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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17)화 (16/159)

17화

“땅을 줄 테니 돈을 달라고?”

“네.”

일리온은 턱을 괴고 날 바라보았다. 반나절 내내 방에서 고민하다 겨우 내린 답이었지만 일리온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왜?”

“생각을 해 봤는데, 제가 그 땅을 개발하는 건 아무래도 어려운 일인 것 같아요. 산에 갈 때마다 멀미도 너무 심하고, 인부들 땀 냄새도 싫고, 날도 덥고, 살도 타고…….”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밑밥을 깔기 시작했다. 막상 해 보니까 별로더라 하는 철부지 컨셉에 어긋나지 않을 정도로만 투덜대며.

“정원을 가꾸고 싶던 거 아니었나?”

“물론 아주 아쉽답니다. 하지만 자원을 낭비할 수는 없으니까요. 마석은 제국에서도 아주 유용한 자원이잖아요? 그러니 공작님께 드릴게요.”

“대신 돈을 달라는 얘기인가?”

“네!”

일단 내 쪽에서 파혼 얘기를 꺼내는 건 보류하기로 했다.

개발 역시 할 생각이 없었다. 그 땅에 투자해 봤자 투자비를 뽑기도 전에 반역죄로 몰수당할 텐데, 아등바등할 이유가 없었다.

땅에 집착하다 단두대의 이슬이 될 바에는, 차라리 깔끔하게 일리온에게 땅을 넘기고 돈을 취하는 편이 나았다.

“땅문서예요. 드릴게요.”

공작은 서류를 가만히 바라보다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는 흰색 종이 뭉치를 꺼냈다. 저게 뭐지?

“거절하도록 하지. 아무런 대가 없이 투자할 생각은 없으니 그대에게 걸맞는 대가를 지불하겠네.”

그가 꺼낸 물건은 흰색 백지 수표였다. 네가 왜 거기서 나와? 내가 원한 그림은 이게 아니었는데?

나는 일리온의 사인이 적인 종잇조각을 손에 들고 얼떨떨한 표정으로 집무실을 나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드레스 하나 가지고 사 주느니 마느니 하던 인간이 갑자기 백지 수표 다발이라니.

별 볼 일 없는 약혼녀에서 비즈니스 파트너로 격상됐으니 걸맞은 대우를 해 주겠다 뭐 이런 건가? 하지만 아쉽게도 전혀 기쁘지 않았다.

방으로 돌아온 나는 흰색 종이 뭉치를 한쪽에 던져 버리고 이불 안으로 파고들어 몸부림을 쳤다.

역시 미신은 미신일 뿐이었다. 알고도 산 거지만 그래도 열 받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망할 사기꾼 점쟁이 같으니라고!

계획했던 것과 많이 어그러진 상황에 나는 침대 위를 휘저으며 몸을 비틀었다.

“이번엔 또 뭐 때문에 그러시는 거예요?”

비장하게 나가더니, 풀이 죽어 돌아온 날 보는 릴리는 이제 놀랍지도 않다는 듯 물어 왔다.

“릴리, 접시에 물 좀 담아 준비해 줄래?”

“왜요?”

“코 박고 죽게.”

“참, 아가씨께서 후작 부인 연회에 간 게 신문에 실렸더라고요. 보실래요?”

릴리는 내 헛소리를 능숙하게 무시하며 신문을 건넸다.

“유명인이란 참 바쁘다니까.”

않는 너스레를 떨며 릴리가 건넨 신문을 펼쳐 보자, 한쪽 구석에 후작가 저택에서 열렸던 연회 사진과 함께 짤막한 기사가 보였다.

“그나저나, 파티도 다사다난했나 보네요. 익명의 남작분께서 담배를 피우다 물벼락을 맞질 않나, 어떤 영애는 샴페인을 뒤집어썼다네요. 정말이지, 아가씨처럼 칠칠치 못한 분이 또 계셨었나 봐요.”

“……그, 그러게.”

전부 다 내 얘기인 듯 보였지만, 난 대충 얼버무리며 신문을 넘겼다.

‘어디 재밌는 기사 없나.’

무료하게 페이지를 넘기다 내 눈에 띈 기사가 하나 있었으니,

“이거다!”

“네? 뭐가요?”

“릴리, 채비해.”

“……네? 어딜 가시려고요?”

오늘 아침의 일로 일말의 신뢰가 회복되었지만 역시나 그 깊은 불신의 늪을 메우기엔 모자랐는지, 릴리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난 신문에 실린 광고면을 릴리에게 보여 주었다.

그래, 처음부터 부동산으로 방향을 틀었던 게 잘못이었다. 처음부터 이 노선으로 정했어야 했어. 돈 쓰는 데는 도박만큼 무서운 것도 없지!

신문에 실린 카지노 광고를 본 릴리는 오늘 본 표정 중에 가장 안 좋은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

수도의 변두리에는 카지노를 비롯한 수많은 향락시설이 즐비해 있었다.

할렘가와 조금 다른 점은, 귀족들이 많이 드나들기 때문에 치안에 좀 더 신경을 썼다는 정도?

날 따라오는 릴리는 왜 이런 곳엘 굳이 찾아오느냐고 걱정 어린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아무리 치안이 좋을지언정, 평범한 거리와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으니까.

“그보다, 이거 쓰면 나인 거 알아보겠어?”

수려하게 빠진 나비 모양 가면을 쓰며 묻자 릴리가 미간을 찌푸렸다. 정체를 숨기기 위해 카지노에 오기 전 마을에 들러 사 온 가면이었다.

“아가씨를 아시는 분이라면 알아볼걸요.”

그럼 곤란한데. 나는 황급히 화장품을 꺼내 입술 옆에 점을 찍었다.

“이러면?”

“그러면…… 못 알아볼지도…….”

릴리가 자신 없게 중얼거렸다. 역시 이게 통하는 건 드라마뿐인가.

“자자, 그만 울상 짓고 릴리도 어서 가면 써.”

“정말 들어가실 거예요?”

“그게 아니면 왜 여기까지 왔겠어?”

“……하아.”

릴리가 긴 한숨을 푹 내쉬며 내 뒤를 따라왔다.

카지노 입구는 아직 낮임에도 불구하고, 번쩍번쩍한 조명을 잔뜩 밝혀 놓았다. 이 주변에서 가장 크고 눈에 띄는 건물답게 외벽에도 상당히 신경을 쓴 모양이었다.

입구를 지나 칩을 교환하는 곳에 도착한 나는 백지 수표에 5,000골드를 적어 교환원에게 내밀었다.

“아가씨, 정말 이걸 다 교환하신다고요?”

릴리가 놀라 되물었다.

“그럼. 공작님께서도 마음대로 쓰라고 하셨는걸?”

“아무리 그러셔도, 이건…….”

내 대답에 릴리는 머리가 아픈 모양인지 이마를 부여잡았다.

물론 나도 이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금액인지는 알고 있다.

하지만 애매하게 행동해 봐야, 시간만 흐를 뿐이었다. 지금은 일리온에게서 벗어날 좀 더 확실한 한 방이 필요했다.

만약 돈을 갚으라고 으름장을 놓는다고 해도 그때 가서 땅을 넘긴다고 하면 그만이다. 오히려 갚으라고 한다면 나야 환영이었다.

‘어차피 땅을 넘긴다고 할 거, 좀 더 적을 걸 그랬나?’

수표를 받아 든 직원은 수표 하단에 사인을 흘끗 보더니 깜짝 놀란 얼굴로 내 얼굴을 살폈다.

그리곤 처음 보는 물건으로 스캔을 해 보았다. 아무래도 수표가 진짜라는 걸 확인하는 작업인 듯 보였다.

“칩의 최소 단위는 1실버에 해당하는 10포인트, 최대단위는 100골드에 해당하는 백만 포인트입니다. 어떻게 교환해 드릴까요?”

어차피 여기서 오래 즐길 생각 없었다. 저 많은 칩을 주렁주렁 들고 다니기도 귀찮고.

“전부, 백만 포인트짜리 칩으로 바꿔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높은 숫자 혹은 낮은 숫자로 교환하시고자 하면 카지노 내부의 교환창구를 이용해 주세요.”

칩을 받아 들고 찬찬히 안을 둘러보자 안은 바깥과 또 다른 모습이었다.

평일의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이 도박을 즐기고 있었는데, 마치 라스베이거스를 배경으로 한 영화의 한 장면을 구경하는 기분이었다.

한쪽에서는 환호성을 지르기도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한숨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카지노를 가 본 건 현실에서도 없었기에 조금 긴장한 채로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마석으로 돌아가는 슬롯 머신부터, 주사위, 룰렛, 카드 게임까지 종류는 다양했다.

무료로 제공되는 음료와 음식까지, 돈만 있다면 이보다 더 즐거운 놀이터는 없을 것이다.

게임을 쓱 스캔한 나는 하나를 정하고 테이블에 앉았다.

카드 게임은 룰을 모르겠고, 슬롯 머신은 한 판당 베팅 금액이 적었기에 5,000골드를 소진하기엔 많은 시간이 걸릴 듯했다. 그래서 고른 게임은 룰렛이었다.

어디 그럼 공익 광고 한 편 찍어 볼까.

테이블에 앉자, 기존에 게임을 하던 옆 사람이 날 힐끔 바라보다 내가 테이블에 내려놓은 칩을 보고 입을 떡 벌렸다.

“아이고, 부잣집 영애께서 도박에 취미가 생긴 모양입니다?”

“네. 좀 놀아 보려고요.”

“게임은 처음이신가?”

“네.”

“잘 앉으셨네! 그래. 안 그래도 내가 이 카지노 터줏대감이거든. 내 말대로 하면 아가씨도 돈 좀 쏠쏠하게 딸 거야. 일단 처음이면 홀짝이나, 색깔을 골라 찍는 게 안전…….”

“4번에 백만 포인트 칩 다섯 개요”

“!”

내가 게임 룰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자신만만하게 설명하려던 남자의 말을 자르며 나는 4번에 칩 5개를 베팅했다. 돈으로 따지면 500골드였다.

칩을 숫자 보드에 올리자마자 주변의 시선이 한순간에 내게 쏠렸다. 좀 적당히 부를 걸 그랬나?

“아가씨…….”

릴리마저 옆에서 울상을 지으며 내 팔을 잡아당겼다.

하지만 최대한 빠르게 돈을 탕진하는 게 목적이었기에 한 판당 가능한 베팅 최고 금액을 쏟아부었을 뿐이었다.

이걸로 10판 빠르게 하고 집에 복귀하는 게 오늘의 목표였다. 도박에 큰 흥미도 없거니와 아는 척하는 남자 옆에서 훈수를 듣고 싶은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이야, 씀씀이가 대단하시네. 하지만 4번에 올인하는 것보다는 분산해서 베팅하는 게 돈을 딸 확률이 높지.”

남자는 내 선택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100포인트 칩 두 개를 검은색에 베팅했다. 아는 척, 잘난 척을 그렇게 하다니 베팅은 소심했다.

“이번엔 검은색이 될 것 같거든.”

“아, 예.”

자리를 잘못 잡았네. 나는 가면을 쓰고 와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미간을 구겼다.

딜러가 베팅 종료를 알리고, 쇠 구슬을 던졌다.

달그락 소리와 함께 어지럽게 돌아가는 룰렛이 천천히 속도가 줄어들고, 구슬이 들어간 번호가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숨을 멈추고 시선을 한곳으로 고정했다.

그러나 그들의 시선이 멈춘 곳은 룰렛이 아닌 나였다.

나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딜러를 바라보았다. 딜러도 믿을 수 없다는 듯 룰렛과 보드를 번갈아 보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딜러는 어렵사리 입술을 뗐다.

“사, 4번, 블랙, 짝수입니다.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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