는 것이 바로 성녀였다.

그 불똥이 내게도 튀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하아.”

“음료를 가져온다더니 길을 잃었나?”

“으아앗!”

한숨을 내쉬다 익숙한 목소리에 기겁하며 고개를 돌렸다. 대체 언제 온 것인지, 일리온은 기척도 없이 내 뒤에 서 있었다.

아직 진정되지 않은 심장은 또 한 번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제발 부탁이니까 인기척 좀 내고 다니라고! 이러다 심장 마비로 먼저 죽겠다.

“왜 여기 계세요?”

“왜냐니. 나와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싶다던 사람이 안 오기에 찾으러 나왔네.”

성녀는 어쩌고요? 라는 말을 간신히 참은 나는 준비해 놓은 핑계를 떠올렸다.

“샴페인을 들고 가다 옷에 음료를 흘렸지 뭐예요? 그래서 파우더룸에 다녀오는 길이에요. 많이 기다리셨나요?”

“파우더룸은 이쪽이 아닐 텐데?”

“공작님도 아시다시피 제가 심각한 방향치라서요. 안 그래도 길을 잃어 곤란했는데, 마침 공작님께서 찾으러 와 주셨네요.”

“……길을 잃었다고 할 셈이군.”

“정말 길을 잃었답니다.”

나는 생글거리며 웃었다. 클라우스를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오늘치 할당량을 초과했다. 그러니 우리 그냥 조용히 돌아가면 안 될까?

“그럼 뭐, 길을 잃은 김에 여기서 오붓한 시간을 보내도록 하지.”

“……네?”

그렇게 말하며 일리온은 내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공작님? 너무 가까운 거 아니신지…….”

순식간에 코앞까지 다가온 일리온은 조금 서늘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아까 폐하와 무슨 얘기를 한 거지?”

아, 그게 궁금해서 여기까지 온 거야? 테라스에 있느라 못 본 줄 알았는데, 그걸 또 본 모양이었다.

“그림 얘기를 좀 했죠.”

“그것뿐인가?”

정확히 말하면 그것 뿐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시시콜콜 말하고 싶지는 않은 이야기였다. 괜히 쓸데없는 얘기로 일리온의 관심을 끌고 싶지도 않았고.

“네. 제가 그림을 돌려준다고 했더니 좋아하시던걸요?”

“귓속말을 하는 것 같던데.”

그것도 봤어?

“음, 그림을 받는 대신 원하는 게 있다면 들어주시겠대요.”

“또?”

“그것뿐인데요?”

일리온의 붉은빛 눈동자가 집요하게 날 관찰했다.

“거짓말을 하는군.”

“제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요. 공작님은 저에 대한 믿음이 그렇게 없으신가요? 전 오로지 공작님뿐인데…….”

오늘따라 집요하게 추궁하는 일리온 때문에, 난 일부러 부채를 펼쳐 얼굴을 가리며 슬픈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래서 내게서 도망칠 계획을 세웠나?”

우리 그 얘긴 끝난 거 아니었어?

“그건 공작님의 관심을 받고 싶어서.”

“글쎄, 관심을 받고 싶었다고 하기엔, 막상 관심을 받는 상황에 그리 기뻐하지 않는 것 같던데.”

티 났나?

“흠흠, 제가 원래 표현에 서툴러서요.”

“…….”

“게다가 주변 눈이 좀 많아야죠. 저택엔 세바스찬도 있고, 시종들도 있는데 제가 어떻게 티를 내겠어요? 사실 마음 같아서는 매일같이 공작님께 애정 표현을 하고 싶답니다.”

“좋아. 해 봐.”

“……?”

무슨 소리야? 뭘 해 보라는 건데?

“여긴 그대가 신경 쓰는 사람도 없지 않나.”

아니, 아니. 그 얘기가 아니라. 원래 내가 이렇게 말하면 질색하고 반박해야 하잖아. 뭘 해 보라는 건데?

“그래도 혹시 지나가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요?”

당황해 핑계를 대자 일리온이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어차피 곧 결혼할 사이인데, 누가 본다 한들 그리 흠이 되진 않을 거다.”

“…….”

공작님, 왜 이러세요, 진짜?

“아니면, 못할 다른 이유라도 있는 건가?”

일리온이 한 발자국 더 다가오며 내게 물었다. 잘생긴 얼굴이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면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더니, 내가 지금 그랬다.

이 얼굴엔 면역력이 생긴 줄 알았더니,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이다.

“그게…… 갑자기 시키셔서 당황해서요.”

간신히 핑계를 쥐어짜 내자 일리온이 서늘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게 아니라, 그대가 내게 한 말이 모두 거짓말이기 때문이겠지.”

“…….”

“날 좋아한다던 말도, 관심이 받고 싶다는 말도, 사이좋게 지내고 싶다는 말도, 모두…….”

일리온의 차가운 오른손이 천천히 내 목을 감싸 쥐었다. 언뜻 보기엔 로맨틱한 모습이었지만, 단단한 손가락엔 힘이 살짝 들어가 있었다. 금방이라도 내 목을 조를 것처럼.

역시. 일리온은 날 믿지 않았다. 그간 이상하다고 느꼈던 행동은 모두 날 떠보기 위함이었다.

내가 숨기고 있는 게 뭔지, 내가 어디까지 진실을 얘기하는지, 자극을 주어 반응을 지켜보고 있었다.

내가 과연 믿을 만한 사람인지에 대해서.

만약 일리온이 날 더 이상 믿을 수 없는 사람으로 간주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

라벤느의 끝은 사형이었다. 그리고 이 소설은 어떻게 해서든 날 원작의 줄거리 속으로 들이밀었다.

내가 성녀에게 적의가 없다 하더라도 라벤느의 죽음이 정해진 거라면……. 어쩌면, 나 역시 율리아나 세르지오 같은 처지가 될지도 몰랐다.

일리온의 서늘한 손가락은 내 대답을 기다리기라도 하듯 한치의 미동도 없었다.

그렇다면 난 살기 위해서 뭘 선택해야 하는 거지?

***

일리온은 입을 다문 라벤느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엔 보기 드물게 당혹스러운 감정이 물들었다. 마치 궁지에 몰린 쥐처럼.

성급했다고 생각했다.

라벤느와의 이 기묘한 관계는 좀 더 장기전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오늘따라 유독 주변을 살피는 그녀의 태도는 안 그래도 예민한 일리온의 신경을 거스르기 충분했다.

게다가 황제와 단둘이서 귓속말까지 나누는 걸 보고 나니 도저히 그대로 넘길 수 없었다.

둘이서 무슨 얘기를 한 것인지, 혹은 라벤느가 황제파 귀족의 사람은 아닐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래서 이렇게 추궁하고 있는 거지만, 그녀는 오늘도 사실을 얘기해 줄 생각이 없는 듯 진실을 감추었다.

라벤느는 거짓말을 할 때면, 순간 오른쪽을 한번 바라보다 눈을 마주치는 버릇이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황제에 관해 물을 때도 마찬가지로, 오른쪽 허공에 잠시 시선을 두다 제게 눈을 맞춰 왔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도 모르는 채, 답답한 대화는 쳇바퀴 돌듯 이어졌다. 그녀는 또 거짓말을 하고, 자신은 또다시 추궁하고.

이 귀찮은 대화를 빨리 끊어 버리고 싶었다. 그녀가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면, 차라리 여기서 그녀와의 관계도 모두 끊어 버리게.

물론 순순히 끊어 보낼 생각은 없었다. 숨기고 있는 게 무엇인지 모두 토해 내게 하는 게 먼저였다.

일리온은 제 손에 쥐어진 가느다란 목덜미를 바라보았다. 조금만 힘줘서 쥐어도 멍이 들 것 같은 하얀 피부였다.

그녀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자신을 위협할 수도 있는 존재를 가만둘 수 없다는 마음이 쉴 새 없이 충돌했다.

라벤느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이렇게까지 해서 지키고 싶은 비밀이란 게 대체 뭐길래 감추는 걸까.

좀 더 겁을 줘 볼까 하다가도, 선명한 녹색 눈동자를 바라보면 이상하게 몸이 마음대로 따라 주지 않는다.

“또 입을 다물었군. 뭐, 그대의 입에서 진실을 뱉어 내게 하는 방법이야 여러 가지…….”

처음부터 황성에서 소란을 일으킬 생각은 없었다. 말을 하지 않겠다면, 처분은 저택에 돌아가서 내려도 상관없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의 목을 쥔 손가락에 힘을 푸는 순간, 작은 두 손이 제 옷깃을 잡아끌었다.

몸이 휘청인다 생각한 것도 잠시, 일리온은 자신의 시야를 가득 채우는 녹색 눈동자에 정신을 빼앗겼다.

그사이, 라벤느는 살며시 제게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이제 됐죠?”

“……뭐?”

“애정 표현이요. 보여 드렸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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