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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20)화 (19/159)

20화

왜 그때 아니라고 하고 싶었을까.

난 가만히 빛이 사라진 통신구를 들여다보았다.

일리온의 모습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지만, 왜 마지막에 머뭇거렸는지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아직 떠오르지 않았다.

도수가 높은 술에 취기가 오른 건 사실이었지만, 파혼당해야 하는 내 입장에 대해서는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었다.

이 일을 이용해 완벽하게 일리온에게서 버림받을 생각이니까. 만약 그가 내게 위자료를 청구한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나한테는 그것을 대신할 땅이 있었다.

내 목숨 하나 부지할 수 있다면 땅 정도야 얼마든지 줄 생각이다.

그런데 왜 마지막 순간에 멈칫한 걸까. 가끔 이런 식으로 불쑥불쑥 치켜드는 청개구리 같은 마음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쓸데없는 고민은 그만하자. 어차피 이대로 몇 시간 후면 나와 일리온은 남보다도 더 못한 사이가 될 테니까.

지금은 그런 것보다도 당장 한 치 앞도 모르는 내 미래를 걱정해야 했다.

얘기를 들어 보니 일리온이 이미 카지노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난 조금 긴장한 채로 문을 바라보았다.

‘통화를 끊을 때 일리온 엄청 화가 난 것처럼 보였지?’

그 화를 어떻게 감내해야 할지 벌써 걱정이었다. 하지만 파혼하려면 언제가 한 번은 마주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래,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아냐, 그래도 긴장되니까 한 모금만 더 마시자.’

위대한 술의 힘을 믿으며 난 남은 위스키를 입에 털어 넣었다.

***

일리온이 방에 들어오자, 이 넓은 방이 그로 가득 찬 것처럼 숨이 턱 막혔다.

슬며시 눈동자를 굴려 옆자리에 앉은 일리온을 바라보자, 붉은색 눈동자가 조용히 분노를 태우고 있는 것만 같았다.

“뭐 영애께서도 획득한 칩은 모두 돌려주겠다고 하시기도 했으니, 이번 건은 일단 비밀에 부치겠습니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서론을 끊고, 가드너는 ‘일단’ 비밀에 부치겠다 했다. 그 말은 일리온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여차하면 외부에 알리겠다는 소리와 다름없었다.

“그나저나, 요즘 셀레스타인가에서 유칼리 숲 개발에 힘쓴다 들었는데, 어떻게 진행은 잘 되고 계십니까?”

“관심 있나?”

“뭐, 그 숲은 저희 쪽에서도 개발권을 얻으려고 엄청 애썼던 건이라서요. 이렇게 만난 김에 혹시 지금이라도 저희 쪽에 양보하실 생각은 없는지 여쭤보는 거죠.”

돌리고 돌렸지만, 요지는 이 사건을 비밀에 부치는 대신, 숲의 개발권을 달라는 것이었다.

그 숲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리온의 눈썹이 꿈틀하는 것으로 보아 꽤 큰 딜인 듯 보였다.

처음부터 이 자리는 대화가 아닌 협박을 위한 자리였고, 가드너는 고삐를 쥔 건 자신이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좀 더 지르라고 응원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조건이 말도 안 될수록 일리온의 결정은 빠를 것이다. 뭐하면 지금이라도 당장 파혼 선언을 할지도.

이 고비만 넘기면 된다. 나는 긴장으로 얼어붙은 손가락을 꼭 쥐고서 일리온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렇게 하지.”

“네?”

“네?”

나와 가드너가 나란히 놀라면서 되물었다. 나는 그렇다 치고 넌 왜? 네가 먼저 제안한 거잖아?

내가 가드너를 잠시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자 그 역시 날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너, 같은 팀끼리 이럴래?

“이, 이렇게 흔쾌히 승낙하실 줄 몰랐습니다. 역시 영애를 무척이나 아끼시나 보군요. 그럼 자세한 이야기는 계약서를 작성하고…….”

“그전에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게 있는데.”

가드너의 말을 자르고 일리온이 물었다.

“그 아티팩트에 정말로 마법이 걸려 있는 건지는 확인해 보고 싶군.”

“네?”

“그렇게 확신했으니, 안 될 것도 없지 않나?”

가드너는 살짝 당황한 듯 눈치를 살피다, 흔쾌히 승낙하며 아티팩트를 들고 카지노로 향했다.

우리가 나타나자 카지노에 있던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딱히 불법적인 장소도 아니고 허가받아 세워진 도박장이었기에 못 올 이유는 없지만, 도박과는 거리가 먼 일리온의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어, 아가씨? 다시 돌아왔네? 아까 그렇게 따고 갑자기 사라져서 놀랐잖아. 어라? 아가씨 그러고 보니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네? 저짝에는 셀레스타인 공작도 있고…….”

아까 같이 게임을 한 아저씨였다. 한참을 혼자서 신이 나 떠들던 아저씨는 일리온을 발견하더니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

“……서, 설마 아가씨 그 셀레스타인 공작의 약혼녀였어?”

내게 불법 경매장 초대장을 주었던 남자가 나와 일리온을 번갈아 바라보다 내게 고개를 숙여 속삭였다.

“아, 아까 그 초대장 그거 비밀인 거 알지? 절대 내가 줬다고 하면 안 돼?”

그 말만을 남기며 그는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하긴, 그거 일리온한테 들키면 큰일 나지.

“꽤나 즐겁게 시간을 보냈나 보군. 친한 친구까지 생기고.”

아저씨랑 고작 몇 마디 나눴다고 답지 않게 비아냥거리는 일리온이었다. 하긴, 한 짓이 있으니 비아냥이 대수겠나. 당장 끌고 가라고 해도 할 말이 없는걸.

나는 멋쩍게 웃으며 가드너에게서 팔찌를 건네받았다.

“그럼 리슈펠트 양, 아까 하던 대로 부탁드립니다.”

주변 시선이 다시 한번 내게 고정되었다.

몇 시간 전만 해도 두 판 연속으로 대박을 터트리고 간 영애가 다시 돌아온 것도 모자라 뒤에는 셀레스타인 공작과 가드너 백작을 주렁주렁 달고 왔으니 이상할 만도 했다.

따가운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난 빠르게 칩을 걸었다.

“16번에 칩 5개.”

가지고 있던 칩 5개를 숫자 16번에 모두 올리고, 딜러가 베팅 종료종을 울릴 때까지 기다렸다.

주변 사람들은 아무래도 평범한 베팅은 아닌 듯하다고 생각했는지 조금 소극적으로 몇 개 배팅하고 그만뒀다.

마침내 베팅이 끝나고, 딜러가 룰렛 안으로 구슬을 던졌다. 룰렛 주위를 뱅글뱅글 돌던 구슬은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구슬이 번호 칸에 멈추었다.

“15, 블랙, 홀수.”

딜러가 번호를 부르고 번호를 맞추지 못한 칩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자, 잠깐만. 이거 말했던 거랑 다르잖아. 일리온의 시선을 피해 가드너를 흘깃하자 그도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하, 한 번에 안 될 수도 있으니 몇 판 더 해 보죠.”

그러나 쓸데없는 시도였다. 어떻게든 맞추기 위해 신중에 신중을 더해 번호를 찍었지만, 노력만 가상했을 뿐 번호는 번번이 빗나갔다.

‘이그 아티팩트르그 해쯔느…….’

나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옆에 있는 가드너만 노려보았다. 이러면 내가 일리온한테 한 말이 뭐가 되니?

같은 팀이 팀킬을 하는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식은땀이 등 뒤로 흘러내렸다.

“이쯤 되면 좀 궁금하군.”

한참을 돈만 잃는 나를 보며 일리온이 한마디 했다.

“네?”

“그 아티팩트에 걸린 마법이 말이야.”

“그, 글쎄요. 무슨 마법이려나. 하하하…….”

“이, 이리 줘 봐. 내가 해 보지.”

초조했던 모양인지 가드너는 격식을 벗어던진 채 내 팔찌를 거의 낚아채듯이 가져갔다. 얼마나 세게 빼앗았는지, 팔목에 붉게 자국이 남고 말았다.

붉게 물든 자국을 어루만지며 가드너가 게임을 하는 걸 바라보았지만 그 역시 단 한 번도 번호를 맞추지 못했다.

보드를 바라보던 가드너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그래도 귀족은 귀족이라고, 일단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빠르게 표정을 갈무리한 뒤 일리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마도, 저희 쪽에서 오해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저 영애께서는 운이 좋았을 뿐인데……, 성급하게 판단한 듯합니다. 정중히 사과드립니다, 공작님.”

좀 더 버틸 거라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가드너는 빠르게 모든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그래도 내가 아티팩트를 들고 온 건 사실이니 좀 더 우겨 볼 만도 했는데, 손바닥 뒤집듯 빠르게 변한 태도에 위화감이 들 정도였다.

“그런가? 내 생각은 좀 다른데.”

“……네?”

가드너가 일리온의 안색을 살피며 되물었다.

“확신이 있었겠지.”

“그게 무슨…….”

“라벤느가 아니라, 이 카지노 자체에.”

일리온은 그렇게 말하며 테이블을 가리켰다.

가드너는 적잖이 당황하며 일리온을 바라보았다.

“무, 무슨 말씀이신지, 잘…….”

“말 그대로야. 경은 라벤느가 운이 좋아서 두 번이나 칩을 땄을 수도 있다는 가정은 처음부터 하지 않았네.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처음부터 이 게임이 칩을 대량으로 딸 수 없는 구조로 만들어졌기 때문이 아닌가?”

테이블을 쓱 훑던 붉은색 눈동자가 가드너의 얼굴 앞에서 멈췄다.

“예를 들면, 마법으로 조작을 했다던가.”

무심하게 내뱉는 낮은 목소리가 귀를 통해 심장을 관통하는 듯했다.

일리온의 말에 가드너가 팔짝 뛰며 부정했다.

“무슨 그런 의심을 하십니까. 억측이십니다. 이건 단순히 저희가 판단을 잘못한 것에 지나지 안…….”

“그래? 그럼 확인해 보면 되겠군.”

일리온의 말이 떨어지자, 뒤에서 로브를 뒤집어쓴 남자가 나타났다.

로브를 걷어 내며 가린 얼굴을 드러내자, 보기 드문 푸른색 머리카락에 푸른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아직 어린 티가 가시지 않은 소년은 우릴 보고 싱긋 웃어 보였다.

“마침, 황성에서 일하는 마법사를 데려왔거든.”

대체 왜 마법사가 나오는 건데?

마법사가 나타나고 나서부터 일은 물살을 타고 급격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푸른 머리의 마법사는 카지노 테이블을 검사하더니 마법이 걸려 있는 게 맞다고 확인을 해 주었고, 열이 받은 가드너가 딜러 테이블로 달려가 비상 버튼을 누르자 경비병들이 달려와 우리를 포위했다.

눈치를 보던 손님들은 경비병들이 뽑아 든 칼을 보며 황급히 자리를 피했고 그 사이에 서 있는 나는 해탈하여 상황을 관전하고 있을 뿐이었다.

뒤로 넘어져 보겠다고 아등바등하는데, 친절하게 넘어지지 말라고 잡아 준 놈이 코를 깨 버리는 느낌이랄까.

“절 모함하시는 겁니까? 공작님?”

가드너는 마치 궁지에 몰린 쥐처럼 발발 떨었다. 우리를 둘러싼 십수 명의 병사들 역시 긴장한 얼굴로 일리온과 마법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함이라.”

일리온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지어졌다. 서늘한 시선과는 대조되는 미소였다.

“가드너 백작, 감히 누구에게 검을 겨누는 건지 알고 있는 건가?”

“이, 이건…….”

백작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졌다. 멀리서 철그럭 거리는 소리가 들리며, 병사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의 갑옷에는 셀레스타인 가문의 문장인 독수리가 새겨져 있었다. 카지노를 지키는 병사의 수에 족히 두 배는 돼 보이는 숫자였다.

이 정도 숫자면 가드너도 더는 반항할 수는 없을 듯했다. 물량 공세에는 이길 재간이 없지.

한때나마 이대로 도망치면 어떨까 생각했던 내 전의마저 상실되는 순간이었다. 저 병사들이 날 따라온다고 생각하면 잘못했다고 빌면서 제 발로 돌아올 것 같거든.

머릿속에서 도주라는 계획을 지워 내며 멍하니 병사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몸이 갑자기 휘청였다. 그리고 순식간에 날카로운 검이 내 목에 드리워졌다.

“다들 비켜! 안 그러면 이년이 죽을 줄 알아!”

가드너는 날 인질로 붙잡고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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