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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26)화 (25/159)

26화

머리가 지끈거렸다. 통증은 지진이 이는 것처럼, 큰 고통이 한차례 지나가면 여진이 지속해서 몸을 괴롭혔다. 오늘은 여진마저도 강한 지진처럼 정신을 흔들었다.

애초에 약이 듣는 병이 아니니, 의사가 온대도 할 수 있는 거라곤 진통제와 수면제를 처방하는 것뿐이었다.

진통제는 전혀 효과가 없었고, 고통이 심할 땐 수면제도 소용없었다.

“갈수록 증세가 악화되네요. 검은 반점이 지난번보다 더 커졌습니다.”

“그럼 어떻게…….”

“현재로선 저도 드릴 말씀이……. 죄송합니다.”

뭐라고 하는지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귀도 고장 나 버린 건지 혼자만 물속에 잠긴 것처럼 세상의 소리가 웅웅거렸다.

그러나 들리지 않아도 예상이 가는 얘기였다. 뚜렷한 답이 없는 이야기를 답답하게 나누고 있겠지. 일리온은 눈을 감았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거의 남지 않았지만 어렴풋이 기억하는 거라곤 눈처럼 새하얀 은발 머리 마녀를 죽였다는 사실뿐이었다.

그 대가로 얻은 이 끔찍한 고통은 시도 때도 없이 절 찾아와 괴롭혔다.

차라리 모두 놓아 버리고 그대로 잠겨 버린다면 이 마음이 좀 더 편해질까? 그럴 수만 있다면 모두 놓아 버릴 텐데.

“일리……! 아니, 고, 공작님은 괜찮으세요?”

우당탕하는 발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오더니 노크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이 저택에서 저리 요란하게 문을 열고 들어올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다.

왜 갑자기 웃음이 나올 것 같은지…….

덕분에 긴 상념에서 벗어난 일리온은 눈을 뜨고 소란의 주인을 찾았다.

“많이 아픈 거예요?”

조금 전까지 세상의 모든 소리가 희미했는데, 이상하게도 라벤느의 목소리만큼은 또렷하게 제 귓가를 울렸다.

부드러운 초록색 눈동자와 옅은 베이지색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오더니, 라벤느의 얼굴이 점점 뚜렷해졌다.

걱정스럽게 내려간 눈썹, 그렁그렁한 눈동자, 꾹 다문 입술. 어쩔 줄 모르며 침대 위에 올려 둔 손가락까지.

언제나 제 서재를 멋대로 들어오는 불청객이 오늘따라 싫지 않았다.

낮게 숨만 내쉬던 일리온은 조금만 뻗으면 닿을 것 같은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뻗었다.

한 손에 폭 감길 정도로 작은 손은 움찔거리면서도 자신을 내치지 않았다.

어쩐지 숨통이 트이는 기분에 일리온은 작게 숨을 토해 냈다.

턱 끝까지 집어삼켰던 마음속의 두려움이 점점 사그라들며, 동시에 온몸을 찌르던 고통이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다.

일리온의 숨소리가 점점 규칙을 되찾기 시작했다. 수면제가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한 모양인지,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졌다.

일리온은 라벤느의 말간 얼굴을 몇 번 더 눈에 담으며 천천히 잠에 빠져들어 갔다.

***

“…….”

난 멍하니 내 손을 잡고 잠이 들어 버린 일리온을 바라보았다.

“흠흠, 그럼 저희는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세바스찬이 작게 속삭이며 고개를 숙였다.

자, 잠깐. 날 이렇게 두고 나간다고요? 세바스찬, 잠깐 기다려 봐! 내가 불쌍하지도 않아?

차마 환자를 옆에 두고 소리를 칠 수 없어, 애원하는 눈으로 입술만 벙긋거리며 세바스찬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매정하기 그지없었다.

세르지오 남작을 보내고, 일리온이 쓰러졌다는 소식을 하녀에게 듣고 부랴부랴 달려왔다.

고통의 원인이 뭔지 알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알지만, 아무리 미운 놈이라 해도 아프다고 하니 사람 맘이 또 그렇게 태연하질 못했다.

저주 때문에 발작하듯 아프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 단단하고 커다란 나무가 이렇게 하염없이 휘청일 수 있다는 걸 눈으로 보는 건 또 다른 느낌이었다.

차라리 짜증 나는 얼굴로 날 노려볼 때가 훨씬 나았다.

잠이 든 일리온을 보는 그 짧은 순간에 안타까움, 안쓰러움, 걱정, 무력함 같은 감정이 차례로 휩쓸고 지나갔다.

만약 내가 빙의한 게 성녀였다면…… 그랬더라면 어땠을까.

이미 일어나 버린 일을 가정하는 건 테이블에 굴러다니는 진통제만큼이나 쓸데없는 것이라는 걸 알고 있다.

내가 얼마나 무력한지도 잘 알고 있다. 마치, 그때처럼.

그러나 이번에도 한 번 고개를 든 생각은 자꾸만 내 머릿속을 어지러이 헤집어 놓았다.

***

일리온이 쓰러진 날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그는 아팠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말끔해진 차림으로 나타나 또다시 나를 부려 먹었고, 나는 며칠째 울면서 벌을 빙자한 노역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사이에 황제는 드디어 성녀가 사는 나라를 정복하기 위해 출정에 나섰고, 일리온의 기사단 역시 그 대열에 합류했다.

마석이 매장된 땅의 개발도 조금씩 구체적인 계획이 세워지고 있었다. 일리온의 말로는, 당분간은 물자가 이동할 길을 트는 것부터 시작될 거라 했다.

워낙 외진 곳이라 길을 빙빙 돌아가야 했는데, 그 시간을 줄이기 위해 곳곳에 터널을 뚫을 계획이라며.

그러면서 두툼한 서류를 내게 안겨 주었다. 사업 계획서라나 뭐라나.

내가 그렇게 싫다고, 그 땅 너 가지라고 해도 그 고집불통은 들을 생각조차 안 했다.

이 정도면 날 괴롭히려는 게 분명했다.

너, 이거 해 봐야 소용없어. 넌 이걸로 이익 얻기도 전에 죽을 거라고!

이걸 말해 줄 수도 없고! 혼자 답답한 가슴을 칠 뿐이었다.

그렇게 평온하게 지나가던 어느 날 아침, 드디어 일리온이 응접실의 그림이 바뀐 걸 눈치챘다.

“오늘 보니 응접실의 그림이 바뀌어 있던데……. 그대가 한 건가?”

둔한 건지 관심이 없는 건지. 정말 빨리도 깨달았다. 그의 무심함에 절로 혀를 찼다.

“어머, 보셨나요? 너무 아름다운 그림이죠? 제 친구가 추천해 준 그림인데, 응접실엔 해바라기보다는 그 그림이 더 잘 어울릴 것 같아서 바꾸기로 했답니다.”

“도자기도?”

“네! 그 장미 그림이랑 바꿨어요.”

“누가 멋대로 그래도 된다고 했지?”

“멋대로라니요? 전 앞으로 이 공작가의 안주인이 될 사람이고, 집 안을 꾸미는 건 당연히 제 일이죠. 다음번엔 공작님의 서재와 침실을 바꿔 볼까 생각하고 있어요.”

그렇게 말하자 일리온이 식기를 내려놓고 날 바라보았다.

“리슈펠트, 그 장미 그림이 무슨 그림인지 아나?”

“그럼요. 렘피토가 그린 장미정원 중 세 번째 작품이라고 들었어요. 세 번째 작품이 가장 유명하다면서요?”

“그 작자가 그것만 말해 주던가?”

“작자라니, 말이 심하시네요.”

내가 일부러 뾰로통하게 대답하자 일리온의 눈썹이 살짝 찡그려졌다.

“그 세 작품이 전부 폐하의 소유라는 건 안 가르쳐 주던가?”

소설에서 지나가듯 다룬 그림 작품치고는 이 세계에서 꽤 유명한 그림이었나 보다. 그림엔 별 관심이 없어 보이는 일리온이 알고 있을 정도라면.

게다가 말하는 거로 보아 일리온은 그 작품이 위작인 걸 눈치챈 듯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차분한 태도지?

“혹시, 제 친구가 준 작품이 가짜라는 말씀이신가요?”

“그렇겠지. 진품은 폐하께서 가지고 있으니까.”

“그럴 리가 없어요. 제 소중한 친구가 준 작품인걸요!”

일리온은 내 눈을 직시하며 말했다.

“그 친구는 언제 만났길래 그렇게 믿는 거지?”

“치, 친구를 만난 기간과 신뢰는 다른 문제입니다. 설마, 지금 그분이 제게 일부러 위작을 팔았다고 의심하시는 건가요?”

나는 일부러 말을 더듬으며 일리온을 바라보았다.

“제 친구가 이렇게 욕먹다니, 이건 제 명예까지 욕먹는 일이에요. 감정사를 불러 직접 그림을 감정해 주세요. 그럼 제 말이 맞다는 걸 믿으실 거예요.”

머릿속이 너무 청순한 나머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영애를 완벽하게 연기하며 짐짓 화가 난 표정으로 일리온을 노려보았다.

연기 대상감이군. 내가 이렇게 연기에 소질이 있을 줄 알았으면 전생에 배우를 할 걸 그랬어.

길길이 날뛰는 날 가만히 응시하던 일리온은 굳이 나와 언쟁하는 대신 감정사를 불러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크게 화를 낼 거란 예상과는 다르게 너무도 침착한 반응이어서, 어딘지 모르게 조금 찜찜한 기분이었다.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해도, 약혼녀가 사기를 당해 아끼는 그림을 내다 팔았는데 왜 이렇게 태연해?

아니면 일단 감정받아 볼 때까지는 참겠다는 건가?

일리온의 의중을 알기 힘들어 뇌를 열심히 굴려 보았지만 어쩐지 쇠가 굴러가는 소리만 들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감정사는 그날 오후 방문했다. 한쪽에 외눈 안경을 낀 감정사는 콧수염을 느긋하게 매만지며 응접실로 들어왔다.

그가 곧 도착할 거라는 연락을 받고 미리 응접실에서 대기하던 나는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알버트 자작님.”

“안녕하십니까. 리슈펠트 영애.”

일리온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지만, 하녀가 부르러 갔으니 곧 올 것이다. 기다리는 동안 나는 자작에게 차를 한잔 청했다.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공작님의 요청인데, 만사 제쳐 두고라도 와야지요.”

“오늘 감정을 부탁드릴 그림은 바로 저 그림이랍니다.”

“아……. 렘피토의 장미정원이군요. 영애께는 정말 죄송한 말씀이지만 장미정원 진품 3개를 모두 황제 폐하께서 소유하고 계신 건 아시나요?”

알다마다.

“이 그림은 제 친구가 제게 판 물건이에요. 절대 위조품일 거라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서 감정을 부탁드리려고요.”

알버트 자작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이토록 세상 물정 모를 줄 몰랐다는 한심함과 사기꾼에게 속은 안타까움을 어찌 표현하면 좋을지 모르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걸 말로 표현하는 대신 침묵을 택했다.

차마 곧 공작가의 안주인이 될 사람한테 심한 소리를 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차를 어느 정도 마신 그는 감정하기 위해 그림 쪽으로 다가갔다. 이미 얼굴은 위작이라고 확신하는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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