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왜 공작의 부탁을 거절한 거야? 잘만하면 영지에도 도움이 될 텐데?”
테이블에 놓인 카드를 정리하는 피오르에게 친구가 물었다.
“구설수가 너무 많아. 그런 사람이랑 엮여서 좋은 꼴을 못 봤어.”
“하긴, 그렇지.”
“아무리 소문이 사그라들었다 해도, 서자라는 꼬리표는 사라지지 않으니까.”
“게다가, 필요하다고 찾아 놓고 필요 없어지면 버릴지 누가 알아? 괜히 줄 잘못 탈 바엔 그 줄 안 잡고 말지.”
친구들은 피오르의 결정이 옳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난 너처럼 운 없는 사람 또 있을 줄은 몰랐어.”
“아, 그 영애? 하긴, 난 당연히 피오르가 질 줄 알았는데.”
두 사람은 키득거리며 피오르를 바라보았다.
“너네 너무한 거 아니야? 나에 대한 믿음이 그렇게 없냐?”
피오르의 질문에 두 사람은 무슨 그런 당연한 걸 묻냐는 듯 바라보았다.
“이것들이…….”
“그런데, 정말로 네가 졌으면 어쩔 뻔했어?”
“그래. 졌으면 약속 들어줬을 거야?”
두 사람의 질문에 피오르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되물었다.
“내가 질 리가 없잖아?”
“와, 소름 돋는다. 진짜 자기가 질 거라고는 생각 안 했나 봐.”
피오르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마저 카드를 정리했다.
“내가 아무리 운이 나쁘다 해도 세상 물정 모르는 영애한테 지기야 하겠어?”
이런 게임은 운도 운이지만, 그 외의 것도 중요한 게임이었다. 예를 들면 표정이라던가.
라벤느는 자신의 예상대로 표정에 생각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사람이었다. 그런 초짜를 상대로 카드놀이에 이골이 난 자신이 질 리가 없지 않은가?
다만 생각보다 시간이 걸린 건, 이상하게도 조커를 고를 때마다 라벤느의 얼굴에서 기대감을 읽었기 때문이다.
그것만 아니었어도 좀 더 빨리 끝났을 텐데.
“뭐, 너희 말대로 그 영애도 운이 나쁘긴 했지만.”
어떻게 그렇게 조커만 골라서 뽑는지. 덕분에 이기긴 했지만.
혼잣말을 하며 라벤느가 앉았던 자리에 놓인 카드를 들어 올리던 그는 문득 카드의 표면이 어딘가 이상한 걸 발견했다.
자세히 살펴보니, 모서리가 미세하게 패여 있었다.
한참을 심각한 표정으로 카드를 살피던 피오르는 실소를 터트렸다.
“……하하하. 그렇군. 선입견이라…….”
***
일리온의 일을 방해했다는 뿌듯함은 얼마 가지 않았다.
만 하루가 채 가기도 전에 후작으로부터 서신이 한 장 도착했으니까.
이미 한 번 거절해 놓고 이제 와서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서신을 보냈나 싶어 옆을 기웃거렸다.
‘공작님의 제안에 감사드리며, 다시 한번 재고해 보기로…… 영지를 제공해 드리기로 결정…… 앞으로의 관계에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눈에 들어오는 문장 몇 개만 읽어 보았지만 서신의 내용은 하나였다.
제안을 승낙하겠다는 것.
“정말, 슈테란 후작가에서 온 건가요?”
“네. 오늘 아침에 도착했습니다.”
“누가 장난치는 건 아닐까요?”
“여기 이렇게 슈테란가의 인장이 찍혀 있습니다.”
“…….”
세바스찬은 내게 보란 듯이 인장을 보여 주었다.
내가 그걸 몰라서 물어보는 게 아니에요, 세바스찬!
이게 진짜인가 싶어서 묻는 거라구요!
“아무래도 후작이 그대와의 내기에서 큰 깨달음을 얻은 모양이군.”
그렇게 말하며 일리온은 서신의 중간을 가리켰다.
[리슈펠트 양에게는 따로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설마하니 속임수를 써 가며 내기에서 지려고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아마도 제게 큰 깨달음을 주시려고 그러셨던 것 같습니다.
덕분에 선입견이라는 게 얼마나 위험한 건지 깨달았으니까요. 정말 감사합니다.]
대체 어떻게 해야 이런 결론이 나는 거지?
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편지를 바라보았다.
내 속임수를 알아챈 모양인데, 선입견은 무슨 소리며 깨달음은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구구절절 이해할 수 없는 글을 읽고 있자니 눈물이 핑 돌 것 같았다.
“뒷장은요?”
“?”
일리온이 날 바라보았다.
“뒷장도 보여 주세요.”
왜 결론이 이렇게 났는지 좀 더 설명이 필요하다고!
그러나 일리온은 편지를 한쪽으로 치워 버렸다.
“내게 온 서신을 어디까지 읽으려는 건가?”
어제 했던 말이랑 다르잖아? 광산의 소유주니 어쩌니 했으면서!
물론 뒷 내용을 본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겠지만.
“이만 가서 일하게. 오늘 안에 끝내야 할 게 많지 않나?”
속에서 불이 나는데 기름을 붓는구나, 그래.
그리고 그날 저녁, 문득 사건이 해결된 것이 내 덕분이라는 걸 깨달은 난 어째서 일리온에게 포상 휴가를 요구하지 않았는지, 이불을 차며 후회했다.
***
일리온의 일을 도운 지도 일주일이 넘었다. 요 일주일간 깨달은 건 일리온은 벌이라는 명목으로 날 저택에 잡아 두려는 속셈이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결국, 그가 의도한 대로 난 밖엘 나갈 수가 없었고, 사고를 칠 수도 없었다.
뇌가 청순한 영애에 빙의해 쓸데없는 소리를 늘어놓는 것도 한계였다. 한두 시간도 아니고 종일 몇 시간이고 붙어 있는데, 입에서 단내가 날 지경이었다.
게다가 일리온은 내 그 태도에 어느 정도 내성이 생겼는지 이젠 눈도 꿈쩍 안 했다.
일주일 전만 해도 그렇게 싫어하더니, 이젠 받아치는 여유까지 보여 주었다.
사람이란 역시 적응의 동물이었다.
응접실 소파에 앉아서 오전의 티타임을 즐기며 막막한 미래에 한숨을 내쉬는데, 마침 릴리가 내 기사가 실렸다며 신문을 건네줬다.
[차기 공작 부인 리슈펠트 영애, 카지노의 비리를 잡다!]
신문 1면에 대서특필된 기사를 읽다가, 어처구니가 없어 혀를 찼다.
일리온이 이미 손을 쓴 모양인지 그날의 사건은 내가 카지노의 비리를 파헤치기 위해 잠복 수사를 했던 일로 바뀌어 있었다.
이야, 이 정도면 노벨 문학상을 타야 할 정돈데? 아주 처음부터 끝까지 소설이네?
기사엔 내가 얼마나 용기 있고 대단한 일을 했는지에 대한 칭찬 일색으로, 카지노를 즐기러 갔던 철부지 영애는 온데간데없이 세기의 영웅만이 존재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셀레스타인 공작 부인, 마석이 매장된 땅을 매입하다!]
‘땅을 팔았던 부동산에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영애라 생각해 주변 시세에 10배에 이르는 가격으로 땅을 팔아 치웠으나, 숨겨진 가치는 200배! 공작 부인의 뛰어난 안목이 빛을 발하였다. 부동산 주인이 땅을 치고 후회했다는 후문이…….’
이건 또 언제 기사를 낸 거람?
심지어 셀레스타인 상단의 투자가 결정됐다며 광고까지 내 버렸다.
게다가, 제목이 이게 뭐야?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왜 너희들 멋대로 공작 부인을 만들어? 우리 아직 약혼밖에 안 했다고!
내용만 따지고 보면 아예 없는 사실을 만들어 낸 것도 아니었지만, 어쩐지 일리온의 손에서 놀아난 것 같은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래서야, 일리온의 명성을 깎기는커녕 오히려 명예만 드높여 주는 꼴이었다.
안 되겠어. 빨리 무슨 조치를 취해야겠어.
신문을 접어 두고 이번엔 뭐로 일리온을 열 받게 만들지 고민하던 내게 마침 응접실 한쪽에 장식된 도자기가 하나가 포착됐다.
아름다운 꽃이 그려진 푸른색 도자기였다.
“릴리, 저거 비쌀까?”
“그야 비싸겠죠. 공작저에 있는 물건인걸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던 릴리는 이 인간이 또 무슨 짓을 저지르려고 물어보나 하는 미심쩍은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릴리의 눈치는 왜 이럴 때만 좋은 걸까? 나랑 일리온의 일은 하나도 못 맞추는데.
“그래? 우리 미술품을 좀 구경하러 가자.”
“예? 갑자기요?”
“응, 미술품이라면 황립 미술관이 좋겠지?”
릴리의 표정이 눈에 띄게 안 좋았다. 내가 어디 가자고만 하면 사고를 일으켜 대니 벌써 불안한 모양이었다.
“앞으로 공작 부인이 될 텐데, 미술품에 대한 지식이 하나도 없어서야 되겠어? 이참에 공부도 좀 하고 오자.”
황립 미술관이다. 카지노랑은 비할 바가 아닌 건전한 장소 아닌가? 내가 그럴듯한 이유를 대니 릴리가 겨우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오늘은 공작님 서재에 안 가세요?”
“응. 오늘은 쉬는 날이야! 지난번 가드너 백작 일로 황성에 가셨거든.”
그래서 오늘 이렇게 여유로운 거 아니겠니. 그리고 이런 날을 그냥 보낼 수는 없지. 나는 반드시 한 건 해내겠다는 일념으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
“뭐, 구린 구석이 어디 하나는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주 대놓고 저지르고 있었군.”
이오니아 제국의 황제, 클라우스 디오르 이오니아는 평소의 나른한 얼굴로 일리온을 내려다보았다.
가드너가 그런 사람인 줄 모르고 허가권을 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알고 준 것이었다.
어차피 카지노란 게 귀족들 돈이 들어오는 곳인데, 영지를 착취해 번 돈을 부정한 방법으로 벌어들인다고 해서 무슨 문제란 말인가.
어차피 그놈이 그놈이고 그 돈이 그 돈인데. 알면서도 묵인했던 일을 이 고지식한 공작은 그걸 또 제게 들고 와 백작의 처벌을 요청했다.
“어떻게 처벌할까요?”
“마침 황성 감옥에 빈자리가 많던데……, 일단 넣어 둬. 추수제에 한 번에 처리하지.”
“알겠습니다.”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차린 일리온은 고개를 숙였다.
“마침 경이 온 김에 이번 출정에 대해서 할 얘기가 있는데.”
“벨리온 건 말씀입니까?”
“그래. 작은 나라 주제에, 무역로 정중앙이라서 영 거슬린단 말이지. 매년 꼬박꼬박 통행료를 바치는 것도 짜증 나고. 이번엔 그 비용을 올리겠다 하길래 병사들을 대동해 밀어 버릴 생각이네.”
또 황제의 정복 병이 도진 모양이었다. 요 몇 달은 잠잠하다 싶었는데.
“……예, 알겠습니다. 그럼 출정 준비를…….”
“아, 아냐. 공작이 나설 것까진 없네. 어차피 한낱 마을보다도 작은 나라인걸.”
“그렇다면 어찌…….”
“황궁 기사단으로도 충분하리라 생각하지만, 만일을 위해 그대 휘하에 있는 새벽과 광휘의 기사단을 빌려주었으면 해.”
새벽과 광휘라면 일리온 휘하에 있는 기사단 중에서도 1, 2위를 앞다툴 정도로 능력 있는 이들이었다. 황제의 땅따먹기 놀이에 쓰이기엔 아까운 기사단이었지만, 불만을 표할 수는 없었다. 일리온은 고개를 숙였다.
“출정에 맞춰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참, 그러고 보니 그대의 약혼녀가 요즘 세간에 난리더군. 라벤더, 아니 라벨리였나? 이번에 가드너를 잡은 것도 그녀의 공이라지?”
“라벤느 리슈펠트입니다.”
“그래, 라벤느. 내가 사람 이름을 잘 못 외워서 말이야.”
푸른색 눈동자가 보기 좋게 휘어졌다.
“언제 한번 보고 싶군. 한낱 몰락한 백작가에 그 정도로 수완이 뛰어난 여식이 있다니. 미리 알았더라면 내가 데려왔을 텐데 아쉬워.”
생각지도 못한 클라우스의 관심에 일리온의 몸이 움찔했다. 황제의 이런 화법은 익숙했다.
아랫사람을 떠보기 위해 일부러 거슬리는 말을 내뱉어 상대를 도발해 실수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물론 그런 이유도 있겠지만, 일리온은 본래 그의 성정 때문도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성격이 썩 좋은 인간은 아니었다.
그걸 알기에 대체로 황제와 관련된 모든 일에 감정을 배제하기 위해 노력했다. 상대해 봐야 자신만 피곤해졌으니까.
“그저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그러니 이번에도 클라우스의 도발을 그저 흘려 넘길 생각이었다.
하지만, 일리온의 미묘한 감정 변화를 느낀 클라우스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미소 지었다. 제가 무슨 도발을 하든 눈 하나 깜빡 안 하던 공작이 반응을 보이는 여자라.
더욱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