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후작님께서 좀 늦으시네요.”
후작가의 응접실. 집사가 우리를 안내하고 돌아간 뒤로 30분이 지났지만 후작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언제 오실까요.”
가만히 앉아 있자 좀이 쑤시는 기분이었다.
“우릴 만나고 싶지 않은 모양이군.”
혹시나 했는데, 역시 대놓고 무시하고 있었구나. 사이가 안 좋다는 말은 농담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30분만 더 기다려 보지.”
그런다고 올까?
후작이 만나는 것도 싫다는데, 무슨 수로 마음을 돌리겠어. 이게 다, 업보라고 생각해야지.
조용히 돌아가는 시계를 바라보다 결국 못 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안에서도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는 말은 틀림이 없었다.
화장실을 다녀오겠다고 나왔다 길을 잃고 말았으니까. 일리온의 저택에서나 하던 걸 여기서도 하고 있네.
왜 이렇게 저택을 미로같이 지었는지.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물어볼까 하다, 왁자지껄한 웃음소리에 발걸음을 멈췄다.
“하하하. 역시 자네는 도박에 재주가 없구만.”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다가가 보니, 활짝 열린 방 안에서 젊은 남자 몇 명이 모여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다.
후작가에 있는 젊은 남자면, 후작의 아들인가?
“누구세요?”
남자 중 한 명이 날 발견하고 물었다.
“어라,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순식간에 세 남자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그리고 그중 붉은 머리의 남자가 날 보며 잊고 있던 게 떠올랐다는 듯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 그러고 보니, 셀레스타인 공작이 온다고 했었지?”
“공작님이?”
“야, 너 여기서 이러고 있어도 돼?”
주변 사람들은 붉은 머리의 사내에게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러나 사내는 개의치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그리곤 방긋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영애. 전 피오르 슈테란이라고 합니다.”
슈테란의 성을 사용하는 걸 보니 후작의 아들인 모양이었다. 난 서둘러 고개를 숙이고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전 라벤느 리슈펠트입니다.”
“그보다 여기서 뭐 하고 계십니까?”
“아, 그게……. 길을 잃어서요. 혹시 응접실이 어느 쪽인지 알려 주실 수 있나요?”
“응접실이라면 저쪽이에요.”
“감사합니다.”
감사 인사를 건네고 가리킨 방향으로 향하려는데 그가 날 붙잡는다.
“저기, 영애.”
“네?”
“후작님을 보러 온 거 아닌가요?”
“네, 맞는데요?”
그는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저, 후작님은 만나셨나요?”
“실은 아직 못 만났어요.”
“……네?”
“많이 바쁘신 모양이에요.”
내 표정에 남자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죠. 후작님께서는 많이 바쁘시죠. 그런데 왜 만나러 오셨어요?”
“물자 수송로에 대해 상의드리려고요.”
“그건 거절했던 걸로 아는데.”
그러게나 말입니다. 사람이 포기도 할 줄 알아야 하는데.
“그래도 다시 제안을 드려 보려고요.”
“후작님 성격에 한 번 안 된다고 한 건, 안 될 텐데요.”
그거 참 맘에 드는 성격이시네.
“그렇군요. 조언 감사드립니다.”
난 생글생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피오르는 그런 날 바라보더니 빙긋 웃었다.
“이왕 오신 거, 잠시 놀다 가실래요?”
“네?”
“어차피 응접실로 돌아가도 할 것도 없잖아요?”
“하지만, 후작님께서 언제 오실지 모르는데.”
“그건 걱정 말아요. 후작님은 많이 늦으실 테니.”
그의 말대로 응접실에 돌아가도 할 건 없었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같이 놀 이유도 없었다.
일리온 핑계라도 대고 빠져나가야 하나. 난처한 표정으로 고민하는데, 그가 한 가지 제안을 건넸다.
“그럼 이건 어떤가요? 저랑 게임에서 이기시면, 오늘 하러 오신 부탁을 들어드리죠.”
“네? 그런 걸 저희끼리 멋대로 정해도 되나요?”
“후작님은 절 많이 아끼시거든요. 제 부탁이라면 뭐든 들어주시죠.”
피오르의 표정은 자신만만했다.
금지옥엽이라 이건가. 그렇다 할지라도, 별로 구미가 당기는 제안은 아니었다.
애초에 후작을 설득할 마음이 없으니까.
“만약 제가 지면요.”
그래도 예의상 내가 지게 될 리스크를 물어보았다.
“앞으로 이 건으로 저를……, 아니, 후작님을 찾아오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시면 됩니다.”
무엇이 더 이득일지 고민하는데, 피오르가 다시금 날 부추겼다.
“나쁜 제안은 아니잖아요? 어차피 언제 올지 모를 후작님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은데?”
맞는 말이었다. 언제 올지도 모를 후작을 기다리는 것보다, 좀 더 확실히 일리온을 열받게 만들 수 있을 테니까.
“그렇네요. 나쁘지 않은 제안이에요.”
***
제안을 받아들인 건 좋았지만, 문제는 상대가 옆에서 말릴 정도로 도박에 소질이 없는 사람이라는 거였다.
대체 뭘 믿고 나와의 게임에서 이길 거라 장담하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매번 지기만 하는 놈이 갑자기 무슨 게임이야?”
“걱정 마. 내가 초보를 상대로 지겠어?”
“뒷감당은 어떻게 하려고?”
친구가 걱정스럽게 되물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가 운이 나쁠지라도,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게임의 룰도 모르는 내가 이길 확률은 낮았다.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건, 요즘 내 운이 이상하리만치 좋다는 것이다.
덕분에 뜻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그리고 이럴 때일수록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야지.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네?”
“저는 여러분이 말씀하시는 게임의 룰을 모르는걸요. 그러니 불공평하다고 생각합니다.”
내 지적에 피오르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럼 하지 말까요?”
“아뇨. 게임은 해야죠.”
나는 트럼프 카드를 쥐며 말했다.
“대신, 여러분들이 하는 카드놀이가 아닌 제가 제안하는 놀이로 하는 건 어때요?”
세 사람은 고개를 갸웃하며 날 바라보았다.
“도둑잡기요. 어린애들도 할 수 있는 쉬운 놀이죠.”
그렇게 말하며, 카드 안에서 조커를 빼 들었다.
“옆 사람과 카드를 교환해 가며 똑같은 숫자의 카드를 모으는 게임이에요. 마지막에 조커를 들고 있는 사람이 지는 거죠.”
“간단하네요.”
“그렇죠? 그럼 이걸로 하실래요?”
내 제안에 피오르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게임은 다른 의미로 치열했다.
한 장뿐인 조커 카드를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느라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으니까.
“으아아……. 또 조커잖아.”
피오르는 또다시 내게서 조커 카드를 뽑아 들고, 울상을 지었다. 운이 얼마나 나쁜 건지.
덕분에 난 혼신의 연기를 하며 그의 손에서 다시 조커 카드를 가져와야만 했다.
연기도 한두 번이지. 들킬까 봐 조마조마하다고.
다시 조커 카드를 되찾아 온 난 울상을 지어 보였다.
“영애도 운이 어지간히 나쁘네요.”
댁이 할 말이 아닐 텐데. 네가 제대로 하면 내가 이 하찮은 연기를 계속 할 일이 없을 텐데 말이야. 응?
“그러게요. 자꾸만 꽝을 뽑네요.”
난 어색하게 웃으며, 카드 두 장을 섞어 피오르에게 내밀었다.
매번 조커를 뽑아 오는 건 간단했다. 아까 카드를 섞기 전에, 카드 모서리 상단에 손톱으로 살짝 표시를 해 두었으니까.
겉으로는 보이지 않겠지만 만지면 모서리가 살짝 눌린 게 느껴질 정도의 표시였다.
이 정도로 조커만 뽑아 대면 한 번쯤 의심할 법도 하건만, 주변 사람들은 내가 지기 위해 필사적일 거라곤 꿈에도 생각 못 하는 듯했다.
그저 운이 나쁘다고만 여길 뿐.
“…….”
피오르는 다시 한번 카드를 뽑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가 뽑은 게 조커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세기의 대결이네.”
“여기서 이겨도 기쁘지 않을 것 같은데.”
우리의 대결을 한심하게 보고 있는 두 사람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정말로, 세상에서 가장 약한 방패와 가장 무딘 창의 싸움이었다.
“그보다, 영애. 셀레스타인 공작님은 어떤 분인가요?”
피오르는 카드 두 장을 잘 섞어 내게 내밀며 물었다. 끝없이 반복되는 공방에 지루한 모양이었다.
“그냥, 평범한 분이세요.”
“평범?”
내 대답에 피오르는 웃음을 터트렸다.
“공작님께는 안 어울리는 단어 같은데요.”
“왜요?”
“그야, 다들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라고 하니까요.”
왜 다들 일리온을 그렇게 말하는 걸까. 실제로 겪어 보면 소문과 많이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을 텐데.
일리온을 변호할 의무는 없었지만, 내 입은 멋대로 피오르의 말을 부정했다.
“감정 표현이 서툰 것뿐이지, 찌르면 아프고 피 나는 건 똑같아요.”
“그건 영애가 공작님의 연인이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시는 거 아닐까요?”
안타깝게도 일리온과 연인이었던 적이 없어서 말이야.
난 그의 손에서 다시 한번 조커를 뽑아 들었고, 피오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보면 선입견이라는 게 참 무서워요. 손쉽게 누군가를 정의 내리면서, 이미 그 사람에 대해 다 알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들거든요.”
난 카드를 섞어 피오르에게 내밀었다.
“기껏해야 일 년에 한두 번 공작님을 볼까 말까 하는 그 사람들의 말이 더 정확할까요, 아니면 24시간 붙어 있는 제 말이 더 정확할까요?”
내 질문에 피오르는 자신의 말실수를 깨달은 모양이었다.
“기분 나쁘게 만들 생각은 없었습니다. 물론 영애의 말이 좀 더 정확하겠죠.”
피오르는 내 말에 수긍하며 카드를 한 장 뽑았다.
“아니요. 사실 이런 건 직접 경험하는 게 제일 정확하답니다.”
난 빙긋 웃으며 한 손에 남은 조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피오르는 얼떨떨한 얼굴로 짝이 맞는 두 카드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불운의 여신이 날고 기어도, 승부 조작에는 못 당하는 법이다.
결국 제대로 된 카드를 뽑은 피오르는 뛸 듯이 기뻐하며 손을 치켜들었다.
고작 도둑잡기 하나 이기고 이렇게 기뻐할 줄이야.
난 한껏 아쉬운 티를 내며 카드를 내려놓았다.
“안타깝네요. 이길 수 있었는데.”
“너무 안타까워하지 마세요, 영애. 정말 박빙이었습니다.”
“…….”
자기 딴에는 날 위로한답시고 말을 하는 모양이었지만 정말 위로받아야 할 사람은 피오르였다.
부디 도박은 놀이로만 즐기길 바랄게. 이렇게 도박에 소질 없는 사람은 나도 처음이었어.
“어라, 언제부터 거기 계셨습니까? 셀레스타인 공작님.”
한참 승리를 만끽하던 피오르는 어느새 내 뒤에 나타난 일리온을 보며 인사를 건넸다. 내가 안 돌아오니 직접 찾으러 나온 모양이었다.
“오랜만입니다. 슈테란 후작.”
잠깐만, 슈테란 후작? 누가? 피오르가?
“네? 후작님이요?”
나도 모르게 소리를 빽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제가 슈테란 후작입니다.”
피오르는 능청스럽게 자신을 후작이라 소개했다. 후작의 아들이 아니라, 후작 본인이었다고?
“다, 당연히 나이가 좀 더 있는 분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 선대 후작님은 2년 전에 돌아가셨고, 지금은 제가 후작 작위를 물려받았습니다.”
설마하니 후작이 대낮부터 친구들이랑 모여서 카드놀이를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당연히 아버지 잘 만나 인생 편하게 사는 한량인 줄 알았지!
“자, 그럼 약속대로 돌아가 주시죠.”
“……약속?”
“영애께서 저랑 약속을 하셨거든요. 내기에서 지면 돌아가시기로요.”
난 눈을 도르르 굴려 일리온의 시선을 피했다.
“하하, 공작님을 도와드리려 노력했는데 잘 안 됐지 뭐예요?”
날 바라보는 일리온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참, 앞으로도 헛걸음하실 필요 없습니다. 제 대답은 안 바뀔 테니까요.”
후작이 결정을 번복할 리 없을 거라던 말은 본인의 진심이었던 모양이다.
“통행료를 올려 달라는 말씀이시면…….”
“아니요. 통행료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혹시 선대 후작님과의 관계 때문에 그러는 겁니까?”
“그것도 관계 없습니다. 아버님의 일은 저와는 상관이 없으니까요. 굳이 이유를 만들자면, 그냥 내키지 않는다고 해 두죠.”
후작은 그렇게 말하며 집사를 불러 우리를 밖으로 안내하게 했다.
후작의 뜻도 단호했지만, 멋대로 내기를 하고 져 버린 약혼녀까지 합세하니 더 이상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렇게 문전 박대에 가까운 대우를 받은 일리온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좀 더 혼날 거라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반응이었다.
“후작님도 참 너무 하시네요. 그렇죠?”
살짝 눈치를 보며 일리온에게 묻자, 일리온은 한숨을 내쉬었다.
“눈만 떼면 사고를 치고 다니는군.”
“말씀이 너무 심하세요. 전 공작님을 위해 그런 건데.”
일리온은 날 어이없는 눈으로 바라보며, 이번엔 좀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누굴 탓하겠어. 날 데리고 온 건 다름 아닌 너인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