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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31)화 (30/159)

31화

미카엘은 언젠가 이런 식으로 호출당할 거라 예상했다. 제가 라벤느의 팔찌에 추적 마법을 건 날부터.

카지노에 불려 갔던 날, 일리온은 너무도 당당하게 제게 한 가지 부탁을 해 왔다.

‘이 아티팩트에 위치 추적 마법을 걸어 줄 수 있나?’

‘예? 공작님, 아무래도 그건 사생활 침해…….’

‘있냐고 물었네만.’

참견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붉은 눈동자가 단호하게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여간 높으신 귀족들이란.

미카엘은 속으로 혀를 차면서도 겉으로는 미소를 지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셀레스타인 공작을 기분 나쁘게 해 봐야 자신들만 손해였다. 게다가 그는 마법 아카데미의 가장 큰 후원자가 아니던가.

‘……그, 그야 할 수 있죠.’

공작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 아카데미 교장부터 마법부 수장한테까지 찍힐지도 몰랐다. 괜히 제가 밉보여서 온갖 후원금이 사라지면 제명당할지도 모르는데, 까라면 까야지 어쩌겠는가.

미카엘은 팔찌를 받아 들고 가볍게 추적 마법을 걸었다.

‘저, 일단은 하라고 하시니까 했는데, 위치를 알 수 있는 건 시전자뿐이거든요?’

‘그럼 필요할 때 부르지.’

‘…….’

그래, 그때부터 예상했던 일이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고.

하지만 현실은 종종 상상을 뛰어넘는 재주를 지녔다.

미카엘은 먼지가 자욱한 방 안을 둘러보았다.

셀레스타인 공작의 약혼녀와 그르노블 백작가의 여식이 다 쓰러져 가는 방 한쪽에 묶여 있었고, 제가 기침하는 사이에 일리온이 이미 사내 하나를 내던진 후였다.

라벤느는 알겠는데 율리아는 무슨 일로 여기 있는 걸까? 보기 드문 조합에 미카엘은 고개를 갸웃하다 생각하길 포기했다.

이 아수라장이 뭔지 모르겠지만 저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미 퇴근 시간은 한참 지나 버렸는걸.

빨리 일을 끝내고 일리온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일단 원하시는 대로 텔레포트를 하긴 했는데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뭐라도 명령을 해 주길 바라며 일리온을 바라보자, 그는 긴 다리를 휘적이며 벽에 부딪혀 쓰러진 사내에게 향했다.

그리고는 커다란 구둣발로 사내의 손을 으스러뜨릴 기세로 사정없이 짓밟았다.

“끄아아! 개자식이 이거 놓지 못……!”

밟히지 않은 다른 쪽 손으로 일리온의 발을 떼어 내려 했으나, 일리온의 검이 더 빨랐다. 검에 의해 잘려 나간 팔은 주변에 피를 흩뿌리며 바닥을 몇 바퀴 구르다 멈췄다.

사내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비명을 질렀고, 그의 끔찍한 비명을 들으며 미카엘은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내일은 토요일이다. 내일은 토요일이다.’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생각을 중얼거리며 미카엘은 이 꿈같은 현실을 부정했다. 그러나 현실은 아무래도 절 가만둘 생각이 없는 듯했다.

사내의 비명이 지나치게 컸던 탓에, 밖에서 만찬을 즐기던 일당들이 방으로 들이닥쳤다.

“웬 놈들이냐?”

술 냄새를 풍기며 무기를 쥐고 달려온 남자들이 주변을 에워쌌다. 미카엘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일리온이 있는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저기, 공작님? 한 놈만 패지 말고, 나머지도 좀 보시면 안 될까요? 친구들이 몰려왔는데요.”

그러나 제 말을 못 들은 건지, 아니면 나머지는 제 알 바 아니라는 건지, 일리온의 시선은 여전히 그 남자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사람 하나 죽일 듯이 칼로 찔러 대는 일방적인 폭행을 미카엘은 흐린 눈으로보다 고개를 돌렸다.

“……네, 알겠습니다. 나머지는 제가 처리할게요.”

그는 체념한 듯 한숨을 쉬고는 손을 펼쳐 영창을 시작했다.

때아닌 마법사의 등장에 겁먹은 사내들은 처음의 그 호기롭던 태도를 순식간에 버리고, 우왕좌왕하며 문으로 달려갔다.

“마, 마법사다! 도망쳐!”

“라이트닝!”

그러나 미카엘의 마법을 피할 수는 없었다. 방을 빠져나가려던 사내들은 문 앞에서 서로 엉키더니 번개를 직격으로 맞고 쓰러졌다.

역시나 사람을 상대로 마법을 쓰면 뒷맛이 영 좋질 못했다.

의외로 평화주의자인 미카엘은 못 할 짓을 했다는 듯 애써 시선을 돌려 버렸다.

그리곤 바닥에 쓰러져 있는 라벤느에게 다가가 그녀를 묶고 있던 밧줄을 풀어 주었다.

간신히 몸을 추스른 라벤느는 잔뜩 긴장한 채로 한 번씩 움찔거렸다.

보다 못한 미카엘이 일리온에게 한마디 했다.

“공작님, 영애께서도 놀란 듯하니 그쯤 하시는 게 어떨까요. 그러다 죽겠어요.”

그 말에 일리온이 우뚝하고 움직임을 멈추었다.

드디어 제 말이 통하다니! 감격에 가슴이 벅차오를 지경이었다.

부탁인데 죽일 거면 제발 제가 없는 곳에서 죽였으면 좋겠다. 송장 치우는 일까지 돕고 싶지 않으니까.

일리온은 피 묻은 검을 한 번 털어 내고는 미카엘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일방적으로 때려 놓고도, 분이 채 풀리지 않은 모양인지 여전히 사람 하나 죽일 것 같은 분위기였다.

“치유도 가능한가?”

“……마법이 만능인 줄 아시네. 치유는 신전 가셔야죠. 전 못해요.”

“그럼 이자의 상처를 불로 지져 주게. 과다 출혈로 죽어 버리면 안 되니까.”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그렇게 말하는 일리온을 보다, 미카엘은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알면서도 일부러 물어본 게 분명했다.

일리온은 그 말만 남기고 라벤느를 안아 들고 기절한 남자들을 잘근잘근 밟으며 방을 나가 버렸고, 미카엘은 긴 한숨을 내뱉으며 다진 고기처럼 퍼져 있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부탁이니 쇼크로 죽지는 말아라. 오늘 안엔 퇴근하고 싶으니까.”

부디 남자가 살길 기도하며, 그는 상처 주변으로 마법을 시전했다. 남자의 끔찍한 비명이 다시 한번 방 안을 울렸다.

***

“상처는 모두 치료했습니다. 성수를 이용했으니, 흉터도 거의 안 남을 거예요.”

“언제쯤 깨어날 것 같습니까?”

“피곤해서 잠시 잠이 든 것뿐입니다. 기력을 회복하시면 금방 일어나실 거예요.”

“……그래? 내 눈에는 자는 척하는 거로 보이네만.”

……들켰나?

일리온이 무심히 내뱉는 말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지만, 난 애써 자는 척을 유지했다.

그야 이대로 눈을 뜨면 일리온한테 죽을지도 모르는데 내가 미쳤다고 일어나겠냐고!

어제 일은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 되어서야 일단락됐다.

세바스찬이 병사들과 함께 폐가를 찾아왔고, 날 납치했던 일당들과 율리아까지 모두 잡아들였다.

율리아는 자기는 잘못이 없다며 발악했지만, 일리온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리고 난 일리온의 품에 안겨 저택으로 텔레포트 되었다.

내 방에 도착할 때까지 일리온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그가 풍기는 위압감에 나 역시 평소와 같은 허무맹랑한 소리를 늘어놓을 수 없었다.

판사의 선고를 기다리는 죄수처럼 그저 얌전히 그에게 안겨 있을 뿐이었다.

나를 침대에 내려 준 일리온은 그제야 작게 한숨을 쉬며 날 바라보았다. 그러나 숨 막힐 듯한 적막감이 다시 우리 둘 사이에 내려앉았고, 나는 애꿎은 이불만 부여잡고 있었다.

한참을 시계침이 똑딱이는 소리만 들으며 나는 그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 채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침묵을 먼저 깨뜨린 건 일리온이었다.

‘그대에게 들을 말이 많지만 피곤해 보이니 내일로 미루지.’

그건 내게 사형 선고 같은 말이었다. 단지, 형의 집행이 하루 연장된 것뿐.

나는 일리온의 눈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한 채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서 다시 오늘, 사제와 의사까지 대동해서 이른 아침부터 날 찾아온 일리온에게 깨어 있다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 난 눈을 꾹 감고 있었다.

눈을 감고 있어도 일리온의 날카로운 눈초리가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어쩐지 얼굴이 따갑기까지 했다.

“일단 아가씨께서 깨어나실 때까지 기다리시지요.”

“…….”

역시 세바스찬밖에 없어.

다행히 세바스찬의 적절한 도움으로 완고하던 일리온이 먼저 포기하고 돌아갔다.

발소리가 멀어지는 걸 들으며 나는 눈을 떠 천장을 바라보았다.

여길 떠나고 싶어서 그렇게 발악을 했는데, 돌고 돌아 다시 이곳이라니. 이 익숙한 천장이 오늘만큼 야속한 적도 없었다.

이쯤 되면 일리온의 운명을 걱정할 게 아니라 기구하기 그지없는 내 운명을 걱정해야 할 듯했다.

내가 들어온 세계가 소설이기 때문에 스토리를 이어 나가야 하는 강제력이라도 생긴 걸까? 그래서 자꾸만 이곳으로 돌아오게 되는 걸까?

내가 이 소설 속에 들어온 이유도 모르겠는데 그 이유를 생각해 본들 뚜렷한 대답이 떠오를 리 없었다.

세르지오는 어떻게 됐으려나. 해바라기 그림은 돌려줘야 하는데…….

반나절이 넘도록 침대 위에 누워 있음에도 불구하고 꼬리를 물고 머릿속을 헤집는 생각 때문에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어떡하면 좋을까? 도저히 일리온의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

온종일 침대에서 죽은 듯이 잠자는 척만 하던 나는 릴리가 방으로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론은 하나였다.

‘도망치자.’

이대로 있다가 일리온의 손에 감옥에 끌려갈 바엔 도망이라도 쳐야겠다.

이불을 걷어 내고 시트를 빼 반으로 갈라 밧줄을 만들어, 밧줄의 한쪽 끝을 침대 모서리에 묶고 다른 한쪽을 창문 밖으로 던졌다.

주변은 캄캄했고 마침 저택을 순찰하는 경비병도 안 보였다. 밤이 늦었으니 하녀들도 모두 자고 있을 것이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다짐을 굳히고 나는 밧줄을 붙잡고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나도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지만 살려면 어쩔 수…….”

“이 밤중에 어딜 가는 건가?”

“……으악!”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힘겹게 벽을 내려오는데 인기척도 없이 들리는 목소리에 놀라 밧줄을 놓치고 말았다.

그대로 바닥에 추락할 거라는 예상과 다르게 단단한 두 팔이 떨어지는 날 안아 들었다.

“……어딜 가는 길이지?”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언제부터 거기 있던 거야?

“……사, 사, 산책을…….”

“잠옷 차림에 맨발로?”

“매, 맨발로 흙을 밟는 산책이 그렇게 건강에 좋다고…… 해서…요.”

“…….”

일리온은 말없이 날 바라보고 있었다. 기구한 내 운명…….

차라리 그대로 바닥에 떨어져 기절이라도 할 일이지 왜 일리온한테 안겨 버린 걸까.

하고많은 경우의 수 중에 왜 하필 일리온이냔 말이야!

“굳이 창문으로 나온 이유는?”

“…….”

“그래, 산책이라, 마침 잘됐군. 안 그래도 할 말이 있었는데.”

내가 대답을 찾지 못하고 한참 눈동자만 굴리자 일리온은 날 안고서 천천히 저택으로 걸어가며 말을 이었다.

“세르지오에게 그대가 꾸민 일들은 모두 들었다. 이유가 뭐지?”

올 게 왔구나.

“그, 그건…….”

“그와 사랑의 도피라도 할 셈이었나?”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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