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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32)화 (31/159)

32화

일리온의 입에선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얘기가 튀어나왔다.

내가? 세르지오랑? 야, 너 말이 좀 심한 거 아니냐?

기가 막혀 대답도 못 하고 일리온을 바라만 보자, 그걸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였는지, 날 안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릴! 제가요? 세르지오랑? 사랑의 도피라니?”

열이 받은 난 일리온 귀 바로 옆에서 소리쳤고, 일리온은 그런 날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늘이 두 쪽 나도 그딴 놈이랑 사랑의 도피 같은 거 할 일 없거든요? 저는 잘생기고 몸 좋은 남자가 취향이라고요! 걔는…….”

열변을 토하던 나는 순간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미소로 상황을 얼버무리며 말을 이었다.

“……그, 그분과는 절대 그런 사이가 아니니 오해하지 말아 주세요.”

“그럼 왜 그런 일을 꾸민 거지?”

그래. 우리 아직 이 얘기 안 끝났었지. 차라리 그냥 사랑의 도피라고 할 걸 그랬어.

적당한 핑계가 떠오르지 않아 속으로 눈물을 삼키며 중얼거렸다.

“……과, 관심받고 싶어서요.”

“뭐?”

“고, 공작님은 제가 뭘 해도 무관심하시니, 과, 관심을 받고 싶었다고요. 제가 사라지면…… 걱정해 주시지 않을까…… 해…서…….”

라벤느 미안해. 널 관심 종자로 만들어서. 하지만 생각나는 이유가 이것밖에 없는걸!

눈동자를 살짝 들어 일리온의 표정을 살피니 미간이 구겨져 있다.

그래, 차라리 관종이 되자. 죽는 것보다 낫잖아. 겸사겸사 일리온이 날 끔찍하게 싫어해 주면 더 좋고!

“그대가 얼마나 위험했는지는 알고 있나?”

다시금 날 안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표정을 보아하니, 화가 난 게 분명했다.

말은 바로 하랬다고, 날 납치한 건 율리아였으니 엄밀히 따지자면 내가 위험에 처했던 건 내 잘못이 아니었다.

그러나 내가 한 짓이 있기에, 반성하는 척하며 눈치를 살폈다.

“고작 내 관심을 끌겠다고…….”

“저한테는 중요한 일이에요.”

“나한테 관심을 받는 게?”

아니, 그거 말고 이 저택에서 도망치는 일이.

내가 한동안 대꾸를 안 하자 일리온은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다.”

“네?”

뭘 알겠다는 거야?

잔뜩 호통을 치든지 열 받아 날 내동댕이치든지 할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과는 다른 담백한 반응이 오히려 더 무서웠다.

그러나 그 말을 끝으로 일리온은 입을 다물었고 더는 추궁하지 않았다.

설마 믿어 주는 건가? 그런데 왜 이렇게 미적지근한 반응이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일리온 눈치만 살피는데 한참을 말없이 걷던 일리온이 경비병을 보고 붙잡았다.

“주변의 경비를 강화해 주게.”

“수상한 자가 있었습니까?”

때아닌 일리온의 등장에, 경비병이 바짝 긴장하며 물었다.

“기껏 잡은 토끼가 담장을 넘어 버리면 곤란하니 말이네.”

“……네?”

경비병은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일리온을 바라보다, 알겠다며 고개를 숙이고 돌아갔다.

“토끼를 키우시나 보네요. 하하, 몰랐는데.”

“그래. 한 마리 키우고 있지.”

내 질문에 일리온은 무심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하하, 그렇구나. 우리 일리온이 토끼를 키웠구나…….

하하, 역시 내 말 안 믿는 거 맞지?

***

날 방에 데려다주며 일리온은 다음 날부터 평소처럼 아침을 먹고 서재로 오라 했다.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했다.

개 중에서도 위협적으로 짖는 소형견보다, 가만히 있다가 목을 물어 버리는 대형견이 더 무서운 것처럼, 지금 일리온이 딱 그런 모습이었다.

긴장한 채로 일리온의 행동을 주시했지만, 다행히 걱정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내가 기껏 만든 밧줄을 회수하고, 창문을 꼼꼼히 닫아 줄 뿐이었다. 정말 친절하게도.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일리온의 의도는 분명했다. 다시는 도망칠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

어쩐지 목 언저리가 차가운 기분이었다.

이렇게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넘어가도 되는 일일까?

아니면 내 처분에 대해 아직 고민하는 중일까?

일리온이 결정을 질질 끄는 성격은 아니었기에 그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그냥 이대로 넘어가기로 했다는 건데, 왜?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리온의 태도에 난 그날 밤도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말았다.

다음 날 아침은 기대했던 대로 릴리의 잔소리로 시작했다.

하도 많은 일이 있어서인지 평소와 다름없는 릴리의 잔소리는 오히려 반갑기까지 했다.

“대체 어쩌자고 그런 짓을 벌이신 거예요? 공작님께서 얼마나 화가 나셨는지 아세요? 세르지오랑 손을 잡으시다니요! 제가 아가씨 모시면서 심장이 남아나질 않겠어요. 목이라도 떨어지는 건 아닌지 얼마나 걱정을…….”

역시 릴리는 속마음을 그대로 말해 줘서 좋다니까. 누구랑은 다르게 고민할 필요가 없잖아. 일리온이 릴리의 반만 닮았어도 진작에 여길 탈출했을 텐데.

밤새 일리온 생각을 했더니, 또다시 기승전일리온 이었다.

괜히 짜증이 치밀어 일리온의 생각을 털어 버리고 릴리를 바라보았다.

열심히 잔소리를 퍼붓는 릴리의 눈이 이제 보니 퉁퉁 부어 있었다. 걱정에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어쩐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기엔 아까운 잔소리였다.

“미안해. 내가 죽을죄를 지었어.”

“안 돼요!”

“응?”

“또 죽겠다는 생각하시면 안 된다고요! 어제 온종일 저택이 얼마나 살얼음판이었는데요! 절대 안 돼요! 제 눈에 흙이 들어가도 안 돼요!”

그렇게 말하며 릴리는 내 두 손을 쥐고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화가 잔뜩 난 릴리를 마주하고 있으니 정말로 공작가에 돌아왔다는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무리 꿈에서 깨어나도 소설 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도 다시금 깨달았다.

하, 원작 진입까지 며칠이나 남았으려나.

아직 공작저에 남아 있을 거라 상상도 못 했던 나는 손가락을 꼽아 가며 날짜를 세어 보았다.

***

잠을 못 자 몽롱한 정신은 두뇌 회전에 최악이었다. 그 증거로, 난 눈앞의 남자가 내게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공작님께서 당분간 아가씨를 보필하라는 명을 하셨습니다.”

“네?”

문 앞을 가득 메우고 선 우람한 근육질의 남자가 날 보며 말했다.

햇빛에 그은 피부에, 그보다 좀 더 짙은 갈색 머리를 지닌 남자의 옷엔 셀레스타인가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그러니까, 누구시라고요?”

“창공 기사단 단장, 루카스 오웬 입니다.”

그는 날 보며 다시 한번 자기소개를 건넸다.

경례하는 그의 움직임에 맞춰, 입고 있는 제복이 터질 것처럼 팽팽히 당겨졌다.

앞섶을 여민 단추가 금방이라도 내 얼굴로 튀어 오를 것만 같았다.

멍하니 단추가 불쌍하다는 생각을 하다, 그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지금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한낱 말단도 아니고 단장씩이나 되는 사람이 내 호위를 위해 왔다고?

“단장님처럼 바쁘신 분이 왜……?”

뜬눈으로 밤을 새운 덕분에 퉁퉁 부은 눈은 웃음을 짓는 것도 영 시원치 않았다. 그렇게 어색한 미소만 짓고 있는데, 루카스는 감격한 표정을 지으며 날 바라보았다.

“그야 공작님께서 아가씨를 많이 아끼시기 때문이죠. 저는 공작님의 걱정을 덜어 드리기 위해, 아가씨를 지킨다는 막중한 임무를 지니고 이렇게 온 겁니다.”

볼이 약간 상기된 것이 존경해 마지않는 공작님의 원픽이 자신이라는 사실에 무척이나 감동한 표정이었다.

글쎄, 내 생각은 좀 다른데…….

루카스 혹시 일리온한테 잘못한 거 있어요? 막중한 임무가 아니라 직장 내 괴롭힘 같은데?

결국 루카스를 데리고 식당으로 향했다. 커다란 문짝을 등 뒤에 달고 걷는 기분이었다.

호위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포장하긴 했지만, 결국은 감시나 다름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일리온의 얼굴을 봐야 하는 것만으로도 먹지도 않은 아침이 얹힌 것처럼 속이 더부룩했는데, 일리온을 만나기 전부터 신경전을 펼쳐야 한다니.

아무래도 오늘 아침도 전쟁터가 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나는 긴장을 토해 내듯 짧게 한숨을 뱉어 내고 짐짓 결연한 표정으로 식당 문을 열었다.

식당엔 일리온이 나보다 먼저 도착해 신문을 읽고 있었다.

쓸데없이 아침부터 잘생겼네.

불타오르는 내 투지를 꺾어 버리기에, 충분한 외모였다. 작가님이 일리온을 조금만 더 인간 수준의 외모로 설정했더라면 내가 지금보다 좀 더 잘 싸울 수 있을지도 몰랐다.

“좋은 아침입니다, 공작님!”

“생각보다 일찍 왔군.”

그래, 그 잘난 얼굴이 내 투지를 꺾을 때마다 그 주둥이가 장작을 던지지. 참 절묘한 밸런스였다.

세상에 완벽한 건 없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며, 빠르게 자리에 앉아 본론을 꺼냈다.

“아침에 기사단장님께 얘기는 들었습니다. 공작님께서 제 호위를 명하셨다던데?”

“그거라면…….”

일리온은 날 바라보지도 않은 채 무심하게 대꾸했다.

“그대가 원하던 대로 해 줬을 뿐이네.”

“네?”

내가 언제?

설명을 요구하는 표정으로 일리온을 바라보자, 그제야 일리온은 신문을 접고 내게 눈을 맞춰 왔다.

“그대가 말하지 않았나? 내 관심을 원한다고.”

“…….”

“그래서 루카스에게 부탁했네. 그대의 뒤를 따라다니며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라고.”

확실히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언제부터 내 말을 그렇게 잘 들어줬다고? 그리고 방법이 좀 다르지 않아?

“저는 공작님의 자유방임주의도 꽤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만…….”

“생각을 바꿨네. 앞으론 그대가 원하는 대로 해 주려고 해.”

역시 이상했다.

정략결혼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라며 내게 한 소리 했던 게 고작 한 달 전의 일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갑자기 태도를 바꾸는 이유가 뭘까?

게다가 내 말이라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도 모자라, 아예 귀를 막고 살았으면서 이제 와서 내가 원하는 대로 해 주겠다니.

어제의 핑계가 거짓말이었다는 걸 어느 정도 눈치챈 것 같다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긴 하지만, 그런 것 치고는 내 목은 아직 멀쩡히 붙어 있었다.

한참을 일리온의 생각을 파악하기 위해 눈치를 살피는데, 일리온은 뜬금없는 얘길 내게 건넸다.

“참고로, 루카스는 유부남이니 괜한 생각 말게.”

“네?”

혹시 루카스를 속일 생각은 하지 말라는 건가?

……그거랑 유부남이 무슨 상관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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