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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27)화 (26/159)

27화

때마침 일리온이 응접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오랜만입니다. 알버트 자작.”

“아, 셀레스타인 공작님. 참으로 오랜만입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감정은 해 보셨습니까?”

“이제 해 보려고 합니다만, 아무래도 영애께서 물건을 잘못 구매하신 건 아닐까 염려되옵니다.”

그 나름대로 물건이 가짜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으라는 의미였다.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나는 언제든지 파혼당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니 어서 감정을 시작해 주시지요.

나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누르며, 그가 할 말을 고대하고 있었다.

자작은 가져온 도구들을 이용해 감정을 시작했다. 돋보기로 살펴보고, 램프로 빛을 비춰 보고, 처음 보는 물건까지 동원해 감정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우리 쪽을 바라보았다.

“감정이 끝나셨나요?”

“예. 끝났습니다.”

“혹시, 위작인가요?

나는 위작이라는 얘기에 맞춰 울기 위해 감정을 잡기 시작했다. 너무 기뻐서 눈물이 나오지 않을 것 같은데. 눈이라도 좀 찌를까?

그가 굳은 표정을 하며 천천히 입술을 뗐다.

“진품입니다.”

“세상에! 말도 안 돼요. 진품일 리가……, 네?”

나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영애를 연기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어색하게 되물었다.

“지금 진품이라고 하셨나요?”

“네. 진품이 맞습니다. 솔직히 저도 조금 믿기 힘들군요.”

나야말로 믿을 수가 없는데? 진짜로? 진짜 진품이라고?

나와 마찬가지로 일리온 역시 의아한 듯 자작에게 되물었다.

“어떻게 그 작품이 진품일 수가 있지?”

“렘피토는 아시다시피 마법사이면서도 뛰어난 예술가였죠. 그는 마법을 사용해서 작품에 눈에는 보이지 않는 서명을 적어 놓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램프를 써서 그림 오른쪽 아래에 적힌 서명을 보여 주었다.

푸른빛들이 얼기설기 엮여 문자 같기도, 그림 같기도 한 형상을 이루고 있었다.

“마나를 사용한 서명은 개개인의 마나 흐름을 그려 넣은 것의 일종으로 다른 마법사는 따라 할 수 없습니다. 마치 지문처럼, 각기 다른 그림을 그려 내는 것이지요.”

무슨 그런 전문적인 소리를! 네가 사기꾼이구나! 그렇지? 그렇지 않고서야 이게 진품일 리가 없잖아!

그럼 뭐야, 황제가 성녀한테 위작을 선물했다고? 그런 모양 빠지는 일이 실제로 일어났단 말이야? 피폐물 남자 주인공의 위엄을 어디까지 떨어뜨리려고 그런 소릴 하는 거야?

“이, 이게 진품이면 황제 폐하께서 가지고 계신 그림은요?”

“그건 아무래도 조사를 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폐하께서 경매에서 세 작품을 모두 구매하신 것으로 아는데, 경매 당시 그림이 바뀌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는 없겠네요.”

말도 안 돼. 그럼 그 바꿔치기한 그림을 모작이라고 생각하고 나한테 팔아먹으려고 했던 거야? 세르지오 이놈도 어지간히 모자란 놈인데?

아, 아니지……. 어쩌면 이 그림이 실은 몇 푼 안 하는 그림일 수도 있잖아? 아무리 렘피토가 어쩌고 해도 이 나라에선 그림의 가치가 그리 높지 않을 수도 있어.

난 마지막 남은 희망을 끌어안으며 알버트에게 물었다.

“저, 그럼 이 그림의 가치는 얼마 정도…….”

“대략 6~7만 골드 사이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아무래도 워낙 유명한 그림이다 보니 실제 시장에 나오면 그것보다 더 비싸게 거래될 수도 있습니다.”

“……네?”

아니 사기꾼이 나한테 1만 골드라고 그랬는데? 7만이라고?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역시 네놈이 사기꾼인 거 아니야?

“……그대의 말이 맞았군. 그대의 친구는……, 제대로 된 그림을 팔았나 보군. 의심한 걸 사과하지.”

아니야! 사과하지 말라고. 내가 바라는 건 그런 게 아니야.

“그, 그렇지만요, 공작님? 제가 도자기랑 해바라기 그림을 바꾼 건 사실이잖아요. 그 두 작품도 분명 비싸고 소중한 물건이지 않았을까요……?”

“아, 소중하긴 소중한 물건이지.”

일리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가치로 따질 수 없는 소중한 물건이 있기 마련이지. 일리온한테 어디 돈이 대수겠어? 나는 노선을 바꾸어 일리온의 감성적인 부분을 열심히 건드렸다.

“그렇죠? 그런 소중한 물건이랑 바꾸었으니 제가 잘못한…….”

“항아리는 모작이야. 진품은 창고에 있지. 저택에 전시해 뒀다가 깨진 미술품이 많아, 조부께서 일부러 모작을 만들어 두셨어.”

“……네?”

아, 뒷골. 맞지도 않은 뒤통수가 아려 오는 기분이었다. 세르지오 이놈 말만 번지르르했지 자기도 미술품 볼 줄 모르는 놈이었잖아?

“그, 그럼 해바라기 그림은?”

“아, 그건 세상에서 단 한 개밖에 없는 작품이긴 하지. 세상에 공개된 적이 없기도 하고.”

역시!

“조모의 유작이네.”

“…….”

뭐지, 이거. 기뻐하긴 기뻐해야 하는데 갑자기 내 안의 유교 사상이 날뛰고 있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할머니의 유작을 팔아먹었으니……, 이거 죽을죄를 지은 거 맞지?

“공작님, 전 그것도 모르고!”

“그러니 그대가 찾아와야겠어.”

“예?”

“그대가 잃어버린 거니, 그대가 찾아와야 하지 않겠어?”

“혹시 그림을 못 찾아오면…….”

이 저택에서 쫓겨날 수 있을까 하는 한 가닥 희망을 품고 물었다.

일리온은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잘못을 묻지는 않을 거야. 그대도 해바라기 그림이 그 정도의 가치가 있는 물건인 줄은 몰랐겠지. 뭐, 평생이 걸려서라도 되찾아 오면 되는 거 아니겠나?”

일리온은 그렇게 말하며 입술을 말아 올렸다.

“하하, 그렇죠. 제가 어디 도망갈 건 아니니까요. 펴, 평생 걸려서 찾아오면 되죠. 호호……. 호.”

난 울고 싶은 걸 참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당장 그림을 찾아오기 위해서.

***

옷자락을 휘날리며 사라진 라벤느를 뒤로하고 일리온은 응접실에서 차분히 차를 마셨다.

정말이지, 잠시라도 눈을 떼면 저렇게 사고를 치고 다니니 눈을 뗄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오늘 아침만 해도 그랬다.

“얼마나 만났다고 처음 만난 남자를 그렇게 신뢰하는 건지.”

일리온은 저택의 그림을 팔아 치운 것보다 그게 더 못마땅한지 미간을 찌푸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물론 라벤느의 말대로 그 그림은 진품이었고, 세르지오가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라벤느의 그 태도는 맘에 안 들었다.

“그보다, 세르지오라는 자에 대해선 알아봤나?”

일리온은 세바스찬에게 물었다.

“가명인 듯합니다. 어딜 뒤져도 세르지오라는 남작은 찾지 못했습니다.”

“그때 타고 왔던 마차, 데리고 왔던 하인을 추적해 봐. 최근에 해바라기 그림이랑, 아리하의 꽃병이 암시장에 나온 적은 없는지 확인해 보고.”

“알겠습니다. 그런데 주인님…….”

세바스찬은 넌지시 물었다.

“아까 잠깐 얘기를 들었습니다만, 해바라기 그림이라면 창고에 많지 않습니까? 너무 그러지 마시고 아가씨를 용서해 주시지요.”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지 않나.”

“그야 물론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긴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창고에 있는 10종류의 각기 다른 해바라기 그림 역시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그림이어야 했다.

공작의 조모는 그림 그리는 실력이 뛰어나지는 않았으나 취미 삼아 그림을 종종 그리곤 했고, 그녀의 가장 큰 팬은 남편인 선대 공작이었다.

그는 그녀의 그림을 액자에 걸어 공작저 이곳저곳에 장식해 두었는데, 그러고도 더 이상 걸 벽이 없어 몇십 점이 창고에 그대로 보관 중이었다.

해바라기도 그중 하나였다.

“정말로 아가씨께 그림을 찾아오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공작은 턱을 괴고 고민했다. 조모의 그림을 뺏긴 건 안타까웠지만, 굳이 사람을 동원해 되찾을 필요는 없었다.

비슷한 그림이라면 세바스찬의 말대로 창고에 수두룩하고, 그 그림에 어떤 추억이 깃들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굳이 라벤느에게 되찾아 오라고 한 이유는 그녀가 오늘 아침에 보인 태도 때문이었다.

“유치한 질투만큼 보기 힘든 것도 없다고들 하죠.”

생각을 하던 일리온이 눈썹을 들어 올리며 세바스찬을 바라보았다.

“……질투? 뜬금없이 그 얘긴 왜 하는 건가?”

일리온의 얼굴엔 정말로 세바스찬의 의도를 알 수 없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냥 생각이 나서요.”

세바스찬은 등을 돌리고 그저 조용히 한숨만 내쉬었다. 생각보다 갈 길이 멀어 보이는 두 사람이었다.

***

“아가씨, 어딜 또 그리 달려가세요?”

“아, 릴리! 마차, 마차를 준비해 줘.”

“오늘은 또 어디를 가시게요.”

하루 이틀 이런 꼴을 본 게 아닌지, 릴리는 날 말리길 포기하고 용건을 물었다.

“황립 미술관.”

“참, 그러고 보니 그림은 감정이 끝났나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당장 황립 미술관에…….”

“그래서 위작이래요? 진품이래요?”

릴리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얘가 갑자기 왜 이래?

“진품이래.”

“……네? 세상에. 위작이라는 데 걸었는데. 이럴 수가……! 내 점심값…….”

걸어? 뭘……. 야, 너?

“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위작에 건 거야?”

“그, 그야, 아가씨도 보셨잖아요. 세르지오 남작님께서 그렇게 믿을 만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보여서…….”

뭐랄까. 따지고 보면 나도 그걸 위작이라고 생각하고 구매한 건 맞지만 그래도 릴리에게조차 믿음을 받지 못하니 살짝 충격이었다. 이게 다 내 업보인가.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한 건 아닌데 왠지 그것보다 더 슬픈,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복잡 미묘한 마음을 뒤로하고 릴리를 재촉했다.

“암튼, 빨리 나가자. 세르지오 남작을 찾으러 가야 해.”

“그분은 왜요?”

“해바라기 그림 가지러!”

릴리는 날 가만히 바라보더니, 더는 묻지 않고 그냥 한숨을 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가요, 가. 황립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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