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가만히 집무실에 앉아 서류 더미를 들여다보기엔 너무나 좋은 날씨였다.
약혼녀인 라벤느는 날씨를 들먹이며 정원 한쪽에 티테이블을 차려 놓았다.
제게서 빠져나갈 이유를 만들기 위해서라면 날이 좋든, 흐리든 상관없었을 테였다.
정원에서 차를 마시는 라벤느는 집무실에 갇혀 있을 때와는 다르게 생기가 넘쳐 보였다.
“아니에요! 미움받고 있는 게 틀림없다니까! 말해 봐요, 단장님. 공작님한테 뭐 책잡힌 거 있죠?”
“그, 그럴 리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창공 기사단이 공작님 휘하의 5개 기사단 중 제일 약하다는 소문이 들리던데…….”
“뭐라고요? 대체 누가 그런 헛소문을 퍼트리고 다닌답니까? 창공 기사단이야말로, 셀레스타인가에서 둘도 없을 가장 용맹하고 충성스러운 기사단입니다!”
루카스가 정색하고 대답하자 라벤느가 히죽거리며 되물었다.
“그럼 그 유능하신 기사단 단장님께서 어째서 제 호위나 하는 건데요?”
“그건 아가씨께서 그만큼 중요하신 분이기 때문에…….”
“온종일 저택에 갇혀 있는데요? 호위하는 의미가 있나? 제 뒤만 따라다니다 근 손실 날 것 같지 않으세요? 제 호위하다가 근육이 몽땅 빠져 버리면 어떡해요?”
다다다 쏟아 내는 라벤느의 말은, 사교 기술이 부족한 루카스의 혼을 쏙 빼놓기 충분했다.
그 증거로 방금까지만 해도 호기롭게 라벤느의 말을 받아치던 루카스의 기가 잔뜩 죽어 있었다.
“매, 매일같이 혹독한 훈련을 받았습니다. 근육이 쉽게 빠질 리 없어요…….”
“원래 나이가 많을수록 근육이 더 쉽게 빠진다니까요. 어디서 들었는데, 하루에 5시간 이상 운동을 안 하면 근육이 빠진대요.”
“……저, 정말입니까?”
“지금 제 말을 의심하시는 거예요? 전 루카스 경이 걱정돼서 드리는 말씀인데요?”
“그, 그렇지만……. 근육이 빠지면…….”
“역시, 루카스 경도 걱정되죠?”
“루시가 싫어할 겁니다.”
역시나, 라벤느의 말에 홀라당 넘어간 루카스는 울상을 짓기 시작했다.
“……네? 루시가 누군데요?”
“제 아내입니다. 루시는 제가 근육질이어서 좋다고 했으니까요. 그런데 근육이 빠져 버리면 전 분명 이혼당하고 말…….”
“푸흡……!”
예상 밖의 이유에 라벤느는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내려치며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하, 아내가 근육질이어서 좋다고 했단 말이에요?”
“네……. 오직 제 몸매 하나만 보고 교제해 주는 거라고 했는데…….”
“그럼 좀 심각한 일이죠. 아니, 웃어서 죄송해요. 근데… 푸흡……, 아 미안, 미안해요. 장난 좀 친 거예요. 루카스 경이 걱정하는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활짝 웃고 있는 라벤느의 표정은 일리온이 알고 있는 그녀와는 많이 달랐다.
자신에게 보여 주는 미소는 언제나 잘 다듬어진 미소였다. 이렇게 정제되지 않은, 느끼는 감정을 그대로 터트리는 듯한 웃음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똑똑.
“들어와.”
일리온은 시선을 창가에 고정한 채로 세바스찬을 맞았다.
서류 꾸러미를 들고 온 세바스찬은 책상 위에 놓인 책을 바라보았다. 그의 책장에서는 보기 힘든 책이었기에 세바스찬이 관심을 가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백작 영애와 기사님의 50가지 비밀]
[각하, 제게 사랑을 고백하세요.]
[매일 밤 온실 정원에서 만나요.]
“라벤느 아가씨의 책인가요?”
“아, 잠깐…….”
중간에 잠시 멈칫하며 말을 삼키더니, 대충 끝을 얼버무렸다. 그리고는 황급히 책을 덮고 책상에서 치워 버렸다. 일리온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빌리신 건가요?”
“…….”
대답을 회피하는 것으로 보아 어쩐지 듣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은 상황에 세바스찬은 빙긋 웃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겠으니, 그냥 조용히 해 주게. 나도 좋아서 읽는 건 아니니까.”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만?”
“궁금하다고 이미 얼굴에 쓰여 있질 않은가.”
일리온은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렇게 대놓고 난처한 표정을 지으면 궁금하지 않아도 이유가 알고 싶기 마련이다. 물론 세바스찬은 일리온의 반응과는 전혀 상관없이 궁금했다.
빙글빙글 웃으며 나갈 생각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자 마지못해 먼저 손을 든 건 자신의 주인이었다.
“탐색 중이야.”
“예?”
“도저히 고민해 봐도 답이 안 나오니까, 지켜보는 중이네.”
“무엇을 말씀입니까?”
“그야 그녀의 생각이지.”
얼마 전 사람을 시켜 라벤느에 대한 조사를 다시 시작했다.
리슈펠트 백작가와 결혼을 결정하기 전에 이미 한 번 조사를 끝냈기에, 보고서는 그때와 별반 다를 바 없었다.
그야말로 깨끗했다.
애초에 몰락한 귀족과 손을 잡을 귀족이 있을 리 없었고, 그가 라벤느와 결혼하기 위해 백작에게 연락한 것도 매우 비밀스럽게 이루어져 세상에 공개되기 전까지는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발표 이후로도 사람을 붙여 혹여 백작이 허튼짓은 안 하는지 감시까지 하고 있었으니, 보고서가 깨끗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덕분에 일리온은 미궁에 빠진 기분이었다.
혹시 몰라 그녀가 읽었던 책과 신문까지 모아다 관찰하고 있지만, 별다른 단서조차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스토커가 된 것 같은 기분만 맛보고 있을 뿐이었다.
종종 어째서 제가 이러고 있나 하는 고찰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만큼.
“주인님께서 여자의 마음을 고민하시는 날도 다 있으시고,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이네요.”
일리온의 대답에 세바스찬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게 평소에 잘해 주시지 그러셨어요?”
“그게 내 탓이라는 건가?”
생각지도 못한 세바스찬의 말에 일리온이 어리둥절하게 물었다.
“그럼 아가씨께서 그런 행동을 할 이유가 달리 어디 있습니까?”
물론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지만…….
아니 오히려 이렇게까지 증거가 안 나오는 상황에서는 그것보다 더 타당한 이유도 없는 것 같지만…….
그래도!
“자네 지금 리슈펠트의 편을 드는 건가?”
“전 늘 주인님의 편입니다.”
일말의 고민도 없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대답에, 일리온은 어이가 없어 세바스찬을 바라보았다.
‘나 참, 완전히 구워삶았군.’
이쯤 되면 라벤느가 대단할 정도였다. 대체 어떻게 세바스찬을 구워삶은 건지 알고 싶을 정도로.
일리온은 차라리 대화 주제를 바꾸기로 하고 그가 가져온 서류에 관해 물었다.
“이번 달 시종들의 월급과 관련된 결재 서류입니다.”
세바스찬이 내민 서류를 보며 일리온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보너스는 왜 적혀 있는 거지?”
“라벤느 아가씨께서 보너스를 주는 게 어떻겠냐 하셨습니다.”
‘대체 왜?’
최근에 라벤느를 관찰하며 한 가지 깨달은 건, 라벤느를 대하는 시종들의 태도가 그리 좋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보너스를 주겠다는 라벤느의 생각에 대해서는 쉽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설마하니, 시종들의 태도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나?
“태도가 불손한 이들도 있는 거로 아는데. 보너스를 줄 게 아니라, 교육을 다시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일리온의 질문에 세바스찬이 곤란한 듯 웃었다.
“그게……. 아가씨께서 그냥 놔두라 하셨습니다.”
“태도가 안 좋은 걸 알고 있다고?”
“네, 그들을 자르면 본인의 평판만 더 나빠질 거라 하시더군요.”
의외의 대답이 세바스찬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눈치가 없지는 않은 모양이군.’
하지만, 그걸 알고 있으면서 왜 보너스를 주려 하는지는 여전히 의문이었다. 일리온의 의문이 해결되지 않은 걸 눈치챈 세바스찬이 설명을 덧붙였다.
“그들의 태도가 정 문제가 된다면, 본인의 용돈을 줄이고 시종들에게 보너스를 좀 나눠 주라 하셨습니다. 아가씨의 이름으로요.”
“그런 말을 했다고?”
“네. 충성은 돈으로 사는 거라 하시더군요.”
“하…….”
어처구니없는 대답에 일리온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꼭 틀린 말도 아니었다.
아랫사람을 자르고 그 자리를 새로운 사람으로 대체하는 거야 쉬운 일이지만, 그렇게 되면 잡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반발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만둔다는 사람도 생길 것이다.
새로운 사람을 교육하는 데도 시간이 걸릴 것이고.
그러나 그녀의 이름으로 하녀들에게 보너스가 지급된다면, 하녀들은 자신들의 월급에 라벤느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걸 깨달을 것이고, 그것은 곧 그녀를 대하는 태도로 나타날 것이다.
그냥 봐서는 할 일 없이 차나 마시는 영애 같긴 한데……. 일리온은 잠시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 잠깐 사이에 대화가 꽤 흘러간 모양인지, 늘 어디로 튈지 모르는 제 약혼녀는 이젠 검을 들고 붕붕 흔들고 있었다.
“야구라고 알아요?”
루카스가 쩔쩔매며 그런 라벤느를 걱정스레 바라봤다.
“검을 잡으니까 옛날에 어린이 야구단 하던, 아, 아니, 동네에서 놀던 생각이 나서요. 딱 이 정도 크기의 막대를 휘둘러서 공을 치는 건데, 나중에 하는 법 가르쳐 줄게요. 기사단이면 사람도 많겠네! 야구 하기 딱이다!”
그렇게 말하며 라벤느는 검을 휘두른다고 보기엔 어려운 동작으로 힘을 주며 스윙을 했다.
루카스를 상대로 깔깔거리며 검을 막대기처럼 휘두르는 모습은 예절 교육을 잘 받은 영애와는 거리가 멀었다.
여전히 철없고, 걱정 없고, 사는 게 즐거운, 머릿속이 꽃밭 그 자체인 영애였다.
한동안 신나게 흔들던 검이 라벤느의 손에서 미끄러졌다. 그리고 그대로 일리온을 향해 날아왔다.
고개를 살짝 틀어 피한 일리온은 창밖에서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표정을 하는 라벤느를 바라보았다.
“저, 저기, 공작님 괜찮으세요?”
그는 말없이 손가락을 까딱했다.
티타임은 끝났으니 돌아오란 뜻이었다.
제 의도를 찰떡같이 알아들은 라벤느는 잔뜩 풀이 죽은 채로 터덜거리며 저택 안으로 들어왔다.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군.’
일리온은 집무실 바닥에 꽂힌 검을 뽑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늘 그래왔듯이, 이번에도 일리온은 라벤느의 의도를 알아챌 수 없을 것이다.
그녀가 이곳에 오래 머무를 생각이 없기에, 시종을 잘라 봐야 꿈자리만 나쁠 뿐이라는 이유로 그들을 자르는 것에 반대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