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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19)화 (18/159)

19화

술잔에 손도 대지 않은 채 10분 정도 기다렸을까, 깔끔하지만 어딘가 속이 구려 보이는 인상의 남자가 들어오더니 맞은 편에 앉았다.

“안녕하십니까, 리슈펠트 양. 전 윌리엄 가드너입니다.”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가드너 백작님. 환영 인사가 상당히 과격하시네요.”

악수를 내미는 손을 맞잡으며 불쾌함을 드러내자 가드너는 뭐가 재밌는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죄송합니다. 저희 직원들이 실례를 범했나 보네요. 부디 영애께서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죠.”

드러낸 잇새로 금니가 빛이 났다. 놀라울 정도로 뒤 구린 악역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백작은 소파에 등을 푹 기대며 다리를 꼬았다. 나를 손님으로 대하는 태도는 아닌 듯 보였다.

“영애께서는 잘 모르시겠지만, 이 카지노는 제 평생을 바친 곳입니다. 제 젊은 시절의 땀과 열정을 모두 쏟아부어 만든, 꿈과 환상을 좇는 이들의 왕국이죠.”

서론부터 시작하는 타입인가 보다. 그런 TMI는 굳이 알고 싶지 않은데.

“그러나, 요즘 들어 물을 흐리는 미꾸라지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이 제국엔 마법을 사용할 줄 아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보니, 마법으로 신성한 카지노의 분위기를 망가뜨리곤 하죠. 그래서 언제나 입장객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검사하는 편이지만, 가끔 마력이 미약하게 깃든 아티팩트들은 걸러 내기 힘들답니다.”

“그러니까 백작님께서는 지금 제가 저 아티팩트로 부당 이익을 취했다고 말씀하고 싶으신 건가요?”

질질 끄는 대화에 결국 먼저 손을 든 건 나였다. 윌리엄은 말이 잘린 게 못내 아쉬운 듯한 표정이었다.

“영애를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아티팩트가 나온 이상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라서요. 실제로 영애께서는 두 번이나 룰렛에서 번호를 맞추셨고요.”

백작은 자신은 선량한 피해자라는 듯, 가증스러운 가면을 뒤집어쓰고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제야 좀 이해가 갔다. 처음부터 누가 신고한 게 아니라, 말도 안 되는 확률로 번호를 연달아 맞춰서 의심스러워 조사한 거였다. 그러다 아티팩트가 얻어걸린 거고.

하긴, 나도 좀 의심스러웠어. 하고많은 등장인물 중에 라벤느를 뽑은 똥손이 룰렛 번호를 두 번이나 맞추다니. 말이 안 되긴 하지.

“그래서요? 제가 가진 칩을 모두 몰수하실 겁니까?”

“죄송한 말이지만, 카지노 규칙이 조금 엄격해서요. 아무래도 저희 쪽에서는 중대한 사안이라 공작님께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공작님이라 함은?”

“당연히 셀레스타인 공작님이죠.”

“…….”

거기까지 들은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마지막 퍼즐 하나가 딸깍하고 맞춰지는 듯했다.

공작의 약혼녀가 제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카지노에 와서 아티팩트를 사용해 부정행위를 저질렀다. 그리고 이 사실을 공작에게 알릴 것이다.

도의적인 이유로?

아니, 카지노를 운영하는 사람한테 무슨 도덕심이 있겠는가? 오히려 철저하게 자기 이득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을 공작에게 알림으로써 얻을 수 있는 건 공작과의 관계에서 우위를 잡을 수 있는 약점이었다.

약혼녀가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사실. 이걸 언론에 뿌린다고만 해도 셀레스타인이란 이름엔 어마어마한 타격을 입을 테니까.

이거……. 괜찮네?

백작의 의도를 파악한 나는 빠르게 태도를 바꾸고 해사하게 웃었다.

“어머, 백작님. 그럼 공작님께 연락하시겠어요?”

“네?”

예상치 못한 반응에 백작이 놀란 토끼 눈이 되어 날 바라봤다.

“사항이 중대하니, 공작님께서 직접 오시는 게 좋겠죠? 그때까지 전 여기서 얌전히 기다릴게요.”

“아, 알겠습니다.”

당황한 가드너는 자기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내가 이렇게 순순히 잘못을 인정할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모르고 저지른 일이라 변명하자면 할 수 있었겠지만 그럴 이유가 전혀 없었다. 이걸로 잘만 하면 일리온한테 쫓겨날 수 있는데.

적의 적은 나의 아군이라더니, 최고의 아군과 손잡을 기회를 날려 버릴 순 없지.

나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테이블에 놓인 술잔을 집었다. 어디 고급 술 한번 마셔 볼까?

***

“주인님, 가드너 백작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가드너 백작?”

그에게 연락을 받을 일은 없을 텐데.

서로 연락을 주고받을 만큼 친하지도 않거니와, 돈에 환장하는 백작이 마석을 낭비해 가며 쓸데없는 안부를 물어보기 위해 연락을 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리온은 일단 통신구를 연결하라 했다.

“안녕하십니까, 공작님. 오랜만입니다.”

금니를 반짝이며 그가 인사를 건넸다. 일리온 역시 예의상 그의 인사를 받으며 곧바로 본론을 물었다.

타이밍을 놓치면 가드너의 기나긴 서론을 하염없이 듣고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실은 리슈펠트 양께서 저희 카지노에 찾아오셨는데, 그 건으로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말이죠.”

“리슈펠트?”

가드너의 입에서 나올 리 없는 이름이 대뜸 튀어나왔다. 백지 수표를 받아 간 뒤로 조용하다 했더니 그새 카지노를 갈 줄이야.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생각이야 매일 하지만, 매번 그 생각을 뛰어넘는 걸 보여 주는 약혼녀였다.

일리온은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문제야 많죠. 예를 들면, 영애께서 아티팩트를 착용하고 입장하신 거나, 아티팩트를 이용해서 부당하게 배당금을 가로챈 것이나.”

“아티팩트?”

그런 고가의 물건을 구입한 적이 있던가? 일리온은 세바스찬을 바라보았다. 그녀에게 필요한 건 적당히 사 달라고 했지만, 그중에 아티팩트는 없었을 텐데.

세바스찬은 금시초문이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티팩트가 한두 푼 하는 것도 아니고, 최소 100골드부터 시작하는 물건을 그리 쉽게 턱턱 사들였을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또 라벤느가 어디서 사고를 쳤다는 건데……. 설마 오늘 준 백지 수표로 사들인 건가?

“라벤느를 좀 바꿔 주시겠습니까?”

가드너에게 부탁하자 통신구가 살짝 일렁이더니 라벤느의 얼굴이 떠올랐다.

“공작님! 안녕하세요!”

“거기서 뭐 하는 건가?”

“술 마시고 있죠. 몰랐는데 여기에 맛있는 술이 잔뜩 있네요!”

일리온은 저도 모르게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라벤느는 이미 약간 취한 듯 보였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 직접 듣고 싶군. 설명해 봐.”

“음, 실은 아까 룰렛 게임을 했거든요? 그런데 할 때마다 제가 찍은 번호에 구슬이 들어가지 뭐예요? 이거 보실래요? 골드 칩 두 개나 얻었어요.”

그렇게 말하며 라벤느는 까르륵 웃었다.

“그래서?”

“어, 아티팩트를 이용해서 부당하게 이익을 취했으니, 백작님께서 책임을 지라고 하셔서…….”

“술을 마시는 게 책임을 지는 건가?”

“아, 술은 여기 있길래 마셨어요. 많이 안 마셨어요. 진짜 쪼금 마셨어요.”

“라벤느!”

“……네, 넵.”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끊고 언성을 높이자 취해서 헤실거리던 그녀가 몸을 바짝 세웠다.

“아티팩트라는 걸 알고 가져간 건가?”

라벤느는 대답을 못 하고 우물거렸다.

“알고 가져갔냐 물었어.”

“네.”

고개를 숙인 라벤느의 입에서 긍정의 대답이 들렸다.

“일단 오셔서 얘기를 나누시죠. 할 말이 아주 많을 것 같은데.”

아직 얘기가 끝나지 않았는데도 멋대로 끼어드는 가드너의 행동에 일리온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직접 보고 대화하는 게 좋겠다는 가드너의 말에는 동의하는 바였다. 일리온은 곧 가겠다는 대답을 하고 통신구를 껐다.

“세바스찬, 마차를 준비하게. 바로 출발하지.”

세바스찬이 나간 뒤 일리온은 꺼져 버린 통신구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라벤느에게서 무언가를 기대하고 결혼을 결심한 것은 아니었다. 이 결혼은 어디까지나 일리온의 필요에 의한 결혼이었으니까.

만약 자신의 결정이 셀레스타인 가문에 누가 되는 일이라면, 일리온은 거리낌 없이 라벤느를 잘라 낼 사람이었다.

그리고 오늘 라벤느가 보여 준 행동은 일리온의 결정을 후회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라벤느에 대한 처우는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일리온은 라벤느가 제 질문에 아니라고 대답하길 기대했다.

질문하면서도 알고는 있었다. 대답을 듣는다고 해서 상황이 바뀌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으면서도 대답을 기다리는 그 짧은 순간 자신은 라벤느와의 파혼이 아니라 그녀의 결백을 증명할 방법을 떠올렸다.

그러나 라벤느는 제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모든 잘못을 시인했다. 순간 설명하기 힘든 실망감과 알 수 없는 분노가 자신을 적셨다.

납득하기 힘든 일이었다. 라벤느의 대답에 따라 좌우될 상황도 아니었고, 그가 취해야 하는 행동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런데도 어째서 배신감마저 드는지 모를 일이었다.

쉽사리 사그라지지 않는 감정은 자꾸만 고개를 쳐들며 일리온을 잠식했다.

세바스찬은 거칠게 현관을 내려오는 일리온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주인은 이런 식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자신의 감정을 죽이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누가 보아도 끓어오르는 분노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보였다.

세바스찬의 입장에서는 일리온의 이런 변화가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되었다.

감정을 죽이는 데 익숙한 나머지, 그것이 흘러넘쳤을 때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으니까. 범람하는 감정은 일리온의 몸에도, 그가 지금 해결하려는 일에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대로 일리온을 보냈다가는 일을 그르칠 게 틀림없었다.

“냉정히 생각하시지요.”

“이미 냉정히 생각하고 있어.”

“그럼 제가 뭐 하나 여쭤도 되겠습니까?”

대답이 없다는 건 허락한다는 뜻이라 생각한 세바스찬이 말을 이었다.

“라벤느 아가씨께서 아티팩트를 사용해 가며 카지노에서 이득을 취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야…….”

이유를 대려던 일리온은 순간 머뭇거리고 말았다.

라벤느가 돈이 부족한 사람은 아니었다. 제 손으로 백지 수표까지 쥐여 가며 돈이 필요하면 얼마든지 쓰라고 허락했으니까.

그걸로 카지노를 간 건 정말 예상도 못 한 일이었지만, 어쨌든 아티팩트를 사용할 이유가 없었다.

일리온은 라벤느가 했던 말들을 되짚어 보았다.

‘그러고 보니, 찍는 번호에 정확하게 구슬이 들어갔다고 했지…….’

룰렛 게임의 룰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37개의 숫자가 적힌 룰렛이 어지럽게 돌아가고, 마찬가지로 쇠 구슬이 룰렛 주변을 돌다 속도를 멈추어 한곳에 들어가는 게임이었다.

아티팩트로 숫자를 맞췄다면 찍는 번호에 정확하게 숫자가 들어가게 할 정도로 정교한 마법을 구현해야만 했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룰렛과 마찬가지로 랜덤으로 굴려지는 쇠 구슬, 거기에 37개가 되는 번호. 변수가 너무도 많았다.

마법을 쓸 줄 모르지만, 가진 지식으로 미루어 보아 아티팩트에 담기엔 힘든 마법이었다.

‘어쩌면 전제부터 잘못됐는지도 모르겠군.’

미간을 접어 가며 자신이 던진 질문에 대해 고민하는 일리온을 보며 세바스찬은 안도했다. 아무래도 그를 삼킬 것 같은 분노가 조금 사그라든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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