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하늘이 참 어둡다. 마치 내 미래처럼.
오늘따라 유독 별도 뜨지 않은 캄캄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침대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인생에 대해 깊은 사색에 잠겼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말라. 참고 견디면 기쁜 날이 오리니…….”
“……아가씨 뭘 그렇게 중얼거리세요?”
“하아…….”
푸시킨, 이 정도면 삶이 날 속이는 게 아니라 농락하고 조롱하는 것 같은데요?
과연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더라도 이딴 태평한 소리를 할 수 있을까?
이 모든 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려면 최소한 목숨은 남아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개똥밭에서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도 있잖아!
한참 소리를 지르며 머리를 헝클어뜨리다 제풀에 지쳐 드러누운 날 보며 릴리가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그림은 꼭 찾으실 수 있을 거예요. 오늘 그 사기꾼은 못 찾았지만 찾다 보면 단서가 나올지도 모르고, 알버트 자작님께서도 알아봐 주시겠다고 하셨잖아요.”
종일 황립 미술관과 근처 미술상을 닥치는 대로 돌아다녔음에도 아무런 소득이 없어 절망적인 건 맞지만, 비단 그것 때문에 이토록 고통에 몸부림치는 건 아니었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 나는 어째서 이렇게 운이 없느냐에 대한 것이다.
어떻게 하는 일마다 죄 어그러지는 거지? 혹시 나, 이 세계의 신한테 미움이라도 받는 걸까?
“릴리, 나는 어떻게 되는 일이 하나도 없을까.”
“무슨 소리세요? 제가 보기엔 아가씨는 운이 굉장히 좋으신데. 지금까지 일들을 보면 아가씨께서 마법이라도 부린 게 아닌가 싶다니까요?”
“…….”
그게 문제야. 무언가를 하려고만 하면 일이 이상한 방향으로 틀어지잖아. 단 한 번도 내가 의도한 대로 일이 흘러가질 않는다고.
이럴 바엔 그냥 처음부터 운명을 받아들일 걸 그랬어. 그래, 이 소설은 그거야. 빙의자의 운명을 절대 바꿀 수 없는 그런 소설.
하다못해 빙의하기 전에 알려 주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그럼 이딴 귀찮은 발악일랑 일찌감치 포기하고 젊고 잘생긴 남자들 옆에 끼고 얼마 남지 않은 짧은 삶을 즐기기라도 했을 테니까.
방탕하게 말이야!
“그래, 이제 받아들일 때도 됐지. 그냥 죽자. 죽어.”
잘됐네. 남들 다 하는 노후 걱정을 할 필요가 없어서 말이야! 정말 잘됐어!
“릴리, 내일 아침이 오지 않으면 좋겠다.”
“아까부터 자꾸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혹시 요즘 읽고 있는 소설 주인공이 죽기라도 했어요?”
“그게 아니라…….”
릴리의 말에 대꾸하려던 순간, 문득 떠오른 생각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갑자기 우울함에 몸부림치던 사람이 돌연 눈을 빛내며 일어나자 릴리가 놀란 듯 움찔했다.
“죽으면 되잖아…….”
“……네?”
왜 진작 이렇게 해결할 생각을 못 했지? 그래! 죽으면 되잖아!
***
위작인 줄 알았던 작품이 진품이라는 감정 결과를 받은 뒤로 난 일주일에 서너 번씩 마을에 나갔다.
일리온은 내 외출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지만, 그의 매서운 눈초리가 날 막을 순 없었다. 어떻게든 그림을 찾아오겠다며 막무가내로 우기고 우겨서 간신히 받은 허락이었다.
그 대신 남은 날들은 일리온의 서재에 꼼짝없이 틀어박혀 그의 일을 도와야 했지만.
이놈의 악덕 고용주는 내가 쉬는 만큼 노동력을 착취할 셈인지 갈수록 일이 늘어나고 있었다. 빨리 세르지오를 찾지 않으면 내가 먼저 과로사할지도.
“그런데 아가씨, 이렇게 카페에서 기다린다고 해서 과연 세르지오 남작, 아니 그 사기꾼을 찾을 수 있을까요?”
“제 발로 나타날 거야.”
“어떻게 그렇게 장담하세요?”
릴리가 쿠키를 오독이며 물었다.
“당연하지. 자신이 1만 골드에 판 물건을, 10만 골드로 뻥 튀겨 판다면 열 받아서라도 따지러 올 테니까.”
그림을 감정했던 그 날, 돌아가는 알버트 자작을 붙잡고 주변 미술상에 한 가지 소문을 퍼뜨려 달라고 부탁했다.
최근에 렘피토의 장미 그림을 구입한 익명의 귀족이 10만 골드에 그 그림을 팔아넘겼다는 이야기를.
자신이 1만 골드라고 팔아넘긴 게 10배가 되어 다시 팔렸다는데, 이 소식을 듣고 가만히 있으면 그건 호구지, 호구.
게다가 내게서 받아 간 그림과 항아리가 하나는 모작이고 다른 하나는 상업적 가치가 전혀 없다면? 오히려 눈이 뒤집혀 날 찾아올 것이다.
되려 자신이 사기를 당했다고 생각하겠지.
사기꾼들이 남 등 처먹는 짓은 잘해도, 자기가 당하는 건 못 참거든.
그래서 요 며칠간 같은 시각, 같은 카페에서 죽치고 앉아서 리슈펠트 영애가 항상 이 시간이면 카페에 오더라는 소문을 주변에 흘리는 중이었다.
세르지오가 날 만나러 오기 편하도록.
벌써 시계는 오후 3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세르지오는 반응이 없었다. 오늘도 허탕을 친 모양이었다.
할 수 없이 오늘은 이쯤 하기로 하며 집에 돌아가기 전,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게는 앞으로 시간이 별로 없었다. 황제가 출정을 나간 지도 2주가 지나가고 있었기에, 앞으로 2, 3주 뒤면 돌아올 것이다.
성녀를 데려오면 본격적으로 원작이 시작한다. 그리고 일리온과 성녀가 만나겠지.
물론 만난다고 해서 바로 반역을 저지르지는 않겠지만, 나로서는 그 전에 빨리 공작저를 벗어나고 싶었다.
황제가 좀 더 멀쩡한 놈이라면 파혼당한 약혼녀에게 연대 책임을 물을까 싶지만, 어디 걔가 좀 미쳤는가?
그러니 안심할 수 없었다. 하루빨리 도망쳐 외국으로 도피하는 수밖에.
화장실을 가기 위해 카페를 나와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 갑자기 몸이 벽으로 확 밀쳐지더니 눈앞에 칼이 들이밀어졌다. 칼을 잡은 손을 따라가며 천천히 남자를 관찰했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얼굴을 두건으로 가리고 있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겉으로 드러난 눈매만큼은 익숙했다.
“오랜만이네요. 세르지오 남작님.”
“오랜만입니다, 영애.”
“그나저나, 그림을 사랑하시는 분치고는 좀 과격한 인사네요.”
나는 뾰족하게 빛나는 칼날을 바라보며 애써 침착함을 유지했다.
“그럴 수밖에요. 제게 사기를 치셨으니까요!”
말은 바로 하자고, 난 네 사기에 열심히 호응해 준 기억밖에 없다고! 애초에 모작을 구별할 줄도 몰랐던 건 네놈이잖아?
“그럴 리가요. 저도 항아리가 모작이라는 건 전혀 몰랐답니다. 그래서 한동안 남작님을 수소문하고 다녔는데, 이 세상엔 세르지오 남작이라는 사람이 없더라고요.”
“그게 다가 아니잖소! 내게서 사 간 그림을 10만 골드에 파셨다고 들었는데!”
“어머, 소문이 그렇게 빨리 퍼졌나요?”
“너무하지 않습니까?”
“너무한 건 남작님이죠. 제게 위작을 파려 하셨잖습니까.”
“그, 그건! 그래도 진품이었지 않습니까!”
방귀 뀐 놈이 어디서 성질이야?
어처구니없는 그의 태도에 할 말이 많았지만, 어설픈 연기는 이쯤 하기로 했다. 난 빠르게 본론으로 들어가기 위해 입가에 웃음기를 지우고 세르지오를 바라보았다.
“예, 놀라운 일이죠. 경매장에서 황제 폐하께서 구매하신 그림에 위작이 섞여 들어갔고, 진품은 세상에 돌아다니고 있었으니까요. 과연 폐하께서 이 사실을 아시면 당신이 무사할 수 있을까요?”
내가 아는 황제라면 세르지오는 물론이고 위작을 그린 화가부터 그 당시 경매를 진행했던 사람들까지 죄 잡아들일 것이 분명했다.
그대로 고이 목만 따 버린다면 오히려 자비로운 처사였다. 그 성격에 자신을 능욕한 이를 곱게 죽일 리 없으니까.
그러니 이 사실이 황제의 귀에 들어가면, 세르지오 넌 장미정원 배틀 로얄 특급 열차행이야.
“제국에 있는 한 당신은 독 안에 갇힌 쥐 신세를 면하지 못할 겁니다.”
“윽, 그 정돈 나도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으면 넌 내 앞에 나타나면 안 되지.
분노에 머리가 돌아 버려 냉정한 사고를 하지 못한 건 이해하지만, 이 녀석이 그리 똑똑하지 않다는 사실만큼은 인정해야 할 듯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내겐 선택지가 그리 많지 않은걸.
“제가 도와드리죠.”
“……네?”
“제가 당신이 외국으로 도망칠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외국에서 새로운 신분으로,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 수 있게 해 드리죠.”
“……영애?”
“대신 절 도와주세요.”
난 세르지오의 눈을 마주 보며 말했다. 찡긋거리는 눈에 당황이 스쳤다.
“무, 무슨 소릴 하는 겁니까.”
“일단 말하기 힘드니, 이 손 좀 치워 보세요. 어디 안 도망갈 테니.”
난 칼이 들린 세르지오의 손을 부드럽게 밀어냈다. 갑작스러운 내 제안에 당황했는지, 그는 순순히 몇 걸음 물러났다.
“선수금입니다.”
손가방에서 금괴 한 덩어리를 꺼냈다. 금괴를 보더니 세르지오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이 일이 잘 끝나면, 지금 드린 것의 세 배를 당신에게 지불하죠.”
그는 긴장한 듯 침을 꿀꺽 삼키며 되물었다.
“영애께서 원하시는 게 뭡니까?”
***
율리아는 제 집 안을 헤집어 놓는 기사들을 망연하게 바라보았다.
거친 쇠갑옷이 저택을 아무렇게나 짓밟으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곳이 감히 어딘 줄 알고…….’
그러나 함부로 소리칠 수 없었다. 그들이 입고 있는 갑옷에는 황실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으니까.
율리아는 귀족의 기품도 제쳐 두고 서둘러 그르노블 백작의 서재로 달려가 문을 거칠게 열었다.
“아버지,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저들이 왜 집을 멋대로 수색하는 건가요?”
율리아의 물음에도 백작은 그저 말없이 양손에 얼굴을 묻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율리아는 그르노블 백작 앞에 놓인 신문을 발견했다.
황급히 신문을 낚아채 1면에 적힌 기사를 바라보았다.
[가드너 백작 체포……. 카지노 승부 조작, 카지노와 관련된 이중장부 발견. 사건과 관련된 모든 귀족을 조사할 예정…….]
“설마, 외삼촌이……!”
“그래. 그때 투자를 했던 투자자들까지 모두 조사를 하라는 폐하의 명이 떨어졌다.”
“하지만, 저희는 외삼촌이 이런 짓을 저질렀다는 걸 몰랐잖아요. 그렇죠?”
“…….”
“서, 설마…… 알고 계셨어요?”
말이 없는 그르노블 백작을 보며 율리아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손가락 마디가 하얘지도록 신문을 구겼다.
구겨진 신문 위로 익숙한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라벤느 리슈펠트…….”
제게 창피를 주었던 그 여자의 이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