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너, 잠깐 이리 와 봐. 등 뒤에 지퍼 달렸지? 그렇지? 지퍼 내리면 그 안에 어른 들어 있는 거 맞지?
아니지, 참자. 그래 어른인 내가 참아야지.
난 울컥하고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누르며 앨리스에게 물었다.
“네 정략결혼 상대는 어떤 사람이야?”
말할까 말까 고민을 하던 앨리스는 날 보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뭐, 아줌마를 또 볼 일은 없을 것 같으니까 말해 줄게요.”
말하는 것 좀 봐. 혹시 너도 빙의자니? 아님 회귀했어? 이번이 몇 회차야?
“길리온 가문의 3남, 멍청이 매튜에요.”
“멍청이?”
“아줌마도 걔랑 얘기하면 1분 만에 걔가 얼마나 멍청한지 알게 될 거예요. 제가 본 남자애 중에 제일 멍청해요.”
매튜를 생각하던 앨리스는 말을 하다가 감정이 북받치는 모양인지, 얼굴이 발개져 열을 냈다.
“제가 나중에 자기 부인이 될 거니 앞으로 자기 말을 들어야 한다며 으스대질 않나, 제국 초대 황제의 이름도 모르면서 자기는 커서 황성에서 일할 거라는 허무맹랑한 소리를 해 대죠. 그런 멍청이랑 결혼해야 한다니! 차라리 걔보다 더 똑똑한 우리 집 강아지랑 결혼하고 말지.”
쌓인 게 많은 모양인지,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말에 주춤하며 물었다.
“왜 그런 애랑 정략결혼을 하게 됐는데?”
“어쩔 수 없어요. 우리 아빠는 갈리온가에 빚이 있으니까요. 정략결혼이 아니라면 누가 그 멍청이랑 결혼하겠어요?”
한참 열을 내던 앨리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럼 네가 좋아하는 사람은 누군데?”
내 질문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던 앨리스는 곧바로 고개를 휙 돌리며 퉁명스레 대꾸했다.
“……그런 거 없어요.”
“혹시 평민이야?”
“윽……. 아줌마는 대체 그걸 어떻게 아는 거예요?”
“독심술을 조금 하거든.”
“거짓말. 그랬으면 아까 말 시켰을 때 내가 누군지 알았어야죠.”
아, 정말 귀엽지 않다니까.
“그래, 그래. 나이를 먹어서 삶의 지혜가 늘었다고 해 둘게. 그래서, 정말 평민이야?”
역시나 남의 연애 이야기만큼 재밌는 이야기는 없는 모양이다.
난 조급함을 숨기지 않으며 앨리스를 재촉했다.
앨리스는 잠시 고민을 하더니 마지못해 얘기를 꺼냈다.
“……안톤이라고, 우리 집에서 일하는 하녀의 아들이에요.”
“어떤 애인데?”
“똑똑해요. 매튜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리고 숲에서 길을 잃은 절 구하러 와 줄 만큼 용감하고, 다정해요.”
“걔는 널 어떻게 생각하는데?”
“그야 뭐, 일하는 집 주인의 딸 정도로 생각하겠죠. 애초에 제가 좋아한다고 해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말한 아이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책 귀퉁이를 만지작거렸다. 10살의 연애 고민이란 참으로 심오하구나.
과연 로맨스 소설이 바보 같아 보일 만도 했다. 자신의 정략결혼 상대는 바보인 것도 모자라 자길 업신여기고 있었고, 좋아하는 사람은 제게 관심도 없는 데다 평민이라 이어질 가능성도 없었으니까.
“이제 아줌마 차례에요.”
“응?”
“제 이야기를 들었으니, 아줌마 이야기를 해 줘야죠. 설마 제 이야기만 들을 셈이었어요?”
정말 똑 부러지는 꼬맹이네.
“그, 그래. 뭐가 궁금한데?”
“뭐, 별로 궁금하지는 않지만, 저도 말했으니 아줌마의 약혼 상대에 관해 얘기해 주세요.”
궁금하지 않으면 안 들어도 되잖아.
약혼 상대라……. 앨리스에게 어디까지 말을 해 줘야 하나 고민하다, 조금만 털어놓기로 했다.
“뭐, 내 약혼 상대도 바보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책장 너머로 책이 와르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나, 괜찮으세요? 손님?”
조금 소란스러운 옆쪽 대화에 말을 끊고 귀를 기울이자, 앨리스가 한마디 덧붙였다.
“미셸이에요. 들어온 지 얼마 안 됐는데 또 실수한 모양이에요. 그보다 얘기나 계속 들려줘요.”
어머, 너 궁금하지 않다면서?
그렇게 말했던 것 치고는 생각보다 집요하게 묻는 앨리스를 보며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음, 그 사람은 남의 눈치를 엄청나게 보는 사람인데, 그래서 나랑 결혼하기로 한 거야.”
“……왜요?”
앨리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너 그 불신의 눈초리는 뭐니?
“내가 어디가 어때서?”
“음, 여러모로? 자기 객관화가 부족한 점도 추가해서요.”
앨리스는 미안한 기색도 없이 내게 말했다. 얘랑 계속 대화하다간, 돌아갈 때쯤이면 살코기가 되어 있겠군.
“애초에 정략결혼을 하겠다는 건 내가 아니고 남자 쪽이었거든? 나랑 결혼하면 주변의 간섭으로부터 하나라도 자유로워질 수 있으니까.”
“그건 좀, 못됐네요.”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앨리스의 말에 동의하며 키득거렸다. 이런 말을 공감해 주는 상대가 10살짜리 어린애라니. 내 인생은 이대로 괜찮은 것인가?
“그런데 왜 바보예요? 매튜처럼 덧셈 뺄셈도 못해요?”
“아냐. 오히려 유능하지. 일을 엄청나게 잘하거든.”
“……그런데 왜 아줌마랑 결혼을?”
“너 자꾸 그럴래? 나 말 안 해 준다?”
“아, 알았어요. 더 이상 안 그럴게요. 그러니까 얘기 계속해 주세요.”
앨리스는 이제 몸을 완전히 내 쪽으로 기울이고서 내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걸 보면 또 영락없는 어린애 같단 말이지.
난 앨리스에게 기블린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얼마 전 란셀 후작 부인의 생일 연회에서 그가 일리온의 뒷담화를 했던 이야기를. 물론 이름이나 직책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부분은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뒷담화를 다 듣고도 아무 말도 안 하질 뭐야? 더 어이없는 건 얼마 전에 그 남자한테서 뻔뻔하게 사업을 같이하자는 편지가 왔거든? 그걸 보고 뭐라고 한 줄 아니?”
“뭐라고 그랬는데요?”
“계약하겠다고 했어. 이게 말이 돼?”
연회가 있고 며칠 후 기블린으로부터 사업 계획서가 도착했다. 아무리 봐도 뻔뻔한 놈이었다. 입에 담기도 힘든 욕을 해 놓고도 이제 와서 뭐 하나 얻어먹으려 얼쩡거리다니.
일리온의 일을 도와주며 서류를 검토하던 난 당연히 거절할 거라 생각하고 일리온에게 물었다.
그런 내게 일리온은 딱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손익을 따지는 데 개인적인 감정이 개입해선 안 된대.”
“아줌마보다 훨씬 어른스러운데요.”
“어른스러우면 뭐 해? 매일 남의 눈치나 보며 전전긍긍하고 있고. 평생 그러고 살라지, 뭐.”
내 말을 듣고 고민을 하던 앨리스가 한마디 거들었다.
“아줌마보다는 어른스럽지만, 왜 바보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아요.”
“그렇지?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그래서 그냥 두고 보기 힘들 때가 있다니까.”
“그래서요? 진짜 계약한 거예요?”
“아니! 실은 내가 실수인 척하고 그 계약서에 마시던 차를 부어 버렸어! 잉크가 번져서 글을 알아볼 수 있어야지!”
“하하하하!”
내 대답이 마음에 든 모양인지 앨리스는 큰 소리로 웃었다.
배를 잡고 웃음을 터트리던 아이는 간신히 웃음을 그치고 내게 물었다.
“혼나지 않았어요?”
“실수라는데 어쩌겠어?”
실제로 일리온은 난처한 표정을 짓긴 했지만, 크게 혼내지 않았다.
그리고 난 물에 젖은 편지를 불쏘시개로 집어넣으며 ‘이렇게 된 거 편지가 중간에 분실된 거로 해요.’라는 적절한 해결책을 제시해 줬고.
“그 약혼자라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에요?”
“음…… 그러네. 굳이 따지면 좋은 사람이야. 다정하고, 함부로 화를 내지도 않고, 내가 계속 조르면 마지못해 허락해 주고, 또 잘못한 건 바로 사과하거든.”
“매튜보다 훨씬 좋은 남편인 것 같은데요?”
“푸핫, 그럴지도 모르겠다.”
난 앨리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뭐, 매튜에 비해도 남편감으로는 영 아니지만 구태여 그 말을 해 줄 필요는 없었다.
“저기 앨리스, 매튜가 그렇게 싫다면 말이야, 파혼하는 건 어때?”
“할 수 있을 리 없잖아요. 전 이제 겨우 10살인걸요.”
“그렇지만, 애들 일에는 끼어들 수 있잖아? 여차하면 그 매튜라는 자식을 어디 먼 산에 버리고 와 버려. 아무도 못 찾게 말이야.”
“……풉, 매튜 그 바보라면 가능한 방법인데요?”
그렇게 말하며 앨리스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앞으로도 매튜 앞에서 잘난 척을 많이 하도록 해. 이왕이면 네가 먼저 황성에서 한자리 꿰차는 것도 좋겠다.”
“그건 왜요?”
“원래 그런 바보들이 꼴에 자존심은 있어서 여자가 자기보다 잘난 걸 못 참거든. 그래서 네가 충고하면 화를 내는 거고.”
앨리스는 내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네가 먼저 황성에서 일하면 그 바보는 네 밑에서 일하게 되잖아? 그럼 자신의 체면이 안 선다고 생각하면서 약혼하기 싫다고 하겠지.”
“정말 그럴까요?”
“그럴걸? 왜냐면 멍청하니까.”
내 말이 맘에 들었는지 앨리스는 또 한 번 까르르 웃었다.
역시 뚱한 얼굴로 어른스러운 척하는 것보다는 아이처럼 웃는 모습이 좀 더 어울렸다.
물론 알고는 있다. 내가 말한 건 직접적인 해결책이 아니라는 걸.
하지만 이제 겨우 10살인 어린아이가 벌써 어른들의 사정으로 고민하며, 우울해하는 건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러니 내가 해 준 대답은 아이가 웃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단순히 자기만족에 불과한 대답일 수 있지만, 그래도 웃는 걸 보니 마음이 조금 놓였다.
***
그렇게 말하긴 했어도 앨리스는 내게 자신이 재밌게 본 소설 몇 권을 추천해 주었다. 그녀의 안목을 믿어 보기로 하고, 추천 도서를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책은 다 골랐나?”
“네. 덕분에 당분간은 심심하지 않겠어요.”
책을 계산대에 내려놓으며,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일리온에게 대답했다.
날 따라오던 앨리스가 내 치맛자락을 잡으며 물었다.
“약혼자라는 게 이 오빠예요?”
“……오, 오빠?”
너 나한테는 아줌마라며. 근데 왜 얘는 오빠야? 얘가 나보다 더 나이 많거든?
“아줌마는 대체 왜 연애 소설을 읽는 거예요?”
“……뭐?”
그렇게 말하던 앨리스는 날 흘겨보며 작은 소리로 ‘기만자’라고 속삭이더니 휙 돌아서서 가 버렸다.
자, 잠깐만. 내가 뭘 잘못했는데? 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