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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33)화 (32/159)

33화

일리온은 감정을 죽이는 것에 능숙한 만큼 감정을 속이는 것도 능숙했다.

사사로운 감정을 지워 버린다는 점에는 두 가지 모두 꽤 유용한 방법이었으니 굳이 구분할 필요가 없었다.

그건 라벤느가 일리온을 속이고 세르지오와 손잡은 사실을 알아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순간 끓어오르는 분노 사이로 분명 결이 다른 감정이 존재했지만, 일리온은 그 모든 것을 분노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포장했다.

일리온은 무의식적으로 그 외의 감정을 모두 무시했다.

행동이 생각보다 먼저 나간 적은 그리 많지 않았다. 까마득한 어린 시절 이후로 처음일 것이다.

사고가 행동을 따라온 순간 이미 고문에 가까운 폭행을 하고 있었지만, 깨달았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저 방식이 조금 더 교묘해질 뿐.

일리온은 늘 감정이 이성을 삼키는 걸 경계해 왔다. 그러나 지난번에 카지노 때도 그렇고, 이번 납치사건 때도 그렇고 생각과 행동이 따로 놀고 있었다.

분명 텔레포트를 하기 전만 해도 일리온은 라벤느에게 그녀의 죄를 물을 생각이었다. 무릎을 꿇리고 그녀가 농락하려 했던 상대가 누군지 깨닫게 해 줄 셈이었다.

그러나 바닥에 쓰러져 눈물을 흘리는 라벤느를 발견하자, 제 계획을 비웃기라도 하듯 몸이 먼저 움직였다.

마침내 라벤느가 무사한 걸 확인한 순간 일리온은 어렴풋이 깨달았다.

그가 지금껏 무시했던 사사로운 감정들이 이성을 집어삼키고 말았다는 걸.

그 뒤로도 한동안 라벤느의 처우를 고민했지만, 길어질 일이 아니었음에도 쉽게 결정하지 못했다.

그리고 어느새 자신은 거기에 대한 이유를 가져다 붙이고 있었다. 대체로 설득력 없는 이유였고,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이었다.

어젯밤도 마찬가지였다. 복잡한 머리를 식히려 산책을 나온다니, 평소에 그라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이었다.

그리고 때마침, 침대에 얌전히 누워 있어야 할 사람이 창문을 넘는 기행을 보여 주고 있었다.

어쩌면 이렇게 행동 하나하나가 제 예상을 뛰어넘는지…….

핑계 또한 가히 걸작이었다.

‘공작님은 제가 뭘 해도 무관심하시니, 관심을 받고 싶었다고요. 제가 사라지면…… 걱정해 주시지 않을까 해서…….’

하는 말을 들어 보면 마냥 철없는 영애 그 자체였지만 이젠 일리온도 라벤느의 거짓말이 보였다.

거짓으로 죽음을 꾸며서까지 제국을 벗어나려 계획을 세웠으면서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하다니.

그러나 그걸 깨달았다고 해서 라벤느를 모욕죄로 가둘 것인가? 그게 아니면 그녀가 원하는 대로 놔줄 것인가?

일리온은 그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했다.

돈과 명예를 포기하고 도망치고자 한다면 그만한 동기가 필요한데 그녀에게서는 어떠한 동기도 찾을 수 없었다.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고 여겼던 세르지오마저도 아니라면 대체 왜 이렇게까지 무모한 짓을 하는 걸까?

라벤느가 감추고 있는 비밀이 뭔지 캐내고자 한다면 못 할 건 없었다. 약간의 물리적인 힘과 마법을 동원한다면 10분도 안 돼서 사실을 실토하도록 만들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높은 확률로…….

‘망가지겠지.’

가녀린 몸은 고문을 버틸 재간도, 마법에 대한 내성도 없을 테였다. 분명 정신이 망가져서 다시는 평소처럼 말할 수도, 웃을 수도 없을 것이다.

그가 결정을 망설이는 가장 큰 이유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냥 놓아주기엔…….’

일리온은 거기서 생각이 턱 막혔다.

바라는 대로 사고사로 꾸며서 아무도 모르게 해외로 도망칠 수 있게 해 주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딱히 공작가의 명예가 실추되는 것도 아니었고, 금전적인 손실도 없었다.

그러니까 일리온은 잃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라벤느를 제외하고는.

그리고 그 사실은 자신을 몹시 불쾌하게 만들었다.

‘……알겠다.’

일리온은 제게 안겨 깜찍한 변명을 내뱉는 약혼녀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결국 답이 보이지 않는 복잡한 생각은 치워 버리기로 했다.

지금은 라벤느가 자신에게 감추고 있는 비밀을 알아내는 게 우선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잠시 이 바보 같은 연기에 장단을 맞춰 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숨기는 게 뭔지 모르지만, 공작가의 정보력을 얕보고 있는 거라면 보여 주면 될 일이었다.

그러다 보면 이 알 수 없는 감정에 대해서도 답이 나오겠지.

처분은 그 이후에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

“공작님.”

“왜?”

“시간은 금과 같다고 생각지 않으신가요? 세상엔 시간만큼 소중한 것도 없는 것 같아요.”

“그대가 웬일로 옳은 얘기를 하는군.”

역시나 오늘도 그냥 대꾸하는 법이 없다.

참자.

그래, 살인 한 번이면 참을 인 셋을 면한다는 옛말…… 아, 아니, 이게 아니라.

울컥하고 고개를 내밀던 잡다한 상념을 치우며 말을 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기사단장님의 시간은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녔다고 생각합니다. 기사단을 돌보고, 가꾸어 나갈 시간에 할 일 없이 차나 마시는 제 뒤를 졸졸 쫓아다니는 건 그 귀한 시간을 낭비하는 게 아닐까요?”

“루카스, 그대도 낭비라고 생각하나?”

일리온은 내 뒤에서 병풍처럼 서 있는 루카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루카스는 군기가 바짝 잡혀 일리온의 말에 대답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시간 낭비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리슈펠트 아가씨를 보필할 수 있다니 대대손손 자랑할 영광입니다!”

“그렇다고 하는군.”

“…….”

동경하는 공작님이 제게 질문을 던진 것만으로도 행복한지, 루카스의 광대가 씰룩거렸다.

아니, 단장님. 대대손손 자랑할 거리가 그렇게도 없어요?

셀레스타인 기사단 중 제일 잘난 기사단이시라면서요. 국경 수비를 하시든, 몬스터를 퇴치하시든 하셔야죠!

당장에라도 핀잔을 던지고 싶었지만, 성공한 덕후처럼 감격스러워하는 루카스에게는 어떤 말도 통하지 않을 듯 보였다.

루카스를 떼어 내기 위해 일리온과 협상을 하려 했으나, 오히려 최종 보스가 루카스였다니……! 저걸 무슨 수로 떼어 내냐고.

혼자 감격해서 눈물까지 글썽거리는 애를…….

협상 테이블에 앉지도 못하고 입구에서 잘려 버린 난 더욱 할 말이 없어져 말없이 서류 더미만 노려보았다.

그렇게 여길 탈출하고 싶은 사람과 그 사람을 억지로 붙잡아 놓은 사람, 원한다면 평생 이러고 싶은 사람 셋이서 정적에 휩싸여 한동안 시간을 보내고 있을 무렵 세바스찬이 찾아왔다.

“황실에서 초대장이 왔습니다.”

세바스찬은 초대장을 일리온에게 건넸다. 이 시기에 황실에서 초대장이 온다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원작 진입 이벤트인 승전 기념 연회.

새삼 시간 참 빠르다는 걸 느끼며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공작가에서 쫓겨나 보겠다는 야심 찬 포부로 2개월가량 열심히 일했는데, 정작 성과로 이어지지 않으니 답답할 따름이었다.

야근 돌려 가며 몸을 갈아 넣어 일했는데도 불구하고 실적이 저조해 아무도 내 고생을 몰라주는 그런 영업 사원의 고충을 왜 내가 느껴야만 하는가…….

아, 퇴사하고 싶다.

그래도 실업 수당은 받고 싶으니까 잘라 주세요, 제발.

“폐하께서 친히 그대도 데려오라는군.”

“네?”

소파에 턱을 괴고 악덕 고용주를 바라보며 속으로 해고해 달라 염불을 외는데, 일리온이 그런 날 보며 말했다.

“거기에 그런 말이 적혀 있다고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일리온을 바라보자, 그가 초대장을 보여 줬다.

“에이, 폐하께서 절 언제 보셨다고…….”

라고 생각했으나 정말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앞으로 보아도, 옆으로 보아도, 뒤집어 보아도 내 이름이었다.

그래, 요즘 기사에서 매일 내 얘기를 쏟아 낼 만큼 유명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장미정원 그림까지 갖고 있으니 그럴 수 있어. 그럼, 그럼.

저 멀리서 저승사자가 손을 흔드는 듯한 서늘한 감각을 애써 무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안 갈 건데 벌써 걱정할 필요는 없지. 세상에 죽기 전에 염라대왕 얼굴부터 보고 죽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절대 안 가!

“아, 그러고 보니 마침 아가씨께서 저번에 맞추신 드레스가 도착했습니다.”

말없이 웃으며, 꾀병을 부릴 생각만 하고 있는데 세바스찬이 한마디 거들었다.

“제가요?”

“지난번에 재단사가 왔을 때 보셨던 분홍색 드레스요. 이번 연회에 입고 가시면 되겠네요.”

“네?”

잊혀진 기억들 사이로 선명한 핑크색 드레스가 훅 치고 나왔다.

그래, 생각해 보니 그런 드레스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한데…….

그게 왜 지금 나오는데?

“아가씨께서 원하신 대로 금사와 루비로 수놓았답니다. 아마 잘 어울리실 거예요.”

“그걸…….”

진짜로 맞췄다는 말이야?

“왜요? 그때 분명 안 된다고 하셨잖아요?”

난 일리온을 보며 다급하게 물었다.

“그대가 원하는 것 같아 그것도 사라고 했네.”

서프라이즈이긴 한데 전혀 안 고맙거든?

완성된 드레스를 보지 않았음에도 대충 상상이 가는 내 모습을 그려 보았다. 다른 의미로 누구보다도 돋보일 내 모습을.

“그 드레스를 입으면 눈에 너무 띄지 않을까요? 공작님?”

그래, 일리온. 넌 사람들 눈에 띄는 거 싫어하잖아. 뭐라고 말 좀 해 봐?

도움을 요청하는 간절한 표정으로 일리온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답했다.

“괜찮아. 입도록 해. 말하지 않았나? 앞으로는 그대가 원하는 대로 해 주겠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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