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그래, 이럴 줄 알았다. 몰랐던 거 아니잖아? 일리온이 마차 앞에서 기다릴 때부터 내가 알아봤다니까?
진짜로.
손발이 묶인 채로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난, 또다시 자기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일이 이렇게까지 꼬인 이유를 짐작하기 힘들었다.
여기저기 깨진 창문이나 한참 동안 사용한 흔적이 없는 침대, 천장을 뒤덮은 거미줄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폐가인 듯 보였다.
난 애벌레처럼 꿈틀거리며 침대 위에 앉아 있는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에게 다가갔다.
“저기, 선생님? 실례지만 저는 왜 여기로 데려오셨나요?”
“기다리쇼. 곧 알게 될 테니까.”
거참 차갑네. 너 그럼 여자들한테 인기 없다?
“선생님, 그러지 마시고요. 제가 아시다시피 돈이 좀 많거든요? 절 왜 데려오셨는지 모르겠지만 돈은 섭섭잖게 드릴 테니까 저랑 딜을 하시죠.”
내 말에 남자가 호탕하게 웃어 재꼈다.
“그거 제안은 고맙소만 나는 이중 계약은 안 합니다.”
뭐래. 얼굴만 보면 이중 계약이 아니라 문어발 계약도 할 것 같은 사람이!
“그나저나, 꽤 재밌는 물건을 가지고 있소?”
“네?”
남자는 내 가방을 뒤적이며 안에 든 물건들을 침대 위에 늘어놓기 시작했다.
“금괴도 있고, 보석도 있구먼? 이야, 확실히 부자들은 뭐가 달라도 다르네.”
“그럼요! 게다가 제가 또 손꼽히는 부자거든요? 그 돈의 10배로 드릴게요. 아니, 20배!”
“아가씨, 내 말했지만, 아가씨랑 손 안 잡는다니까. 뭐, 이건 고맙게 가질게.”
“…….”
“이건 뭐야? 이것도 돈 되는 건가?”
산적은 내 가방에서 팔찌 하나를 꺼내더니 요리조리 살폈다. 지난번에 카지노에서 활약했던 아티팩트였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있는 거 없는 거 다 챙기다 보니 같이 챙긴 거였지만, 역시나 산적의 눈에도 싸구려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는 팔찌를 제외한 나머지 물건을 죄 제 주머니에 챙겼다.
상도덕을 운운하더니, 꽤 줏대 없는 상도덕이었다.
그 뒤로도 몇 번을 더 딜을 해 보았지만, 계속된 부탁이 귀찮았던 모양인지 결국 내 입을 수건으로 막아 버렸다.
탈출할 만한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한참을 하염없이 시간만 보내고 있는데, 멀리서부터 마차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마차는 폐가 앞에서 멈춰 섰고, 이내 또각거리는 발소리가 바닥을 울리며 내가 있는 방으로 다가왔다.
아무래도 날 납치한 주범인 듯했다.
긴장한 채로 문 앞을 노려보자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로브를 입은 사람이 들어왔다.
“이렇게 보니, 감회가 새롭네요. 리슈펠트 영애.”
어디서 들어 본 목소리 같은데…….
내 앞에 멈춰 선 여자는 쓰고 있던 로브를 벗고 모습을 드러냈다.
하늘거리는 분홍빛 머리카락이 로브 자락에서 빠져나와, 어깨 위로 흘러내렸다.
‘율리아?’
“그간 잘 지내셨나요? 어머, 저런. 입이 막혀 말을 못 하시는군요.”
그렇게 말하는 율리아의 입은 웃고 있었다. 그녀는 친절하게도 내 입을 막은 수건을 풀어 주었고, 드디어 입이 자유로워지자 난 참았던 숨을 터트리듯 말을 내뱉었다.
“율리아 양? 이게 대체 무슨 짓인가요? 왜 날 납치한 거예요?”
“그 똑똑한 머리로 생각해 보시죠.”
모르겠거든? 설마 반지 도둑맞은 사건 때문에 앙갚음이라도 하고 싶은 거야?
“반지 때문에 이러시는 거면…….”
“반지 때문이 아니에요! 영애 때문에 우리 가문은……!”
율리아는 갑자기 감정이 북받치는지 입술을 깨물며 잠시 숨을 골랐다.
“부모님은 황성에 잡혀 들어가셨고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습니다. 모두 영애께서 제 외숙부인 가드너 백작의 카지노를 들쑤시고 다녀 주신 덕분에요.”
“일이 그렇게 돼서 미안한데, 그럴 의도는 아니었…….”
“예. 그러시겠죠.”
정말 아니었다고. 너희 외숙부를 감옥에 처넣은 것도 내가 아니라 일리온이라니까? 잡아 올 거면 일리온을 잡아 와야지, 왜 나를 잡아 오는 건데?
“율리아 양, 우리 이러지 말고 말로 해결하죠. 일단 대화를…….”
“제가 이렇게 온 이유는, 영애께서 마지막 가시는 길을 배웅해 드리기 위해서랍니다.”
율리아는 내 말을 자르더니 눈가를 휘며 화사하게 웃어 보였다.
“마, 마지막이라니…….”
“말 그대로, 마지막이죠. 부디 가시는 길 평안하시길…….”
그렇게 말하며 율리아는 내게서 등을 돌리고 산적에게 다가갔다.
“제프, 약속했던 대금이야. 나머지는 얘기했던 대로 처리해 줘.”
대화를 흥미롭게 지켜보던 제프는 율리아가 건네는 주머니를 받아 들었다.
그녀의 의미심장한 마지막 말에 난 황급히 율리아를 붙잡았다.
“저기, 율리아 양? 우리 나중에 후회할 일은 하지 말죠. 이 사실을 혹여 공작님께서 아시면…….”
“아시면요? 제게서 뭘 뺏어 가실 수 있겠습니까? 제겐 이제 남은 게 없답니다. 그러니 후회할 것도 없죠.”
그렇게 말하는 율리아의 표정은 어딘가 초연하면서도 비틀려 보였다.
몇 주 안 되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사람이 이렇게나 바뀔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낯선 표정이었다.
“참, 영애께서 적선하신 반지가 꽤 비싸더군요. 심부름꾼을 고용할 수 있을 정도로. 덕분에 아주 요긴하게 썼답니다.”
“…….”
업보구나. 이쯤 되면 다 내 업보지. 죽은 척하려다 진짜 죽게 생겼네.
“대금은 확인했소.”
“그럼 잘 가요. 리슈펠트 양.”
“그건 안 되겠수다.”
“……뭐?”
제프라는 사내는 율리아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대금은 정확할 텐데?”
“그게 아냐, 아가씨. 우린 원래 귀족이랑 계약 안 하거든.”
“그게 무슨……?”
“말 그대로지. 아가씨도 여기 있어야겠어.”
제프의 말에 율리아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건장한 사내를 뿌리치기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 이게 무슨 짓이야? 감히 이런 짓을 하고도!”
율리아. 그거 내가 1시간 전에 이미 했던 대사야.
잠시 후 율리아는 나와 똑같이 손발이 묶인 채로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그녀의 황금색 눈동자가 분노로 이글거렸다.
“돈이 부족하다면 더 주겠다. 그러니 어서 이거 풀지 못해?”
그것도 이미 내가 한 대사고.
내 모습을 그대로 답습하는 율리아를 보며 나는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게 손을 잡아도 어떻게 저런 놈들이랑…….”
내가 혀를 쯧쯧 차며 말하자, 율리아가 이를 아득 갈며 날 노려보았다.
***
“에취!”
세르지오는 몸이 크게 울리도록 재채기를 내뱉더니 코를 훌쩍였다. 세르지오를 포함해 그가 데려온 자객들은 모두 몸이 묶여 바닥을 굴러다니고 있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주인님?”
세바스찬이 물었다.
라벤느의 계획을 모두 들은 일리온은 잠시 생각하는 듯 아무 말이 없었다.
“지, 진짜로 그 리슈펠트 영애가 먼저 제안한 거라니까요. 난 그 제안에 따른 죄밖에, 히익-.”
말 없는 일리온의 모습이 자신을 의심하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세르지오는 서둘러 항변했지만, 눈앞에 검이 위협적으로 드리워질 뿐이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세바스찬이 입 다물란 얼굴로 세르지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참을 생각하던 일리온이 물었다.
“리슈펠트를 데려간 사람은 모른다는 건가?”
“몰라요. 우리 계획에 그런 건 없었다니까요? 혹시 모르지, 그 영애가 나를 속이려고 또 다른 놈이랑 손을…… 아, 알았다니까요. 입 다물고 있을게요.”
다시 한번 세바스찬의 매서운 눈길에 세르지오는 입을 다물었다.
라벤느가 죽은 척까지 해 가며 공 작가를 떠나고 싶어 했다는 건 알겠다. 이유는 짐작 가는 바가 없었지만, 라벤느가 세르지오를 꽤 마음에 들어 했던 것이 어쩐지 마음에 걸렸다.
설마하니 둘이서 사랑의 도피 따위를 하려고 했던 건가? 그렇다면 제가 어지간히 우스워 보인 모양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셀레스타인 공작가를 우롱하려 들다니.
일리온의 입술이 천천히 비틀렸다.
감히 제가 누굴 속이려 했는지, 그 해맑은 머리통에 똑똑히 새겨 줘야 할 듯했다.
“미카엘에게 연락을 취하게. 리슈펠트를 잡으러 가지.”
주인의 명령에, 세바스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데려오는 것도 아니고, 잡으러 간다니…….’
어쩌자고 라벤느는 이런 일을 벌였는지, 세바스찬의 근심이 깊어져만 갔다.
***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집 안을 울렸다. 제프와 그의 동료들이 오늘의 성과를 축하하기 위해 파티를 벌이는 중이었다.
그 옆방에서 라벤느와 율리아가 도망가지 못하게 지키던 사내들은 파티에 끼지 못한 푸념을 늘어놓았다.
“우리는 저기에 끼지도 못하고……. 나도 술 먹고 싶다.”
“말단인데 할 수 없지. 어쩌겠냐.”
“그나저나 저 여자들은 어쩔 거래?
“어디 시골에 하녀로 내다 팔 거라던데?”
그 말에 사내 한 명이 비웃으며 물었다.
“귀한 집 아가씨들이 그런 데 가서 일이나 할 수 있으려나?”
“알 게 뭐야. 우린 돈이나 받으면 되지.”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던 사내 중 한 명이 가만히 있는 것도 심심했는지 라벤느에게 다가왔다.
그리곤 군데군데 빠진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아가씬 어디가 좋아? 밭에서 일하는 게 좋아, 아니면 바다에 가서 고기 잡는 게 좋아? 둘 다 싫으면 대장한테 잘 말해서 내 아내로 삼아 줄 수도 있는데.”
동료가 사내의 뒤통수를 후려치며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감시나 해.”
뒤통수가 아팠는지 사내는 볼멘소리를 중얼거렸다.
“어차피 묶여서 도망도 못 가는데 감시는 무슨 감시야. 아가씨도 거기서 가만히 있는 거 심심하잖아, 그렇지?”
사내의 질문에 라벤느가 무어라 웅얼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입이 틀어막혀 목소리는 정확하지 않았지만 분명한 거절의 표현이었다.
“봐. 심심하다잖아.”
사내는 좀 더 라벤느에게 다가와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러다 대장한테 걸려도 난 모른다.”
“그냥 얘기만 하겠다니까. 얘기만.”
동료의 간섭이 귀찮은지 손을 휘휘 젓던 사내는 라벤느를 보며 물었다.
“아가씨,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아가씨처럼 팔려 간 사람이 몇 있는데, 다 어떻게 됐게?”
라벤느는 별로 궁금하지 않다는 표정으로 몸을 꿈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한 명은 일이 힘들어 도망치다가 주인한테 잡혀서 죽도록 매질을 당했고, 다른 한 명은 바다에서 물고기 밥이 됐어.”
그렇게 말하며 사내는 라벤느의 볼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
“그러니 물고기 밥이 되는 것보다야, 나한테 시집오는 게 낫지 않겠어? 안 그래, 아가씨?”
사내의 말을 들으며, 라벤느는 처음으로 이 세계가 어떤 곳인지 깨달았다.
그동안 자신이 누려 온 평온한 일상은 어디까지나 일리온의 울타리 안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울타리를 넘어선 밖은 훨씬 더 어둡고 무섭고 호시탐탐 약자를 노리는 맹수로 가득한 곳이었다.
그리고 그 맹수들은 말이 통하지도, 돈으로 매수할 수도 없었다.
제 볼을 툭툭 치며, 어떤 최후가 더 좋겠냐는 사내의 물음에 라벤느는 염치없게도 일리온을 떠올리고 있었다.
쾅!
둔탁한 파열음이 귓가를 찔렀다. 혹시 두목이라도 와서 막아 준 건가 싶어 라벤느는 감았던 눈을 살며시 떴다.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니, 라벤느에게 다가왔던 조직의 말단 사내가 벽에 부딪히면서 나무 벽이 깨져 있었다.
“콜록, 콜록. 아, 나 기관지 안 좋은데.”
일렁이는 먼지를 휘저으며 푸른 머리의 사내가 기침을 터트렸다. 그리고 그 옆으로 너무나 익숙한 실루엣의 남자가 서 있었다.
바닥에 누워 있는 라벤느는 간신히 눈동자를 굴려 눈앞의 남자를 살펴보았다. 눈동자를 최대한 위로 굴려 보아도, 제한된 시야에 남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누군지는 얼굴을 확인하지 않아도 분명했다. 참았던 숨이 잇새로 새어 나왔다.
그리고 동시에 그녀의 눈에서 동그란 눈물이 툭 하고 속절없이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