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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22)화 (21/159)

22화

‘내일부터 매일 아침 11시에 내 서재로 찾아오게.’

어제 헤어지면서 일리온이 내게 했던 말이었다. 시계는 어느새 아침 10시 30분이었고, 나는 멍하니 창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분침이 정각에 멈출 때, 난 죽을 거야.”

아련하게 마지막 잎새 같은 대사를 남기며 궁상을 떨자 릴리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이쯤에서 끝난 걸 다행이라고 생각하세요. 어제 일어났던 일을 생각하면, 아가씨께서 쫓겨나지 않으신 게 얼마나 다행인지…….”

“역시 너도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그래, 이건 뭔가 이상해. 내가 쫓겨나지 않았다니!”

“공작님께서 얼마나 아가씨를 아끼시는지 좀 아셔야 한다고요.”

“뭐? 그건 아니지.”

내가 고개를 저으며 반박하자 릴리가 날 불쌍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어쩜 좋아, 연애 경험이 없으신 불쌍한 우리 아가씨……. 공작님의 호의도 몰라보시다니.”

너 그 발언 좀 선 넘었다? 내가 눈을 뾰족하게 뜨고 릴리를 노려보자 릴리가 어깨를 으쓱였다.

“어제 공작님께서 기절한 아가씨를 안고 오는 걸, 직접 보셨어야 하는데. 안타깝네요.”

그거야 주변에 기사들도 있고, 보는 사람도 있으니까 할 수 없이 그런 거지. 릴리도 이미 일리온의 거짓말에 속아 그가 날 절절히 사랑하는 줄 알고 있었다.

세상 사람들이 일리온의 실체를 알아야 하는데! 이걸 나만 알고 있다니, 억울해!

“아무튼, 공작님 곁에서 업무도 열심히 도우시고 점수도 좀 따고 오세요. 뭐, 겸사겸사 두 분이 좋은 시간을 보내시면 더 좋고요.”

“좋은 시간? 농담이지?”

나는 소름 끼친다는 듯 팔을 쓸었다.

“아가씨도 참. 대체 그 잘생긴 공작님의 어디가 그리 못마땅하셔서 그러세요?”

내가 언제 못마땅하대?

성격이 조금 흠이지만, 사랑하는 여자한테는 한없이 다정한 남자인 걸 고려하면 이보다 더 좋은 남자는 없을 정도였다.

그 멀쩡한 얼굴로 빙글 돌아서 반역을 저지르지만 않는다면.

덧붙여, 일리온이 날 절대로 좋아할 리 없다는 걸 고려하면 내게 일리온은 그저 그림의 떡일 뿐이었다. 심지어 유통 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떡.

“릴리, 만약 네가 곧 죽을지도 모르는 병에 걸렸는데, 운명처럼 그 병을 치료해 주는 남자가 나타나면 어떨 것 같아?”

“또 말 돌리시는 거 봐.”

“일단 대답해 봐.”

“음, 엄청 고마워하겠죠?”

“게다가 엄청나게 잘생겼다면?”

“그 정도면 고민할 것도 없네요. 결혼해야죠!”

무슨 그런 당연한 걸 물어보냐는 말투였다.

“다른 남자가 널 좋아한다고 해도?”

“그 다른 남자가 왕자님쯤 된대요?”

왕자면 좀 고민할 생각이었니?

“……아니, 그냥 평범한 마을 청년.”

“평범한 청년이 어떻게 운명의 남자를 이겨요? 전 무조건 운명의 남자요.”

그래, 이게 평범한 반응이지.

일리온은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성녀와 만난 순간이 자신이 살아온 삶을 통틀어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라고 했으니까.

그런 마음을 알고 있는데, 고작 평범한 사람에 불과한 내가 탐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난 그의 저주를 풀어 줄 수 없으니까. 그러니 굳이 말하자면,

“공작님이 못마땅한 게 아니라, 내 주제를 잘 알고 있다는 얘기지.”

“나 참, 아가씨가 어디가 어때서요. 그보다 이럴 때가 아니에요. 어서 자리에 앉으세요. 머리 다시 손질해 드릴게요.”

내 말을 멋대로 이해한 릴리가 날 잡아끌었다.

“됐어, 그냥 가자.”

“그러지 마시고요! 혹시 알아요? 그렇고 그런 일이 생길지?”

“혹시나 해서 묻는데, 그렇고 그런 일이 뭐야?”

“에이, 아시면서.”

릴리는 그렇게 말하며 눈을 찡긋거렸다.

아니, 모르겠거든?

***

서재를 찾아온 적은 많았지만, 대게 일리온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려는 목적이었기에 오래 머문 적은 없었다.

항상 얍삽하게 치고 빠지는 전략을 취해 왔기에, 서재의 구조조차도 제대로 알고 있지 않았다.

새삼 둘러본 서재는 주인을 닮아 조용하고, 지루해서 좀이 쑤시는 곳이었다.

단 한 가지 맘에 드는 거라면 소파가 푹신하다는 거? 뭐, 그것도 10분 정도 앉아 있다 보니 감흥마저 사라졌지만…….

난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서 테이블을 가득 메운 서류 더미를 바라보았다.

저걸 종류별로 분류해 놓으란 일을 부탁받았지만,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아 바라만 보는 중이었다.

딱히 돈을 받고 하는 일은 아니었으니 월급 루팡은 아니고, 굳이 표현하자면 땡땡이 정도?

어차피 오늘 안에 다 끝내라고 한 적도 없으니 못하는 척하면서 시간이나 때우다 돌아갈 셈이었다.

“손이 여유로운 모양이군.”

한동안 서류랑 눈싸움을 하는 내가 못마땅했는지 일리온이 한마디 했다.

“분류하라고 하셨지만 어떻게 분류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주제별로 분류하면 돼.”

그러니까, 그 기준이 뭐냐고. 나는 입을 삐죽거리며 서류를 훑었다.

상반기 기사단 활동 보고서, 베릴 평야 개발 계획서, 발도로 해상 드래곤 출몰 보고……. 기타 등등 온갖 서류가 비빔밥보다도 더 잘 섞여 있었다.

제국에서 가장 큰 상단과 기사단을 이끈다는 게 이런 뜻인가. 이 정도면 타의적 일 중독이지.

어쨌든 돈도 안 주는 악덕 고용주가 일하라고 눈치 주니 일해야지 어쩌겠어. 나는 한숨을 쉬며, 천천히 서류를 분류했다.

“그렇게 정리해서 어느 세월에 끝내려는 거지?”

한 장 한 장 서류를 나누던 내 뒤로 일리온이 다가왔다.

“저는 이런 일을 해 본 적이 없으니까요. 느려도 어쩔 수 없죠. 이해해 주세요.”

“그래선 방에 못 돌아갈 텐데?”

약 올리는 게 여실히 느껴지는 말투였다.

“……어머, 이거 다 끝내면 보내 주실 건가요?”

“생각해 보도록 하지.”

그의 말에 난 손에 부스터라도 단 것처럼 서둘러 서류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건 상단 관련, 이건 기사단 관련, 이건…….

방금 전 속도로는 반나절이 걸려도 못 끝냈을 일을 1시간도 안 돼서 가져다 놓자 일리온이 날 빤히 바라봤다.

“다 끝냈어요. 공작님. 이제 방에 돌아가도 되나요?”

“꽤 재능이 있군그래.”

“호호, 이게 다 공작님께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이죠.”

“그래? 그럼 이것도 부탁하지.”

“예? 분명 아까 이것까지만 하면 방에 보내 준다고…….”

내가 말도 안 된다며 소심한 반항을 하자 일리온이 대꾸했다.

“생각해 본다고 했지, 보내 주겠다고 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

이 자식이. 날 갖고 놀아? 끓어오르는 분노를 다스리기 위해 숨을 깊게 내쉬며 일리온의 손에서 서류를 홱 하고 낚아챘다.

“공작님, 슈테란가에서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기계처럼 일만 하고 있는데, 세바스찬이 방으로 들어왔다.

일리온은 세바스찬에게서 서신을 받아 들더니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거절인가요?”

“그래. 예상했던 대로군.”

“무슨 일인데요?”

안 그래도 졸려 죽을 것 같던 차에 잘됐다 싶어 주변을 기웃거리자, 세바스찬이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실은, 광산을 개발하면서 물자가 이동할 길을 만드는 건으로 슈테란가에 도움을 청했는데, 그에 대한 답변이 와서요.”

“길이요?”

“예. 기존에 있던 길은 너무 좁고 험해서 좀 더 안전한 길을 내려고 하는데, 그러려면 슈테란가의 영지를 통해야 하거든요.”

“그게 거절당한 건가요?”

“네.”

저런. 안 됐네.

마치 남의 일인 듯 한 발자국 떨어져 상황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왜 거절당한 거예요?”

딱히 나쁠 거 없을 제안이었을 텐데.

“그게, 슈테란 후작님이 선대 공작님이랑 사이가 안 좋았던 게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아아.”

꽤 유치한 이유였지만, 한편으로는 충분히 납득 가는 이유였다.

사이가 좋지 않다면 어쩔 수 없지.

오히려 슈테란 후작이 현명했다. 어차피 몰수당할 물건이니까.

하지만 일리온은 쉽게 포기할 수 없었나 보다. 한참 서신을 바라보던 그는 세바스찬에게 명령했다.

“세바스찬, 슈테란가에 서신을 보내게. 찾아가겠다고.”

“직접 가서 해결하시게요?”

“그래.”

그렇다는 얘기는…… 다시 말해 외출한다는 얘기인가?

상사의 외근 소식을 들은 부하 직원처럼 눈을 반짝이며 일리온을 바라보았다.

“어머, 지금 나가시게요?”

목소리에 기쁜 티가 너무 났기 때문일까, 일리온이 날 바라보며 물었다.

“뭘 그리 좋아하지?”

“좋아하다니요. 전 단지 공작님을 못 뵌다는 생각에 아쉬워하고 있었는 걸요.”

“잘됐군. 그럼 같이 다녀오지.”

“……네? 저, 저도요?”

갑자기 나는 왜?

이대로 일리온을 배웅해 주고, 방으로 돌아가 쉬려던 계획에 금이 갔다.

“날 못 봐서 아쉽다며.”

“하지만 제가 굳이 가야 할까요?”

“광산의 소유주가 가는 건 당연하다 생각하는데.”

아니, 그게 아직 내 거였어? 진작에 넘겨준 줄 알았는데.

“그게, 제가 간다고 별 도움이 될까요? 제 생각엔 그냥 공작님 혼자 다녀오시는 게 어떨까 하는데…….”

“어차피, 큰 도움을 기대하고 데려가는 건 아니야. 하지만 당사자가 직접 부탁을 하러 가는 성의는 보여야지.”

“…….”

일리온이 내게 큰 기대가 없다는 건 당연한 얘기였지만, 본인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아니지, 고민할 게 뭐 있어?

그가 내게 거는 기대가 이토록 얕고 하찮은데 그 기대에 보답해 주면 되는 거지.

난 두 손을 맞잡고 일리온을 바라보았다.

“어머나, 공작님이 제게 거시는 기대가 그토록 클지 몰랐어요. 그럼 공작님의 기대에 부응해 저도 동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기대한다는 얘긴 안 했…….”

“아아. 그래도 후작님을 만나는 자리니까 옷을 차려입는 게 좋겠죠? 저번에 맞춘 드레스를 입어야 하나.”

“…….”

내 호들갑에 일리온의 표정이 굳어 갔다.

저런, 지금 후회해도 늦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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