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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25)화 (24/159)

25화

황립 미술관이라고 해 봐야 별거 없었다. 황제들의 초상화와 함께 황궁이 소유한 미술품을 가끔 귀족을 상대로 전시하는 게 다였으니까.

황제가 소유한 미술품이라 해도 이웃 나라를 정복해서 약탈한 물건이 대부분이었으니, 굳이 말하자면 전리품 자랑용으로 세운 건물이었다.

솔직히 전생의 나도 미술품에는 일가견이 없는지라 봐도 다 거기서 거기로 보일 뿐 특별히 관심이 가는 물건도 없었다.

어차피 처음부터 한가롭게 미술품 구경하자고 여기 온 게 아니었다.

지금 내가 기다리는 건 낚시질이었다.

사지 멀쩡하게 생겨서, 일할 생각은 안 하고 남 등이나 처먹을 궁리만 하는 사기꾼이 던지는 미끼.

지금 내가 기다리는 건 그 미끼였다.

그러나 한참을 서성여도 원하는 낚시꾼이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내가 생각을 잘못했나? 어딘가 나 같은 사람을 등 처먹을 한량이 하나쯤은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세상이 이리 건전해서야…….

아무래도 잘못 짚은 건가 싶어 아예 미술상 쪽으로 노선을 조금 변경하려 할 때 누군가 날 붙잡았다.

“이야, 이거, 리슈펠트 영애 아닙니까?”

설마, 기다리던 낚시꾼? 나는 청순하면서도 약간 순진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날 부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라벤느가 귀엽고 청순한 미인이어서 다행이야. 적당히 웃어도 순진해 보이니.

“저, 누구신지?”

“저는 패트릭 세르지오라고 합니다. 남작이지요.”

“아, 세르지오 남작님. 안녕하세요.”

“유명한 분을 이런 곳에서 뵙게 될 줄 몰랐습니다. 혹시 미술품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잘 차려입은 정장에, 뒤로 깔끔하게 넘긴 머리카락. 비싸 보이는 시계와 넥타이 장식까지. 하나같이 그럴듯해 보이는 귀족이었다.

일단은 그를 조금 탐색해 보기로 했다.

“호호호, 제가 가진 지식이 많지 않으나 미술품 보는 걸 좋아해서요. 보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진달까.”

“그거야말로 미술품을 제대로 보는 거지요. 이렇게 격조 높으신 분일 줄이야. 역시 소문은 믿을 게 못 되나 봅니다.”

이야, 사람 비위 맞춰 주는 것도 아주 수준급일세?

나는 들뜨는 기대를 애써 가라앉히며 남자와 대화를 이어 나갔다.

“미술관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미술품 구경도 하고, 기회가 된다면 공작저에 둘 그림을 구매할 수 있을까 해서요. 마침 전시품 일부는 귀족들에게 판매도 한다 해서.”

“그러시군요. 그러나 그림을 구매하실 거라면 여긴 별로 추천해 드릴 만한 곳이 아닙니다.”

“네?”

내가 어째서냐 묻자 남작이 고개를 숙이며 대단한 비밀이라도 말하는 것처럼 속삭였다.

“수수료가 장난 아니거든요. 꼭 구매하고 싶은 작품이 있는 게 아니라면 제가 아는 미술상을 추천해 드리죠, 어떠십니까?”

“어머, 마침 잘됐네요. 아, 혹시 미술상이라면 작품 구매도 하시나요? 마침 집에 있는 작품들을 몇 개 판매하고, 새로운 그림으로 바꾸고 싶은데.”

내 말에 남작은 맛있는 먹잇감이라도 발견한 듯 눈을 빛냈다.

“그럼, 말 나온 김에 괜찮은 그림 몇 점을 들고 공작저에 한번 방문할까요?”

“그건 너무 수고스러운 일이 아니실지…….”

내가 미안한 표정을 짓자 그가 전혀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나요! 이렇게나 미술품에 조예가 깊은 사람을 만나기란 쉽지 않죠. 기꺼이 찾아뵙겠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차분히 차 한잔하며 작품에 관한 대화도 나누고 싶고요.”

물론 전혀 수고스럽지 않겠지. 정말이지 말 하나는 번지르르했다.

“그렇게 해 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겠네요.”

그래요. 우리, 어디 한번 일리온을 화나게 할 좋은 동지가 돼 봅시다.

***

“아가씨께서 손님을 초대하셨더군요.”

“그래, 안 그래도 어제 찾아와서 말하더군.”

집에 와서 손님을 초대했다며, 다음 날 일을 줄여 줄 것을 당당하게 요구하던 라벤느였다. 일이 아니라 벌을 받고 있다는 걸 좀 자각하면 좋으련만.

그러나 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기에 승낙했는데…….

“세르지오 남작이라고 하시더군요.”

일리온의 눈썹이 살짝 들렸다.

“……세르지오? 처음 듣는 이름이군. 하긴, 개나 소나 할 것 없이 작위 하나씩 달고 귀족 노릇을 하는 세상인데.”

“안 가 보셔도 되겠습니까?”

“내가 왜?”

자신과 전혀 상관없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물론 그런 반응을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지만.

“그러고 보니 오늘은 아가씨께서 공작님을 찾지 않으셨네요. 매일 한 번씩 인사하러 오시더니.”

“갑자기 그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뭐지?”

일리온은 짐짓 관심 없다는 투로 서류를 넘기며 물었다.

“그냥, 그렇다는 말이지요. 별 뜻은 없습니다.”

‘능구렁이가 따로 없군.’

일리온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저 멀리서 마차 한 대가 들어오고 있었다. 세르지오 남작이라. 어지간하면 한 번 들은 건 안 잊어버리는 성격이었고, 귀족들의 신상은 어느 정도 숙지하고 있었다.

물론 지방의 준 귀족까지는 다 기억하지 못하지만, 남작, 자작까지는 이름을 다 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에 없는 이름이었다.

‘안 가겠다고 하긴 했지만……, 가 보는 편이 좋으려나. 집에 초대할 정도면, 중요한 손님인 모양인데…….’

결국 내린 결론이 썩 탐탁지는 않았으나 집에 온 손님을 그냥 보내는 것도 아닌 것 같다며 애써 합리화를 하는 일리온이었다.

한편으로는 세바스찬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고민 끝에 결국 세르지오를 보러 가기로 한 일리온은 몸을 돌렸다.

그 순간, 한동안 잠잠하던 고통이 밀려들었다.

사지가 불에 타는 것 같은 고통은 소리조차 지를 수 없을 정도로 끔찍했다.

무너지는 몸을 책상에 기대며, 일리온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나 숨은 점점 막혀 갔고, 눈앞은 아득해졌다.

결국 몸을 지탱하던 힘이 풀리며, 일리온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

장담하건대 그가 사기꾼이라는 데 오늘 저녁을 걸 수 있었다.

세르지오 남작, 아니 사기꾼과의 약속은 빨랐다. 그는 어서 빨리 내 등을 처먹고 싶었던 모양인지, 다음 날 공작저를 찾아오겠다고 했으니까.

마차에서 내린 그는 수도에서 보기 힘든 으리으리한 저택을 보고 무척 놀라워했다.

“이야, 역시 셀레스타인 공작가는 다르네요. 정원도 정갈하고, 마치 하나의 예술품 같습니다.”

“그렇지요? 저도 처음에 보고 너무 아름다워 넋을 잃었답니다.”

맘에도 없는 말로 적당히 그의 말에 맞장구를 쳐 준 후, 나는 그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남작은 하인을 시켜 가져온 그림을 캔버스에 세워 응접실에 전시했다. 그의 말이 거짓은 아니었던 모양인지 그가 준비해 온 것은 상당히 아름다운 그림들이었다.

그는 앉아서 그 그림들에 대해 잘난 체하듯 떠들었다. 가만히 그의 말을 들으며 그림을 구경하다 내 시선이 한곳에 고정되었다.

“이 장미는…….”

“정말 아름다운 장미꽃 그림이지요? 화가 렘피토의 작품입니다. 장미정원 시리즈 중 하나지요. 혹시 장미정원 시리즈가 몇 개나 있는지 아시나요?”

알다마다.

저 장미정원 시리즈는 황제가 배틀 로얄에서 살아남은 성녀에게 선물한 그림이었다.

방금 장미정원에서 사람 하나를 죽이고 온 성녀에게, 붉은 장미꽃 그림을 선물하는 모습은 사이코 그 자체였다.

성녀는 장미 그림에서 자신이 죽인 사람을 떠올리며 죄책감에 괴로워했고 황제는 그걸 보며 즐거워했다.

미친놈들의 사고방식은 범인이 감히 추측하기 힘든 것이었다.

“글쎄요.”

짐짓 모르는 척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하자 그가 손가락을 펴며 얘기했다.

“총 세 개가 있답니다. 이건 그중에서도 가장 아름답다고 평가되는 세 번째 작품이지요.”

그래, 그 세 개는 모두 황제가 소유하고 있지. 그런데 그게 왜 너한테 있을까?

나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 속아 주기로 했다.

“정말 아름답네요. 그림을 보고 이렇게 감동하기는 처음이에요. 꽃잎 하나하나에 깃든 붓 터치에서 화가의 정성이 느껴져요.”

“역시, 알아보시는군요!”

그럴듯한 감상을 늘어놓으며 장미정원에 관심이 있다는 어필을 열심히 하였다.

“혹시 이 그림은 얼마인가요?”

“이게 워낙에 고가인지라…….”

남작이 뒷말을 쓱 흐렸다.

“얼마인데요?”

“1만 골드 정도 합니다.”

“어머나, 생각보다 비싸네요.”

나는 가격을 듣고 놀란 척 눈을 깜박였다. 그래 그게 진품이라면 그 정도는 하겠지. 그러나 내가 가진 이 세계의 지식과 그의 현란한 말솜씨로 추측건대 이 작품은 높은 확률로 모작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모작을 1만 골드에 구매하면 일리온도 이번엔 눈 하나는 깜빡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음, 지금 당장 그만한 돈은 없고, 혹시 저기 놓인 화병과 교환은 안 될까요? 공작님께 물어봤는데 저 화병도 꽤 비싼 거라고 들었거든요.”

“화병이요?”

내가 가리킨 곳에 있는 화병을 보며 남작이 눈을 빛냈다.

“오, 이거 장인 아리하 님의 화병 아닙니까? 이정도면 한 5천 골드 정도 되겠네요.”

“가격이 좀 모자라네요.”

“화병에, 저쪽 벽에 걸린 그림을 더한다면 얼추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반대편에 걸린 그림을 가리키며 말했다.

“벽에 걸린 그림이요?”

해바라기 그림이었는데, 역시나 그림을 모르는 내가 보기엔 장미정원 그림과 별반 차이 없어 보이는 그림이었다.

저건 얼마지? 세바스찬한테 못 물어봤는데. 뭐, 얼마면 어때? 비싸면 더 좋고.

“물론 그림의 희소성에 비하면 제가 좀 손해 보는 거지만 영애를 위한 것이니 이 정도는 해 드려야죠.”

“남작님께서 그런 좋은 조건에 물건을 주신다니, 거절할 이유가 없네요.”

싱긋 웃으며 남작을 바라보았다. 남작의 입가에 호구 하나 잡았다는 미소가 걸렸다. 그 등 처먹는 솜씨, 아주 마음에 들어.

나는 엄지를 치켜세우고 싶은 걸 참으며 그와의 대화를 이어 나가려 했지만, 그는 제 볼일이 끝난 모양인지 거래하기로 한 순간부터 갑자기 바쁜 척을 해 대기 시작했다.

그래. 물건 가지고 얼른 여길 뜨고 싶겠지. 네가 사기 친 상대는 다름 아닌 셀레스타인 공작가니까.

그로선 될 수 있는 한 공작과 마주치지 않고 여길 떠나고 싶을 것이다.

나도, 굳이 일리온에게 보여 줄 생각이 없기에 그의 마음을 헤아려 빠르게 배웅을 해 주었다.

그를 돌려보내고 나는 해바라기 그림이 있던 자리에 장미정원 그림을 걸어 놓았다.

부디 일리온이 이 그림을 빨리 발견해 주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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