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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38)화 (37/159)

38화

“지금부터 폐하께 인사를 하러 갈 거야.”

일리온이 생각에 빠져 있던 내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지, 지금요?”

지금 저 최종 보스를 보러 가겠다고? 난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는데?

그러나 이 빌어먹을 귀족 사회엔 작위가 높은 귀족부터 황제에게 인사를 해야 한다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는 모양이었다.

머릿속이 하얘지기 시작했다. 고작 인사 따위에 머릿속이 하얘진다니, 누가 들으면 비웃을 이야기였지만 이쪽은 절박했다.

일단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눈에 띄지 않게…….

“무슨 말을 듣든 화내지 말고, 당황하지도 마. 만약 질문에 대한 대답이 생각나지 않으면 그냥 가만히 있고.”

일리온이 옆에서 무어라 조언을 해 주었지만, 그 뒷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세바스찬과 릴리와 함께했던 수많은 예법을 떠올리기에 바빴으니까.

안 그래도 눈에 띄는 옷을 입고 있는데 실수라도 했다간 영영 찍힐 것이다.

일리온에게 이끌려 황좌 앞에 선 나는 장갑 사이로 땀이 배어나는 걸 느끼며, 드레스 자락을 쥐었다.

‘우아하게, 급하지 않게, 치마는 살짝 들고……. 입가엔 미소를…….’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내심 완벽한 인사라 생각하며 고개를 들자 푸른색 눈동자가 무례하다 싶을 정도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혹시 뭐 실수했나 싶어 표정이 굳는데, 무표정이던 얼굴이 마치 신기루처럼 사라지며 푸른색 눈가가 둥글게 휘었다.

“그대가 소문의 라벤느 영애인가? 셀레스타인 공작이 꼭꼭 숨겨 놨다던 약혼녀를 이렇게 보게 될 줄이야. 소문대로 아름답군.”

“과찬이십니다. 폐하.”

난 서둘러 고개를 숙이며 그의 칭찬에 화답했다.

그는 한결같이 일리온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내 쪽만 바라보며 입을 뗐다.

“그래, 이렇게 본 김에 그대에게 춤을 한 곡 신청해도 될까?”

“그야 물론…… 네?”

어찌 내가 황제의 말을 거절하겠나 싶어 적당히 대답하려다 그의 물음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지금 나랑 춤추고 싶다고 한 건가? 원작에서는 라벤느랑 춤을 췄다는 이야기는 없었는데?

아무리 클라우스가 제멋대로라지만 생각보다도 종잡을 수 없는 인간이었다.

한동안 싫다는 거절을 어떻게 곱게 돌려서 말할까 고민하는데 나 대신 일리온이 먼저 말을 꺼냈다.

“죄송합니다만 제 아내는 지금 다리를 다쳤습니다. 당분간 조심해야 합니다.”

나이스 어시스트! 다리를 다친 적은 없었지만, 일리온 덕분에 구구절절한 핑계를 마련할 필요가 사라졌다.

난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난처하게 클라우스를 바라보았다.

클라우스는 그 천사 같은 얼굴로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몰랐다면 깜빡 속아 넘어갈 만한 표정이었다.

“그거참 아쉽게 됐군. 그나저나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약혼녀를 아내라고 하다니, 나도 모르는 새 결혼식을 올린 건가?”

“3개월 뒤에 결혼식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폐하께서도 부디 참석하셔서 축하해 주셨으면 합니다.”

클라우스가 일부러 짓궂은 농담을 던진 것처럼 보였지만, 일리온은 눈썹 하나 바뀌지 않고 대답했다.

“공작은 정말로 놀리는 재미가 없군.”

그렇게 말하며 그는 재미없다는 듯 등을 의자에 기대었다.

저 나른한 눈동자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뒤돌아 멀어지는 와중에도 어쩐지 클라우스의 시선이 내 뒤통수에 꽂히기라도 한 듯 따가웠다.

***

무사히 인사를 마치고, 다시 사람들 틈바구니에 섞여 샴페인을 홀짝이던 난 일리온을 테라스로 보낼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한쪽에서 조용히 서 있던 성녀는 황제와 몇 마디를 주고받더니 테라스로 향했다.

원작대로라면 이때 일리온 역시 사람들의 관심에 피로함을 느끼고 테라스로 향하는 타이밍이었다. 그러나…….

“뭘 자꾸 힐끔거리지?”

아까부터 자꾸 날 감시하듯 내 옆에 찰싹 붙어 있는 일리온은 도통 테라스에 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힐끔거리는 게 아니라 주변 구경을 좀 했어요.”

내 말에 일리온은 또다시 못 미더운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보다 공작님, 좀 덥지 않으세요?”

“글쎄…….”

“저는 좀 더운 것 같은데, 테라스에 가서 잠깐 쉬는 건 어때요?”

“딱히…….”

“그러지 마시고, 제가 음료수 가져갈 테니 먼저 가서 기다리고 계세요.”

“음료수라면 여기 널리지 않았나?”

내 말을 족족 쳐 내는 일리온을 바라보며 난 결국 비장의 기술을 사용하기로 했다.

“공작님이랑 단둘이 테라스에서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싶은 제 마음을 이리도 몰라주시다니…….”

사뭇 부끄러운 척 눈빛을 흘리며 일리온을 바라보았다. 그의 이마에 불쾌함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러나 이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대로라면 내 부탁을 거절했었을 사람이 고분고분 내 말을 들어주니, 생각보다 기분이 묘했다.

왜,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곧 죽을 날이 가까워졌다고들 하지 않던가?

그야 죽을 날이 가까워진 건 사실이지만…….

동시에 내 죽을 날도 가까워지고 있지.

그나마 예정대로 테라스로 향하는 일리온의 뒷모습을 보며 난 한시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일리온이 성녀랑 만나면 그 뒤부터는 원작이 진행될 것이다. 그리고 난 일리온으로부터 파혼을 제안받을 거고.

그 뒤엔, 최대한 빠르게 이 나라를 떠나 황제의 눈에 닿지 않는 곳에서 살면 된다.

처음 계획과는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원래 숙제라는 건 마감이 닥쳤을 때 해야 진짜인 것이다.

지금까지는 내가 주제넘게 너무 미리부터 준비해서 잘 안 됐던 것뿐.

그러니 이번만큼은 잘못될 리 없었다.

난 한쪽 구석에서 샴페인을 홀짝이며 소설의 초반부를 떠올렸다. 깔끔하면서도, 담담한 묘사로 두 사람의 두근거림을 표현하던 그 장면을…….

서로가 인생의 마지막 희망이라는 건 그 어떤 사랑 이야기보다도 로맨틱했다.

평생을 언제 죽을지 모를 저주에 시달려 온 일리온에겐, 자신의 저주를 풀어 줄 수 있는 성녀가 희망이었고, 적국의 포로로 끌려온 성녀에겐 자신을 황제로부터 구원해 줄 일리온이 희망이었다.

그런 서로가 만났다.

아무리 운명이니, 사랑이니 하는 것에 관심이 없는 일리온이라 할지라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오늘, 이 만남이야말로 신이 자신을 위해 짜 놓은 운명이라는걸.

뭐, 제 목숨 소중한 줄 아는 이물질은 적당한 타이밍에 빠져 줄 테니, 부디 둘이서 세기의 사랑을 나누기를…….

“잘 됐으면 좋겠는데…….”

“뭐가 말인가?”

“그야, 둘이서…….”

내 혼잣말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불청객을 바라보다 그만 샴페인 잔을 놓치고 말았다.

“저런, 깨질 뻔했군.”

그는 재빠른 손으로 샴페인 잔을 받아 들고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내 손에 다시 쥐여 주었다.

“가, 감사합니다. 폐하.”

손끝에서부터 피가 빠져나가는 듯한 소름 끼치는 감각에, 간신히 잔을 쥔 나는 둥글게 휘어진 푸른색 눈동자를 마주했다.

왜 클라우스가 나타난 거지? 분명 눈에 띄지 않기 위해 가장 구석에 몸을 숨겼을 텐데? 하필이면 일리온도 없는 지금…….

“공작이 없는 사이에 내게 그대와 한 곡 출 수 있는 기회를 주었으면 하는데…….”

“그게…… 다리가…….”

“그거야, 공작의 거짓말일 게 뻔하지 않은가?”

그렇게 되묻는 황제의 눈빛은 무해하기 그지없었으나, 그의 목소리는 어쩐지 위험했다.

여기서 내가 다리가 아파 안 된다고 했다가는 정말로 그런지 시험해 보겠다며, 내 두 다리를 못 쓰게 만들 것 같았다.

“공작의 귀여운 거짓말은 눈감아 줄 테니, 어떤가?”

그렇게 말하며 클라우스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더 이상 제안이 아니었다.

‘퇴로를 남겨 두면 사냥감은 그것이 마지막 희망인 듯 도망치다, 함정이라는 걸 깨달으면 순식간에 전의를 상실하지.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는 그 순간의 표정, 그걸 보는 것만큼 즐거운 것도 없어.’

천사같은 얼굴에 악마같은 미소가 스며들었다.

‘그러니 아르티아, 그대는 부디 도망치고 또 도망치게. 그리고 내 손에 벗어났다고 느끼는 그 순간, 스스로 절망으로 떨어지게.’

어째서 이런 황제의 독백이 떠올랐을까. 황제의 기행이나 만행은 다양했지만, 이 독백만큼이나 그의 광기와 집착을 표현한 대사는 없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그만큼 그는 사람을 가지고 놀길 좋아하는 인간이었다.

물론 그 정도로 상황이 나쁜 것도, 내게 집착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고작 엑스트라인 내게 관심을 갖는 것 역시 잠깐의 변덕일 테였다.

그러니 걱정할 것 없다고 스스로 타일러 보지만, 몸이 멋대로 긴장하고 말았다.

원작 속 황제의 대사를 곱씹으며, 난 어쩐지 사냥감이 된 기분으로 황제의 손을 잡았다.

주변의 시선은 우리 쪽을 향해 있었지만, 그런 시선 따윈 신경 쓸 거리도 못 된다는 듯 클라우스의 발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황제의 움직임에 맞춰 악단은 잔잔한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기절이나 하면 좋으련만, 내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도 말짱해 발끝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황제의 발을 밟았다가는 두 다리가 아니라, 사지가 무사하지 못할 것만 같았으니까.

“그대가 렘피토의 그림을 갖고 있다고 들었네.”

아, 삐끗할 뻔.

나는 간신히 중심을 되찾으며 클라우스를 바라보았다.

“네. 우연히 진품을 발견하게 되어서요.”

“내게 팔 생각은 없나? 어쩐지 위조품을 가진 것도 불쾌해서 말이야.”

“판매라니요. 그 그림은 원래 폐하의 물건인데요. 당연히 주인을 찾아 드릴 생각이었습니다.”

내 말에 클라우스는 눈썹을 까딱했다.

“그래? 빚지는 것 같아 그것도 썩 내키지는 않는데…….”

그는 내 허리를 잡고 스텝을 밟으며 말을 흐렸다.

내 하찮은 정신력은 대화와 스텝을 따라가지 못해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로웠다.

로맨스 소설이나 읽으며 나태한 일상을 보냈기 때문일까, 벌써 뇌에 과부하가 오는 듯했다.

“그럼 그 대신 그대가 원하는 것 한 가지를 들어주지.”

“원하는 것이요?”

“그래. 뭐든지 말해 봐.”

크리스마스 선물로 뭘 받고 싶은지 묻는 산타클로스처럼 인자한 미소에 난 잠시 눈이 멀어 원하는 걸 그대로 말할 뻔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나중에 일리온이 반역을 일으켜도 절 죽이지 말아 주세요!’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

“정말 뭐든지 들어주실 건가요?”

“그래.”

시종일관 미소 띤 얼굴로 날 바라보던 그는 무언가 발견한 듯 시선을 잠시 먼 곳으로 던졌다. 그리고는 곧이어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대답을 머뭇거리고 있자, 클라우스는 살짝 고개를 숙여 내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그대가 황비 자리를 원한다 해도 내 들어주도록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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