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와아……. 핑크색에 눈이 멀어 버릴 것 같아. 아앗, 릴리, 나 정말 앞이 안 보여. 역시 연회는 못 갈 것…….”
“사제님을 불러올까요?”
릴리는 내 절박한 연기에 그저 환하게 웃었다.
릴리도 날 대하는 내공이 쌓인 모양이었다. 이제 이 가증스러운 연기가 전혀 안 먹히는 걸 보면.
“릴리, 우리 남색 드레스 있는 거, 그거 입으면 안 될까? 내가 봐도 이건 좀…….”
“그건 저번에도 입으셨잖아요. 공식 연회는 이걸로 두 번째인데, 같은 드레스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그렇지만 이것도 좀 아니지 않니? 이걸 보라고. 이 눈이 멀 것 같은 핑크색을! 금사 자수는 핑크색에 가려 보이지도 않아!
이래선 1km 밖에서도 나라는 걸 알 거라고!
“그리고 좀 눈에 잘 띄는 것뿐이지, 생각보다 아가씨랑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그래, 이 미칠 듯한 핑크색 원단으로 이 정도까지 드레스를 아름답게 뽑아 놓은 디자이너의 실력은 인정하지만…… 문제는 눈에 너무 잘 띈다니까?
안 그래도 일리온의 약혼녀로 시선이 몰리는데, 구태여 ‘여러분! 제가 바로 일리온의 약혼녀입니다. 하하핫, 맞아요. 제가 그 화제의 약혼녀예요! 보이세요? 저예요, 저!’라는 관종의 아우라를 풍길 필요는 없지 않으냔 말이야.
그냥 투명 인간이 되고 싶어! 아니, 될 수 있으면 연회에 가고 싶지 않아!
“나 역시 아픈 것…….”
“그럼 황성 가는 길에 잠깐 신전에 들를까요? 세바스찬 님께 말해 놓을게요.”
그렇게 말하는 릴리는 여전히 싱긋 웃고 있었다.
릴리, 언제 이렇게 커 버린 거야. 난 널 이렇게 키우지 않았다고!
처음의 귀여웠던 릴리는 이제 세상에 산타 따윈 믿지 않는 훌륭한 어른이 되어 버려 내 말을 믿어 주지 않았고, 덕분에 오늘도 난 질질질 끌려 현관 앞에 세워졌다.
눈부신 핑크색 드레스에 폭 감겨, 운석 충돌이 일어나 황성이 폭파되지는 않을까 하는 마지막 희망을 버리지 못한 채로 일리온을 마주했다.
“드레스가 잘 어울리는군.”
“…….”
지금 얘가 뭐라는 거야? 정말 미친 거 아니야? 차라리 운석 충돌이 더 현실적인 것 같은데?
어쩐지 점점 이상해져 가는 일리온이었지만, 난 오늘도 태연하게 칭찬을 받아 기쁘다는 듯 호들갑을 떨며 마차에 올라탔다.
***
황성으로 가는 마차 안은 조용했고 그 적막을 견디는 건 오롯이 내 몫이었다.
결국, 견디다 못한 난 일리온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한동안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않으려고 일부러 꺼내지 않았던 세르지오와 율리아에 대한 것들이었다.
될 수 있는 한 그날의 얘기는 하지 않으려 했지만, 그날을 기점으로 일리온의 태도가 바뀌었으니 어쩌면 이 대화가 단서가 될지도 몰랐다.
그러나 내 기대와는 다르게 일리온은 메마른 목소리로 세르지오와 율리아는 모두 감옥에 수감되었고, 해바라기 그림도 되찾았고 얘기해 주었다.
대화 내내 그 사건의 주모자인 나를 일부러 지워 버리듯, 내 잘못을 따지거나 화를 내지 않았다.
그렇게 대화는 큰 소득 없이 끝났고, 머릿속엔 생각만 많아진 채로 우리는 어느새 황성에 도착하고 말았다.
“연회장에 들어가면, 내 옆에 붙어 있어.”
“제가 그렇게 못 미더우세요?”
일리온을 보며 묻자 그가 무슨 당연한 이야기를 하느냐는 듯 날 바라봤다.
이런 반응을 보면 얘가 미친 건 아닌데…….
“그리고 절대 폐하를 독대하지 말고.”
아무리 내가 미친 척해도 내 목숨 소중한 건 알아. 독대하라고 등 떠밀면 혀 깨물고 죽은 척할 거야!
“그리고 손.”
“……네?”
갑자기 손은 왜 찾아? 어리둥절한 얼굴로 일리온을 바라보았다.
“그대가 정말 예절 교육을 받은 거라면, 그 선생을 고소해야겠군. 입장할 땐 남자의 에스코트를 받는다는 건 기본 아닌가?”
“…….”
그럼 그렇게 말하면 되지. 좋게 말하는 법이 없다니까.
나는 재빨리 일리온의 팔에 손을 얹었다. 일리온은 내 보폭에 발을 맞춰 주며 천천히 무도회장 입구로 향했다.
“잠깐만요. 저번에 후작 부인의 연회 때는 이런 말 없었잖아요?”
문 앞에 당도해서야 뭔가 이상함을 느낀 내가 물었으나, 내 말은 우리의 입장을 우렁차게 외치는 시종의 목소리에 묻히고 말았다.
물론 그럼에도 바로 옆에 있는 일리온은 내 말을 못 들었을 리 없지만, 그는 못 들은 척 대꾸하지 않았다.
회장에 들어오니 지난번 후작 부인의 연회에서 봤던 인물들이 하나둘 눈에 띄기 시작했다.
율리아 옆에서 내게 샴페인을 쏟았던 영애는 날 보더니, 고개를 숙이며 멀어졌고, 기블린 남작은 못 볼 거라도 본 듯 인상을 구기더니 등을 돌려 버렸다.
그나마 란셀 후작 부인만이 우리에게 살갑게 인사를 건네 왔다.
“오랜만이네요, 리슈펠트 양.”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부인?”
“아니요, 전 안녕하지 못했답니다. 영애가 에그타르트 레시피를 배우러 온다고 해서 잔뜩 기대했는데, 기별 하나 없더군요. 영애의 전보만 기다리다 늙어 버리겠어요.”
후작 부인은 짐짓 슬픈 표정으로 날 보며 대답했다.
아, 맞아. 레시피 배우러 간다고 했었지.
일리온한테 벗어나는 데 정신이 없어 그런 약속을 했다는 것도 깜박했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요즘 너무 정신이 없어서……. 조만간 꼭 한번 찾아뵐게요.”
“농담입니다. 사과하실 거 없어요. 정신없으실 만도 하죠. 리슈펠트 양의 활약은 신문으로 잘 보고 있답니다.”
그렇게 말하는 후작 부인은 언제 우울한 표정을 지었냐는 듯 싱긋 웃으며 대화를 이었다. 기분이 나쁜 게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공작님은 좋겠어요? 이렇게 다재다능한 영애를 부인으로 맞이하셔서요.”
부인의 말에, 일리온은 날 슬쩍 바라보며 대답했다.
“네. 재능이 넘쳐, 매일 따분할 틈이 없죠.”
일부러 나보고 들으라고 하는 말인가?
“세상에, 공작님 입에서 그런 말이 다 나오다니. 리슈펠트 양이 바쁜 이유가 공작님이 놓아주지 않으셔서 그런 거 아니에요?”
잘 물어보셨어요, 부인. 일리온에게 질 수 없다고 생각하며, 나름 심각한 표정을 짓고서 일리온의 대답을 가로챘다.
“후작 부인께만 드리는 말이지만, 맞는 말씀이에요. 공작님께서 한시도 저랑 떨어지고 싶지 않으신지 매일 저만 찾는다니까요. 요즘은 공작님 때문에 밤에 잠도 잘 못 자고…….”
말끝을 흐리며 부끄럽다는 듯 부채를 펴 얼굴을 가렸다.
일리온이 매일 날 찾아 일을 시키는 것도 사실이었고, 내가 요즘 그에게 시달리느라 밤에 잠을 못 자는 것도 사실이었다.
물론, 의도적으로 생략된 말이 조금 많을 뿐 거짓말은 없었다.
“그대가 밤에 잠을 잘 못 자는 줄은 몰랐군?”
“공작님께서 절 방에 안 돌려보내시니, 통 잠을 잘 수 있어야죠.”
일리온이 억지로 웃으며 대꾸했고, 나 역시 그에 맞춰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남들이 들으면 딱 오해하기 좋은 대화에 후작 부인은 호들갑을 떨어 주셨다.
“역시 젊은 게 좋다니까? 우리 후작님께서 셀레스타인 공작님의 반만 닮으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어디가 어때서 그러나 부인? 부인을 사랑하는 마음이라면 나도 누구에게…….”
옆에서 가만히 듣기만 하던 란셀 후작이 한마디 했으나, 그 말은 곧바로 부인의 손에 의해 막히고 말았다.
“우리 그런 말은 집에서만 하기로 했잖아요?”
“하지만, 부인이 자꾸 부러워하니까.”
후작 부인은 민망한지 남편의 손을 끌어당기며 우리에게 손을 흔들었다.
“잠깐 남편이랑 대화 좀 나누고 올게요. 좀 있다 봬요. 리슈펠트 양.”
“부인이 내 사랑을 의심한다면, 난 사는 의미가 없어. 정말이야, 부인. 우리 셋째라도 가질까? 난 지금이라도…….”
“민망하니까 조용히 좀 해요. 우리 나이에 셋째라니 남들이 들으면 욕한다니까요!”
서로 속삭이며 하는 대화가 잔잔한 배경 음악처럼 들려왔다. 진짜 사랑꾼은 따로 있었다.
어디 공작가의 쇼윈도 커플과는 다르게 말이다.
“내가 돌려보내 주지 않아 잠을 못 잔다니……. 누구보다 푹 잔 얼굴로 매일 아침 나타나길래, 잠은 잘 자는 줄 알았는데.”
“푹 자는 것과 잠을 이루지 못하는 건 다르답니다.”
“그건 내 탓이 아니라 그대가 생각이 많기 때문이겠지.”
“어머나, 제가 그렇게 지적으로 보이나요? 공작님께서 그런 칭찬을 해 주실 줄 몰랐는데 너무 기쁘네요.”
내가 이런 식으로 속없는 소릴 할 때면 으레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던 일리온이 오늘은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더 해 보라는 듯 날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이상했다.
훌륭한 피아노 연주 사이로, 조율이 잘못된 건반 음이 한 번씩 신경을 거스르는 것처럼 이따금 선율을 벗어난 일리온의 행동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가 이러는 이유를 고민해 보아도, 그를 이제 겨우 2개월 남짓 알고 지낸 내게는 어떤 건반이 말썽인지 찾는 게 쉽지 않았다.
한때나마 그에 대해서라면 세바스찬 다음으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전부 내 헛된 자만이라는 사실만 새롭게 깨달을 뿐이었다.
“황제 폐하 입장하십니다!”
일리온에 대해 깊은 고민에 빠질 새도 없이, 우렁차게 울리는 목소리에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눈부신 금발 머리에, 푸른색 눈동자를 가진 요정처럼 사랑스러운 남자가 호위를 대동하고 천천히 들어왔다.
새하얀 정복에 금사로 수놓아진 화려한 장식은 주인을 잘못 만나 빛을 잃은 것만 같았다. 그만큼 황제의 미모는 소설의 묘사 이상으로 아름다웠다.
일리온이 냉미남의 이미지라면, 클라우스는 그야말로 온미남의 정석이었다.
누가 생각이 얼굴에 드러난다고 했던가? 그 말을 처음 했던 사람은 클라우스를 모르는 사람임이 분명했다.
저 천사 같은 얼굴을 하고 맛이 갔을 거라 누가 감히 상상할 수 있겠어?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들어오는 클라우스의 뒤로, 새하얀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뒤따랐다.
드레스만큼이나 새하얀 백금발 덕분에 그녀에게선 신성한 느낌이 물씬 풍겨 왔다.
저 사람이 성녀, 아르티아 세비온이구나…….
너무도 눈에 띄는 외모에 누군지 고민할 필요도 없이 그녀가 성녀라는 걸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허리를 곧추세우고, 턱을 살짝 들며 걷는 성녀의 모습은 당당하기 그지없었다. 진부한 표현이었지만, 그녀는 정말로 한 마리의 우아한 백조 같았다.
다만, 나라를 잃은 사람의 모습이라기엔, 너무도 태연하고 고고했다.
성녀가 원래 이런 느낌으로 등장했던가? 어쩐지 좀 더 우울했던 것 같은데……. 가물가물한 기억을 들춰보았지만, 읽은 지 두 달도 넘은 이야기의 사소한 장면들이 기억날 리 없었다.
그저 천사가 현신했다 해도 믿을 정도로 아름다운 장면에 잠시 넋을 잃고 바라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