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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21)화 (20/159)

21화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문다. 지금 가드너가 딱 그 모습이었다.

공포에 질린 나머지 눈이 광기에 물들어 있었다. 그의 손끝에 걸린 칼날이 금방이라도 목을 찌를 것처럼 빛났다.

그저 카지노에서 돈을 탕진하려던 최초의 계획은 어디로 가고 일이 이렇게 꼬여 버린 걸까. 아무리 일리온에게서 벗어나고 싶다고 외쳤지만 이승 탈출은 좀 너무하잖아.

가드너의 협박에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셀레스타인가의 기사들이 주춤거리며 가드너 뒤쪽의 길을 천천히 터 주기 시작했다.

“천하의 셀레스타인이 약혼녀한테 빠졌다는 말이 사실이긴 했던 모양이야. 하하하!”

한참을 웃던 가드너는 갑자기 숨을 탁 멈추었다.

사람 하나 죽일 것 같은 표정을 한 일리온이 천천히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순간 주변의 공기가 무겁고, 탁하게 변했다.

일리온의 붉은색 눈동자가 점점 짙어지고, 검은 반점이 일리온의 목을 타고 천천히 얼굴까지 퍼지기 시작했다.

그의 몸을 잠식한 저주의 흔적이 모습을 드러내자, 숨을 쉬기 힘들 정도로 공기가 무거워졌다.

견디기 힘든 가드너의 병사들은 이미 무릎을 꿇었고, 셀레스타인가의 병사들만 간신히 이 압박을 버티고 있었다.

어쩌면 길을 터 준 게 아니라, 이걸 예상하고 거리를 벌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가드너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채 검을 쥔 손을 바르르 떨었다. 숨이 헐떡이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순간 소설 속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성녀가 배틀로얄에 참가하던 날, 그녀를 구하기 위해 자신을 가로막는 병사들을 상대하며, 일리온은 지금과 같은 모습을 보여 주었다.

온몸에 퍼지는 저주의 흔적과 함께 저주의 힘 때문인지 숨도 못 쉴 만큼 탁해진 공기. 타오를 것처럼 붉은 눈동자.

텍스트가 닳을 만큼 몇 번이고 상상했던 장면이 실제로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지만, 전혀 기쁘지 않았다.

하, 가드너 백작아, 너나 나나 망한 것 같은데 어떡하냐?

희미해지는 시야가 마치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내 미래를 보는 것만 같아서,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

정신을 차렸을 땐 마차 안이었다. 내가 눈을 뜨자, 릴리가 호들갑을 떨며 내 손을 꼭 잡았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무거운 몸을 일으켜 앉자, 릴리가 무리하지 말라며 부축해 주었다. 아직 눈가가 그렁그렁한 걸 보니, 기절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모양이다.

“나, 얼마나 기절해 있었어?”

“30분 정도요?”

마차에 난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니 마차는 아직 카지노에 주차되어있는 상태였고 주변은 유흥가의 저녁 모습이라 하기엔 너무나도 썰렁했다.

일리온 휘하의 기사들만이 이따금 주변을 왔다 갔다 할 뿐이었다.

“공작님은?”

“지금 카지노 정리 중이세요. 들어 보니 대부분의 테이블에 마법이 걸려 있었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가드너 백작이랑 관련 인물들을 모두 잡아들이는 중이세요.”

젊은 시절을 모두 바쳐서 만들었다더니, 그 젊은 시절부터 될성부른 썩은 떡잎이었나 보군.

카지노의 어지러운 불빛들을 잠시 구경하며 마차에 머리를 기댔다.

“피곤하다.”

난 왜 여기서 팔자에도 없는 백작 영애나 연기하고 있는 걸까.

다 잊어버리고 따뜻한 물로 씻은 후, 포근한 이불에 싸여 잠들고 싶었다. 잠자기 전에 따뜻한 밀크티를 한 잔 마실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았다.

“세바스찬 님께 여쭤보니 금방 끝날 거 같다고 하세요. 조금만 참으세요.”

한숨만 연달아 쉬는 내가 신경 쓰였는지, 릴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날 걱정해 주는 건 너뿐이구나. 그래, 릴리를 위해서라도 힘내야지. 힘내서, 공작가를 탈출하자!

나는 다시금 마음을 다잡으며 두 손을 꼭 쥐었다.

어라, 그러고 보니 붕대가 감겨 있네.

아까 가드너가 아티팩트를 뺏을 때 쓸린 상처가 치료되어 있었다.

“릴리가 감아 준 거야?”

“네. 워낙 정신이 없어서 다치신 줄도 몰랐는데, 공작님께서 알려 주셨어요.”

“……공작님이?”

“네. 마차까지 아가씨를 안고 오신 것도 공작님이세요.”

그러고 보니 최종 보스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기절하기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일리온을 떠올렸다. 분명 목을 타고 볼까지 번진 그건 저주의 흔적이었다.

저주에 대해선 소설에서도 자세히 설명된 게 없어, 내가 아는 건 일리온이 어린 시절 마녀에게 저주를 받았다는 것뿐이었다.

저주의 내용은 죽을 때까지 고통에 몸부림치다 죽는 것.

원래대로라면 일리온은 몇 달 살지 못하고 매일같이 고통에 몸부림치다 죽을 운명이었다.

그러나 일리온의 조부인 전대 공작은 하나밖에 없는 손자를 살리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했고, 간신히 저주의 힘을 봉인했다.

다만 그 봉인도 영원한 게 아닌 모양인지 세월이 지나면서 일리온의 몸엔 차츰 검은 반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반점은 일리온의 감정이 격해지면 격해질수록 크기를 부풀려 온몸을 잠식해 갔고 더욱 심한 고통이 시도 때도 없이 일리온을 찾아왔다.

그래서 일리온은 언제나 신경이 곤두서 있었고, 타인이 자신의 몸을 만지는 것을 싫어했다. 다소 무심하거나 냉정해 보이는 성격 역시 그런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 저주가 어떤 원리로 타인의 움직임까지 제어하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그걸 알기도 전에 일리온은 죽어 버렸으니까.

‘진짜 가드너랑 같이 죽는 줄 알았네…….’

아까의 무시무시한 분위기를 떠올리며 나는 몸을 살짝 떨었다.

목덜미까지 저주의 흔적이 퍼진 걸로 보아, 이미 상당히 진행된 모양이었다.

차라리 안 보이면 모를까, 자신을 잠식하는 저주의 크기를 눈으로 확인하는 건 어떤 기분일까.

나라면 온몸이 저주로 뒤덮이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떨며 이미 정신이 나가 버렸을지도 몰랐다. 일리온은 그 안에서 매일 어떤 기분으로 살고 있는 걸까.

볼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던 저주의 흔적을 목격해서인지 오늘따라 생각이 많아지는 듯했다.

“참, 이거 돌려드리라고 하셨어요.”

마침, 내 쓸데없는 생각을 날려 버리듯 릴리가 말을 걸어왔다. 그녀가 내민 건 아티팩트였다.

릴리는 다치지 않은 다른 쪽 손목에 아티팩트를 끼워 주며 말했다.

“황성에서 오신 마법사님께서 그러셨는데, 안 좋은 마법의 효과를 없애 주는 마법이 걸려 있대요.”

“그래? 그럼 비싼 거야?”

“안타깝게도 아티팩트는 공격이나 방어류가 비싸지, 디버프 무효화 같은 건 별로 가치가 없다던데요.”

역시 쓰레기였다.

“그래서 카지노 테이블에 걸린 마법이 발동을 안 했다고 설명해 주셨어요.”

“그럼 뭐야? 결국…….”

“그대가 운이 좋았던 것뿐이지.”

내가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릴리를 바라보자, 문밖에서 일리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발 나타날 때는 인기척이라도 내고 나타나라.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네.

“이만 집으로 돌아가도록 하지.”

난 그의 얼굴을 살폈다. 볼까지 올라오던 검은 반점이 어느새 사라진 상태였다. 일렁이던 붉은색 눈동자도 평소의 모습이었다.

아까 그 모습은 내가 잘못 본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일리온은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마차에 올라탔다.

“아, 그, 그럼 전 세바스찬 님 쪽 마차를 타고 돌아갈게요.”

그렇게 말하며 릴리는 쏜살같이 마차에서 내려 버렸다.

“자, 잠깐…….”

붙잡기 위해 뻗었던 손은 허무하게 허공만 가를 뿐이었다.

제발 나랑 얘 둘만 두지 말라고…….

***

일리온은 라벤느를 바라보았다. 안절부절못하는 꼴이 제가 나쁜 짓이라도 한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 못했다.

“왜 거짓말을 했지?”

제 말에 라벤느는 화들짝 놀라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저 작은 머리로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 힘들 때가 많았다.

“그, 그게…… 제가 사실대로 말해도 어차피 안 믿으셨을 테니까…….”

“그래서 거짓말을 했다고?”

하다못해 가드너의 협박에 못 이겼다는 대답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정말로 처음부터 제게 사실을 말할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라벤느는 마치 선고를 기다리는 죄인처럼 시선을 바닥에 고정한 채 두 손을 얌전히 모으고 있었다. 팔목에 감긴 붕대가 괜히 신경 쓰인다.

하루빨리 세바스찬을 시켜 가정교사라도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일리온은 제 생각에 스스로 놀라고 말았다.

아티팩트를 이용해 부정행위를 하려던 게 사실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카지노에 출입하는 행동은 공작 부인으로서는 적절하지 못했다.

이번 일은 목격자도 상당했다. 떠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미 신문사에 전보를 붙이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일리온은 이번 건을 각 신문사에 어떻게 기사를 내도록 요청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이유를 찾고자 했지만, 그럴듯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한참을 고민하던 일리온은 간신히 이유를 하나 만들어 냈다.

라벤느가 가진 땅의 개발 가치가 높으니까……. 아직은 그녀와 약혼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낫다는.

그러나 제가 생각해도 참 구차한 이유였다.

“벌을 주신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이 건으로, 저한테 실망하신 나머지 결혼을 없던 일로 무르셔도…….”

한참을 무거운 침묵 속에 갇혀 있던 라벤느가 눈치를 보다 말을 꺼냈다.

그녀로서는 기다리는 말이 나오지 않아, 초조한 나머지 일리온의 결정을 재촉하는 것이었지만, 그것이 제 발목을 잡으리라는 건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래? 어떤 벌이라도 받겠다고?”

“네.”

짐짓 결연해 보이는 그녀의 표정은 전쟁터에 나가는 기사 같았다. 심지어 어딘가 묘한 기대감마저 깃들어 있는 듯했다.

“그럼 매일 내 서재로 찾아와 일을 돕게.”

“……네?”

“벌은 그것으로 하지.”

라벤느가 무슨 짓을 할지 따라다니며 감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럴 바엔 차라리 옆에 두고 감시하는 편이 나았다.

한참을 바닥만 보고 있던 얼굴이 드디어 자신을 바라봤다. 평소보다 채도가 낮은 녹색 눈동자엔 실망감과 당혹감이 엿보였다.

커다란 눈동자가 데구루루 구르더니 다시 일리온을 마주했다.

“다른 벌은 안 되나요?

“어떤 벌이라도 받겠다며.”

라벤느는 뭐라 더 반박하려 입을 달싹이다 결국 다물어 버렸다.

‘하여간 반성하는 기미라곤 찾아볼 수가 없군.’

그래도, 무사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안도감이 밀려왔다.

“그런데 말이에요 공작님…….”

한참을 조용히 있던 라벤느가 뭔가 물어볼 게 있다는 듯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오늘 제가 딴 돈은 어쨌든 나쁜 짓으로 딴 돈은 아닌데…….”

눈동자를 굴리며 쭈뼛거리는 모습을 보아하니, 대놓고 물어보기에 눈치가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대의 돈은 어떻게 되냐고?”

“제가 뭐 꼭 궁금해서 하는 얘기는 아니고요. 환전도 못 하고 와서 좀 아쉽다랄까…….”

“그건 그냥 잊어버리도록 해. 백작에 대한 재판이 끝나면 카지노는 몰수당할 테니까. 개개인이 카지노에서 얼마나 손해를 봤는지 증명하기도 힘드니 보상도 어렵겠지.”

“……그럼 그 백지 수표도…….”

“무효가 되는 거지.”

어쩐지 칩을 바꿀 수 없다고 말했을 때보다도 더 실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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