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조용한 적막을 가르며 거칠게 문이 열렸다. 방의 주인인 윌리엄은 미간을 찌푸리며 자신의 휴식 시간을 방해하는 이를 바라보았다.
그는 뛰어온 모양인지 숨을 헐떡이며 말을 내뱉었다. 어찌나 헐떡이는지 단어 마디마디가 하나같이 숨에 들이켜 삼켜졌다.
“3, 3번 룰렛 테이블…… 500골드 35배 베팅…… 성공했……다고 합니다.”
비록 중간중간 공백이 있을지언정 그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만큼은 확실히 전달되었다.
“……뭐?”
못마땅한 얼굴로 시종을 바라보던 카지노의 운영자, 윌리엄 백작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카지노에 들어오기 전에 마법사인지 아닌지 철저하게 검사하라고 했을 텐데?”
“그게, 검사할 때는 아무 문제 없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셀레스타인 공작의 백지 수표를 사용했다고 하던데요.”
왜 하필이면 그 이름이 여기서 나온단 말인가?
안 그래도 뒤가 구린 게 많은 백작은 될 수 있으면 셀레스타인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혹시 사찰이라도 나온 건가? 아냐, 그러면 티 나게 자기 이름으로 된 백지 수표를 날렸을 리 없지.’
쉽게 공작의 의중을 가늠하기 힘든 윌리엄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고민을 시작한 지 얼마나 됐을까, 기시감이 드는 발소리가 상념을 비집고 들려왔다.
어지럽게 복도를 가르는 발소리는 곧장 자신의 방으로 향했고, 앞선 이와 다를 바 없이 무례하게 문을 열었다.
또 다른 시종을 바라보며 둘을 한꺼번에 잘라 버릴까 하던 백작은 인상을 찌푸리며 이제 막 방 안으로 들어온 남자를 바라보았다.
“또 왜?”
“그게, 아까 그, 영애 말인데요……. 바, 방금 전에 또 500골드 베팅에 성공했다고…….”
“……뭐?”
윌리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 빌어먹을 놈들이, 룰렛에 마법 제대로 걸어 놓은 거 맞아? 어떻게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베팅에 성공하는데?”
“죄, 죄송합니다. 딜러들도 이유를 잘 모르겠다고…….”
아무리 셀레스타인 쪽 사람이 사찰을 나왔다고 해도 이건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베팅 금액이 가장 높은 숫자에는 의도적으로 구슬이 멈추지 않도록 마법이 걸려 있었다. 이걸 무시하고 맥시멈 베팅을 두 번이나 성공한다고?
마법사들이 걸어 놓은 마법이 쓰레기였든, 영애가 무슨 수를 썼든 둘 중 하나였다. 그리고 윌리엄은 후자를 의심했다.
‘어떤 여자인지 먼저 확인해 봐야겠군.’
윌리엄은 하인들을 대동하고 그들이 말한 영애를 보기 위해 룰렛 테이블로 향했다. 거기엔 익숙한 외견의 여자가 머리를 감싸 쥐고 앉아 있었다.
베이지색 머리에, 녹색 눈.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셀레스타인과 관련된 사람이라면 범위를 단번에 좁힐 수 있었다.
세간의 화제인 공작의 약혼녀, 라벤느 리슈펠트가 틀림없었다.
그걸 확인한 윌리엄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잘만 하면 이걸 이용해 공작을 협박할 수 있겠군.’
“영애를 VIP룸으로 안내해라. 마법을 사용하는 건 아닌지, 혹은 아티팩트를 소유하지는 않았는지 철저하게 조사하도록.”
그의 옆에서 명령을 듣던 두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칩으로 받기엔 배당금이 너무도 큰돈이라 딜러는 내게 금색에 카지노 로고가 들어간 칩을 하나 주었다.
칩을 가지고 교환소로 가면 그에 맞는 돈으로 바꿔 줄 거라 얘기하며.
“혹시 돈으로 환전하면 백지 수표는 어떻게 되나요?”
“그럴 경우엔 백지 수표를 파기하고, 차액을 돌려드릴 겁니다.”
“만약 칩을 가져갔다가 나중에 교환하러 와도 되나요?”
“칩은 외부로 반출이 불가능합니다. 이해 부탁드립니다.”
딜러의 친절한 설명을 들으며 나는 골드 칩 두 개와 내 테이블에 놓인 50여 개의 칩을 바라보았다.
그냥 여기서 뿌릴까? 순식간에 없앨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저씨, 칩 하나 가지실래요?”
난 내 옆에서 훈수를 놓던 아저씨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는 뛸 듯이 기뻐하며 백만 포인트짜리 칩을 재빨리 낚아채 자신의 재킷 안쪽 주머니에 곱게 넣고는 포켓을 두어 번 톡톡 두드렸다.
“이야, 역시 내 말 대로 하니까 돈을 따지? 내가 여길 오래 다녔지만, 아가씨처럼 배포도 크고 강단 있는 사람은 처음이야. 아주 크게 될 사람이라니까!”
칩 하나 건넸다고 칭찬이 자판기처럼 줄줄이 나왔다. 물론 ‘이’부터 시작해서 ‘까’까지 뭐 하나 동의하기 힘든 말이라는 것만 빼면.
난 그의 의견에 적당히 동의하며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그냥 받을 순 없지. 감사의 의미로 아가씨한테 이거 하나 줄게.”
그러며 그 아저씨는 칩을 넣었던 가슴 주머니에서 검은 카드를 하나 꺼냈다.
“그게 뭔데요?”
내가 묻자 아저씨는 누가 들을세라 내 귀에 얼굴을 바짝 갖다 대고 속삭였다.
“비밀 경매장 초대장인데, 귀족 중에서도 아주 소수만 받을 수 있는 거야. 아가씨는 재력도 충분해 보이고, 돈 쓰는 것도 거침이 없는 것 같으니, 분명 이런 것도 좋아할 것 같아서 말이야.”
“…….”
비밀 경매장이라, 어딘가 익숙한 단어였다. 설마 원작에서 성녀가 황성을 탈출했다가 붙잡혀 간 경매장인가?
필요 없어! 난 원작이랑 얽힐 생각 없다고!
“돼, 됐어요.”
“거, 받아 두라니까. 젊은 아가씨들이 좋아하는 잘생긴 이종족 남자들도 많이 들어온다고.”
“……이, 이종족?”
내가 호기심에 되묻자 남자가 씩 웃으며 말했다.
“그래, 잘빠진 엘프나, 근육질 빵빵한 늑대 인간들.”
엘프랑 늑대 인간도 있는 세계였어? 호기심이 조금 생기는 것 같기도…… 가 아니라, 나 지금 무슨 생각하는 거니?
마지막 남은 양심이 안 된다고 소리를 치고 있는데, 아저씨는 기어이 내 손에 초대장을 쥐여 줬다.
아니 뭐, 이렇게까지 하는데 일단 받는 척이라도 할까?
양심과 욕망 사이에서 고민하던 나는 얼떨결에 초대장을 가방에 넣고 말았다. 그래. 어른의 성의를 무시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지. 흠, 흠.
그 뒤로도 칩을 주변 사람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었지만, 얼마 가지 않아 딜러한테 제지당하고 말았다. 소란을 일으키니 그만두라며.
덕분에 내 고민은 깊어져만 갔다. 이대로 칩을 환전해서 돌아갈지, 아니면 좀 더 판돈이 큰 테이블을 찾아 돈을 모조리 탕진할지.
테이블에 앉아서 음료를 마시며 고민하고 있는데, 내 앞에 건장한 남자 둘이 멈춰 섰다.
“아가씨, 죄송하지만 잠시 저희 직원과 동행해 주시겠습니까?”
“저요?”
아마도 카지노의 경비원인 듯 보였다.
“네. VIP룸으로 모시겠습니다.”
“거긴 왜요?”
“카지노의 주인이신 가드너 백작님께서 아가씨를 VIP룸으로 모시라 말씀하셨습니다.”
뭐지? 내가 셀레스타인의 약혼녀라는 걸 벌써 들켰나? 하긴, 공작의 이름이 적힌 백지 수표를 썼으니 보고가 올라갔을 수도 있지.
나 참, 뭐 또 유명인 얼굴 보겠다고 VIP룸까지 초대하고 그래. 유명한 것도 피곤하네.
“……가면 뭐 주나요?”
연예인 병에 걸린 듯 새초롬하게 물으니 두 사람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예?”
“아니, 뭐 비싼 술 같은 거 주냐고요.”
“무, 물론이죠.”
남자는 잠시 당황하더니 살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고민하는 눈치를 보이자 릴리가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아가씨…… 우리 이제 돌아가요. 돈도 따셨잖아요.”
“괜찮다니까. 딱 한 잔만 마시고 올게.”
걱정하는 릴리를 안심시키며 남자의 뒤를 따라갔다.
VIP룸에 들어가려 하자, 두 사람은 릴리를 멈춰 세웠다.
“죄송하지만 아가씨만 따로 뵙고 싶어 하십니다.”
“어쩔 수 없지. 릴리는 밖에서 음료수라도 마시고 있어.”
“하지만…….”
릴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아마 저 걱정의 대부분은 내가 무슨 사고나 치지는 않을까 하는 거겠지.
“사고 안 칠게.”
그녀의 걱정을 조금 덜어주기 위해,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자 릴리가 못 미더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정말로.”
릴리는 어쩔 수 없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VIP룸은 확실히 VIP라는 말이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화려했다.
방의 오른쪽엔 대리석으로 만든 겜블용 테이블이 자리하고 있고, 왼쪽엔 고급 소파와 작은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선반에는 각종 고급술이 즐비해 있었는데, 방 하나가 개인용 카지노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였다.
다만 기다리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백작은 자리에 없었다.
“백작님은 안 계시네요?”
“죄송하지만 잠시 저희 직원에게 협조 부탁드립니다.”
“무슨?”
그렇게 말하며 한 명이 내가 움직이지 못하게 어깨를 잡고 다른 한 명이 몸 주위로 기다란 막대기를 쓱 하고 훑었다. 마치 공항 검색대 같은 풍경이었다. 왜?
“마나 반응은 없습니다.”
스캔이 끝나자, 어깨를 붙잡고 있던 남자가 날 풀어 주었다.
“죄송하지만 착용하고 계신 모든 액세서리를 풀어 주셨으면 합니다.”
진짜 공항 검색대도 아니고!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인가요? 당신들 내가 누군지는 알고 있어요?”
불쾌함에 소리를 지르자 남자들은 움찔했다. 역시 이름을 들먹이는 건 최고의 방패가 되어 주는군.
그러나 움찔거리기만 할 뿐 물러설 기미가 없었다.
“이유라도 좀 들어 보죠.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합니까?”
“아가씨께서 아티팩트를 착용하고 카지노에 입장했다는 신고가 들어와서요.”
누가 그런 신고를 해? 그리고 아티팩트? 나한테 그런 물건이 있을 리 없잖아!
나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가면부터 시작해 귀걸이, 반지, 팔찌를 풀었다. 그러고 보니 이 싸구려 팔찌를 아직 차고 있었네.
액세서리를 모두 빼서 탁자 위에 신경질적으로 내려놓자, 두 사람은 이번엔 액세서리를 검사하기 시작했다.
마법 도구처럼 생긴 기계는 내내 조용하다 낡은 팔찌 앞에서 갑자기 삐삐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무언가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듯 기쁜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뭔데? 나한테도 좀 알려 줘! 저게 지금 아티팩트라는 얘기야?
“백작님께 보고하고 오겠습니다.”
한 명은 신이나 뛰쳐나갔고, 나머지 한 명은 여전히 날 감시하기 위해 방에 남아 있었다.
상황을 보니 아무래도 아티팩트가 맞는 모양인데, 마냥 어리둥절한 나는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야기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퍼즐 조각이 좀 더 필요할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