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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35)화 (34/159)

35화

미친 게 확실하다. 그거 말곤 설명할 방법이 없어. 그래, 미쳤어.

일리온이 기어이 미치고 만 거야!

“맘에 드는 물건이 없나?”

열 손가락에 보석을 끼우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외친 적은 있지만, 결단코! 정말로! 그러길 바란 적은 없었다.

아니, 물론 그 정도로 많은 보석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조금, 그래 조금 많이 했지만 이건 아니잖아.

“아니면 전부 사 주면 되는 건가?”

소파에 기대어 차를 마시는 일리온은 마트에서 맥주를 산 김에 오징어도 같이 살까? 하는 뉘앙스로 내게 물었다.

그리고 열 손가락에 빠짐없이 반지를 끼고 있는 나는 소리를 지르고 싶은 걸 참으며 일리온을 바라보았다.

“말씀은 정말 기쁘지만, 보석은 왜 갑자기……?”

“약속하지 않았던가? 잃어버린 약혼반지 대신 새로 사 주기로. 아, 참. 도둑맞았다고 했지?”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만 같았다.

요 며칠 일리온의 행보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오늘만큼은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었다.

어째서? 대체 무슨 꿍꿍이지?

“이렇게 많은 보석은 필요가 없는데요.”

“그럴 리 있나.”

“네?”

“머지않아 공작 부인이 될 텐데.”

“……그, 그건 그렇죠. 하하하.”

어쩐지 공작 부인이라는 단어에 유독 힘이 들어갔다고 생각하면 착각일까?

“온 김에 약혼반지도 다시 맞추는 게 좋겠군.”

“설마 제게 청혼이라도 하시게요?”

당연히 아니라는 대답을 기대했지만, 일리온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대가 원한다면.”

내가 지금 뭘 잘 못 들은 것 같은데? 쟤가 지금 뭐라고 한 거지?

“처, 청혼이요?”

“그래. 그러고 보니 무릎을 꿇고 반지를 끼워 달라 했던가?”

“그, 그랬었죠.”

아침부터 뭘 잘못 먹어도 단단히 잘못 먹은 게 틀림없다. 그게 아니라면 저주 때문에 머리가 돌기라도 했던가!

이해할 수 없는 일리온의 행동에 양손에 걸린 액세서리가 족쇄라도 되는 듯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어머나, 공작님 정말 로맨틱하시네요.”

내 옆에서 반지를 고르는 걸 도와주던 보석상 주인이 볼을 붉히며 부러운 듯 말을 건넸다.

아니에요, 주인장. 이건 로맨틱한 게 아니라 무서운 거라고.

세상에 어떤 남자가 프러포즈 선언을 이런 고자세로 한답니까?

게다가 일리온의 경우는 좀 더 근본적인 게 문제였다. 프러포즈 ‘따위’를 절대로 하지 않을 남자가 프러포즈를 입에 담고 있었으니까.

방식이야 어찌 됐든, 그의 입에서 절대 나오지 않을 단어가 나온 게 문제라고!

“그럼 원하시는 디자인이 있으신가요? 만들 때 참고하도록 하겠습니다.”

보석상 주인은 생글거리며 내게 물었다.

내게 맘에 둔 디자인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었다. 약혼반지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이미 까마득한 옛날 일처럼 느껴지는데, 프러포즈라니!

그건가? 보석상이 얼마 이득 봤는지 하는 그런 문제야? 일단 눈앞의 보석상은 엄청나게 이득을 보고 있는 것 같긴 한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일리온의 의도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오늘따라 표정 관리에 어려움을 느끼며 일리온을 살폈다.

그의 표정은 아무리 봐도 평소와 다름없었다.

차라리 내뱉는 말과 표정이 같다면 얘가 어디서 약이라도 잘못 먹었나 하고 의심이나 해 볼 텐데…….

일리온은 잠시 고민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디자인이라……. 비용은 얼마든지 상관없네. 엄청나게 화려한 세공과 엄청나게 화려한 보석으로 부탁하지.”

“…….”

어쩐지 기시감이 드는 일리온의 말은 내가 드레스를 맞출 때 강조했던 단어였다. 그 말을 들었던 모양인지 빼다 박은 듯 읊어 대는 일리온을 보며, 나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얘가 미친 게 아니면, 내가 미쳤나?

그래 내가 미친 거구나.

“안 먹고 뭘 하나?”

보석은 그래, 백 보 양보해서 황실 연회를 위해 그럴 수 있다고 치자.

하지만 왜 카페에 데려온 거야? 그것도 디저트로 유명한 카페라니?

게다가 지금 뭐 하고 계세요, 공작님?

일리온은 손에 포크를 쥐고서 케이크를 찍어 내 입가에 가져다 대고 있었다. 마치, 먹여 주려는 듯이.

혹시 케이크에 독이라도 탔나?

“제가 직접 떠먹을 수 있는데…….”

“알고 있어. 하지만 내 호의를 거절하지는 않겠지.”

“…….”

호의라니. 부디 네가 생각하는 호의와 내가 생각하는 호의가 같길 바란다.

나는 마지못해 그가 내미는 케이크를 받아먹었다. 마치 모래를 씹는 것 같은 기분…이…….

“맛있다.”

뭐야 이거. 너무 맛있잖아!

입 안을 행복하게 해 주는 달콤한 케이크에 취해 난 초롱초롱한 눈으로 케이크를 바라보았다.

근 며칠간 집 밖에 나오질 못했기에, 오랜만의 당 충전이 이렇게나 반가울 수 없었다.

아,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었나?

역시 세계 평화를 위해서는, 탄수화물이 인간을 지배해야 한다.

“마음에 드나?”

“네!”

“더 먹을 건가?”

“네!”

“그럼 계약서를 준비하도록 하지.”

“네! ……네?”

아니, 아니, 잠깐만.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계약서라니, 뭘 사 주실 건데요?”

“여기.”

“여기라면, 이 카페요?”

“그래.”

그러니까, 그런 소리를 맥주에 오징어 같은 느낌으로 말하지 말라니까!

***

“아, 힘들어.”

일리온의 기행은 그날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계속됐다.

유명한 의류점에서 ‘여기서부터 여기까지.’라는 요즘 로맨스 소설에서도 안 나오는 대사를 치질 앓나, 어제는 진짜로 카페 인수 계약서를 내 앞에 들이밀기까지 했다.

그렇게 며칠 동안 사람 불안하게 계속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더니, 이번엔 사고 싶은 책은 없냐며 날 여기로 안내했다.

아니, 공작님. 바쁘신 거 아니세요? 일 없어?

“하아…….”

수도에서도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서점은 도서관을 방불케 했고, 난 그 서점의 한쪽 구석에서 책을 찾는다는 핑계로 일리온의 감시를 피해 쉬는 중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이곳의 책이 되어 영원히 책장 틈에 끼어 있고 싶다.

“땅 꺼지겠어요. 아줌마.”

“하아아…….”

“그렇게 한숨 쉬면 복 달아나요.”

“대체 왜 저럴까?”

“저도 아줌마가 왜 이러는지 궁금하네요.”

아 정말, 이 꼬맹이가!

“너, 자꾸! 나 아줌마 아니거든?”

아줌마라고 부르기에 꾸역꾸역 무시했건만, 끈질기게 말을 걸어오는 탓에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었다.

“아줌마 맞잖아요? 그리고 여긴 제 자리예요.”

“그런 게 어디 있어?”

내 질문에 꼬마는 옆에 놓인 푯말을 가리켰다.

[앨리스 전용 좌석]

“……그, 그런 게…… 있네?”

푯말 아래는 작은 글씨로 추가 설명이 더 적혀 있었다.

[책을 사랑하는 우리 귀엽고 깜찍한 딸 ‘앨리스’의 공간입니다. 손님 여러분의 너른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사장님 딸이었구나. 미안.”

나는 자리를 살짝 비켜 주며 사과를 건넸다.

“저기, 미안한데 나도 갈 데가 없어서 그런데, 여기에 조금만 있게 해 주면 안 될까?”

구석이라 일리온 눈 피하기도 좋고, 사람도 없어서 좋단 말이야.

한껏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부탁하자 앨리스가 새초롬하게 대답했다.

“좋아요. 아줌마를 가엽게 여겨 오늘은 제가 아량을 베풀도록 하죠.”

“…….”

아줌마 아니라니까.

앨리스의 손에는 두꺼운 서적이 들려 있었다. 제국의 역사와 관련된 책인 듯 보였다.

“책을 좋아하니?”

“네.”

“나도 책 좋아하는데.”

“무슨 책 사러 왔는데요?”

“로맨스 소설.”

당당하게 대답하니, 앨리스가 날 보며 비웃었다.

“로맨스 소설은 바보들이나 읽는 거예요.”

“……아, 아니거든! 너 읽어 보지도 않았잖아!”

“아뇨. 읽어 봐서 알아요.”

“하, 그건 네가 아직 어려서 사랑을 몰라서 그래.”

앨리스는 책을 탁 덮더니 날 바라보았다.

“평범한 주인공한테 모자랄 것 없는 귀족 남자들이 파리떼처럼 몰려들어 구애를 하는 말도 안 되는 소설들뿐인데요? 그럼 바보 같은 거 맞죠.”

내가 아이의 지뢰를 건드려 버리기라도 한 건지, 앨리스는 약간 화가 난 듯 보였다.

“그, 그래도 재밌…….”

“다 말도 안 되지만, 그중에 제일 비현실적인 건 정략결혼일 거예요. 대체 그 귀족 남자가 왜 정략결혼 같은 걸, 그것도 본인의 가문보다 한참 떨어지는 집안의 영애와 하죠? 어딘가 하자가 있지 않고서야…….”

“그건 그렇지…….”

어쩐지 애와 어른의 대사가 한참 바뀐 듯한 기분이 드는 건 내 착각이 아닌 듯했다. 형편없는 내 언어 수준에 비해, 앨리스의 말은 막힘이 없었다.

딱히 반박할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일리온을 떠올려 보니, 구구절절 맞는 말인지라 오히려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일리온을 변호할 생각이 없는 것과 내 취향을 부정당하는 건 다른 문제였다.

“그렇지만, 어차피 소설이고, 좋아서 읽는다는데 그렇게까지 말할 건 없잖아.”

내가 간신히 대꾸하자, 앨리스는 날 보며 여전히 한심하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알았어요. 취향이 그러시다니 더 이상 말하지 않을게요. 다만 제가 어리다고 무시하지는 말아 주세요. 전, 이 서점에 있는 소설책 대부분을 읽어 봤으니까요.”

네가 먼저 나 무시했잖아.

“그래…… 미안.”

그러나, 그녀의 박력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혼자서 눈치만 살살 보며 책장을 뒤지던 나는 문득 호기심이 생겨 아이에게 물었다.

“뭐야, 로맨스 소설은 바보들이나 읽는다더니 결국 너도 읽은 거잖아?”

내 물음에 앨리스가 움찔하더니 새초롬하게 대꾸했다.

“거기에 책이 있으니까 읽은 것뿐이에요.”

그럴듯한 말로 포장하긴 했지만, 결국은 너도 읽었다는 거잖아. 그것도 꽤 많이.

어쩐지 로맨스 소설에 대해 잘 알고 있다 했더니.

삐져나오는 웃음을 숨기며 앨리스에게 물었다.

“저기, 너 말이야, 혹시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있어?”

“제가 아줌마한테 왜 그런 걸 말해요.”

“나 아줌마 아니거든. 올해 22살이라구. 그러니까 최소한 언니라고…….”

“……아줌마의 양심은 닳아 없어진 모양이군요. 전 올해 10살이에요.”

왜 10살짜리 애한테 양심에 대해 지적을 당하고 있어야 할까?

물론 나도 요즘 양심이 조금 둔해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긴 했어.

하지만, 맞으면 아프단 말이야! 그만 때려!

“그러는 아줌마는 왜 여기서 한숨을 푹푹 쉬고 있던 거예요?”

“…….”

그래, 아줌마라고 부르렴.

호칭을 정정하길 포기하고 난 10살짜리 아이에게 푸념을 늘어놓았다.

“약혼한 남자가 갑자기 이상해져서. 나도 정략결혼 하게 됐거든. 너처럼.”

“그거 안 됐네요. ……어떻게 제가 정략결혼 할 거라는 걸 아는 거예요?”

날 바라보며 안쓰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꼬마가 화들짝 놀라 되물었다.

정략결혼에 대해 나와 너무도 같은 의견이라 설마 했는데 들어맞은 모양이었다.

얻어걸린 거긴 했지만 난 대수롭지 않은 척 아이에게 설명했다.

“그런 게 있어. 왜, 동지끼리는 서로 알아본다고 하잖아?”

“……전 아줌마랑 동지가 되고 싶은 생각 없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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