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오늘도 해가 밝구나.’
이 세계의 태양은 어쩜 이리도 부지런한지 모를 일이다. 이왕 부지런할 거면, 새벽이 아니라 내 어두운 미래나 좀 밝게 비춰 줄 것이지.
평소에 일어나던 시간이라 자동으로 눈이 떠졌지만, 일어나기 싫은 나는 일부러 이불 속에서 눈동자만 굴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 어떻게 방에 돌아온 거지? 세바스찬이 데려다줬나?
세바스찬과 술을 마셨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중간부터는 기억이 없었다.
내 주량을 너무 과신한 모양이었다. 몸이 바뀌었으니, 주량도 바뀌는 게 당연한데. 적당히 마실걸.
“아가씨, 안녕히 주무셨어요?”
막 방에 들어온 릴리가 인사를 건넸다.
“응.”
“그럼 준비하세요. 아침 드셔야죠.”
어차피 오늘도 일리온은 아침을 안 먹는다고 할 텐데, 굳이 준비할 필요가 있을까?
“30분만 더 잘래.”
“네? 그럼 시간이 부족한데요?”
“대충 씻고 머리만 빗고 내려가면 되지.”
“하지만, 공작님께서 오실지도 모르는데.”
“하루 이틀도 아니고 보름 가까이 안 오던 사람이 오늘이라고 올 리 없잖아. 서당 개도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만유의 영장인 인간은 그보다 더 똑똑해야 하지 않겠어? 그러니 똑똑한 나는 좀 더 잔다.”
“서, 서당? 네?”
어리둥절해하는 릴리를 뒤로하고 나는 다시 꿈나라로 빠져들어 갔다.
“아가씨! 어서 일어나세요! 어서요!”
다시 잠에 빠진 지 몇 분이나 지났을까, 릴리가 황급히 깨우는 소리에 억지로 눈을 뜨고 일어났다.
“왜 또. 좀 더 자도 된다니까.”
“그게 아니라, 공작님께서 지금…….”
“지금 뭐?”
“식당에서 아가씨를 기다리고 계시다고…….”
“…….”
내가 아직 꿈에서 덜 깼나?
“뭐?”
아직 졸린 눈을 비비며 물었다.
“지금 당장 식당으로 가셔야 해요.”
흐릿한 시야로 울상을 짓는 릴리의 얼굴이 보였다. 보아하니 꿈은 아닌 모양이다. 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오늘은 아침을 먹겠다는 거야.
아무리 만유의 영장이라도 역시나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가 보다.
나는 삐걱거리는 근육들을 억지로 끌어당기며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대 앞에 앉았다.
자다 일어나 뻗친 머리카락들이 정신 사납게 시야에서 아른거렸다. 릴리는 그 뻗친 머리를 안절부절못하며 빗고 쓰다듬고, 난리였다.
“천천히 해도 돼.”
“무슨 소리세요? 공작님께서 기다리시는데.”
“하아암. 평소엔 내가 기다렸잖아? 한 번쯤 기다릴 수도 있지?”
내가 하품을 늘어지게 하며 말하자 릴리가 한마디 거들었다.
“그러다 공작님께서 아가씨를 싫어하시면 어떡해요.”
“……음 그거 괜찮네. 나 좀 더 잘 테니까 이따가 저녁때 깨워 줄래?”
정말로 좋은 생각인 것 같아 진심으로 말하자 릴리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날 바라봤다.
“노, 농담이야. 당연히 가야지.”
정색하는 릴리는 무섭기 때문에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역시 이 저택의 먹이사슬 최하위는 나인 것이 분명하다.
***
곧 세상이 멸망이라도 할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릴리와는 다르게, 난 느긋하게 식당 문을 열어젖히고 들어가 공작에게 인사를 건넸다.
“어머나, 공작님. 오래 기다리셨어요?”
“좀 늦었군.”
“어젯밤에 공작님을 생각하다 설레서 잠을 잘 이루지 못해 늦잠을 자 버렸지 뭐예요.”
“그런 것 치곤 꽤 잘 잔 모양이야.”
“이불이 너무 푹신해서, 잠은 언제나 푹 자고 있답니다.”
공작은 어이가 없다는 날 바라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태연하게 자리에 앉았다.
내가 올 때까지 밥을 안 먹고 기다린 모양인지, 자리에 앉자마자 하녀들이 음식을 내왔다.
평소와 다르게 수프도 빵도 갓 요리한 것처럼 따뜻했다. 그래, 오늘은 공작이 먹는 음식이니까. 별 볼 일 없는 약혼녀가 아니라.
이미 해탈한 나는 오늘이 아니면 먹기 힘들 따뜻한 빵에 버터를 발라 입에 넣었다.
“그대가 얼마 전에 산 땅에서 마석이 나와서, 마법사를 고용해 그 땅의 가치를 감정해 봤네.”
“……?”
빵을 목구멍으로 넘기며 일리온을 바라보았다.
“상당한 양의 마석이 매장되어 있다더군.”
“네?”
마석? 그게 왜 거기서 나와?
마석은 소설 속에서 종종 등장하던 물건이었다. 기계를 움직이는 동력원이 되기도 하고, 마나가 없는 사람도 마법을 쓸 수 있게 도와주는 물건이었다.
소설 속 라벤느는 마석을 사용해 성녀를 해칠 계획도 세웠었다.
모를 수 없는 물건이긴 하지만, 평범한 바위산에서 나올 만한 물건은 아닐 텐데?
역시 아직 꿈에서 덜 깬 게 분명했다. 그래, 일리온이 밥을 먹으러 온 것부터가 말이 안 돼. 이건 분명 꿈일…….
“그래서, 셀레스타인 상단에서 그 산에 투자를 하는 게 어떨까 싶은데.”
“네?”
투자라고? 진심인가? 나는 일리온 몰래 들고 있던 포크로 허벅지를 찔렀다. 눈물이 찔끔 맺힐 정도로 아픈 걸 보니 꿈은 아닌데…….
“저……, 그래서 매장된 마석이 얼마나 되는데요?”
“감정하기론 20만 골드에서 30만 골드 사이로 예상하더군.”
빠릿빠릿하게 돌아가지 않는 뇌가 어딘가 버퍼링이 걸린 듯 덜거덕거렸다. 내가 저걸 얼마에 샀더라……. 분명 2천 골드…….
“네?!”
사람이 살다 보면, 예기치 않은 일들을 맞닥뜨리곤 한다. 그래, 세상이 생각대로만 돌아가면 얼마나 좋겠어.
가끔 고난과 역경이 찾아와 양 뺨을 후드리 찹찹 때려도 이겨 내야 하는 법이지. 그래…….
아니 근데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니야? 대체 그 쓰레기 땅이 왜 갑자기 노다지 금싸라기 땅이 되는 거지? 대체 왜?
아침부터 바보같이 ‘네?’만 반복하다가 식사를 마친 나는 멍하니 내 방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대로 한숨 자고 일어나면 아침에 일어났던 일은 모두 꿈이었다 하는 행복한 일은 일어나지 않으려나?
“역시, 아가씨께서는 다 생각이 있으셨군요.”
난 고개만 살짝 돌려 릴리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소식을 들었는지 릴리가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전 아가씨가, 정말 어딘가 아프신 게 아닐까 걱정했어요. 갑자기 덜컥 대출을 받아 땅을 사시질 않나, 사이비 종교나 점 따위에 관심을 두시지 않나……. 하지만 다 뜻이 있으셨던 거네요.”
“……그래, 있었지. 아주 원대한 뜻이.”
나는 허망하게 웃으며 릴리를 바라보았다. 20만 골드? 그게 다 무슨 소용인데? 일리온이 반역 일으키면 죄다 황제한테 몰수당할 재산인데.
애초에 그 땅으로 뭔가를 해 볼 생각은 전혀 없었다. 도망칠 때 필요한 건 현금이지, 부동산이 아니니까.
내가 구매할 때처럼 동네 뒷산보다도 못한 가치라면 황제도 그걸 내가 소유하든, 일리온이 소유하든, 이 저택을 종종 휘젓는 도둑고양이가 소유하든 별 관심 없을 테였다.
하지만 마석이 나온 이상 일리온의 재산을 몰수할 때 몰수 목록 1순위에 들어가 있겠지.
가치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나한테는 오히려 마이너스인 물건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일리온은 나를 무슨 비즈니스 파트너처럼 생각했다.
‘상단의 자금을 투자하도록 하지. 어차피 그대 혼자 그 땅을 개발할 수는 없을 테니까.’
‘네?’
‘개발의 총책임은 그대가 맡도록 해. 혼자서 힘들 것 같다면 유능한 사람을 붙여 주지.’
‘……왜요?’
‘그대 소유의 땅이니 당연하다고 생각되는데. 그리고 곧 결혼할 사이이니, 내 쪽에서 투자하는 게 가장 좋은 그림 아닌가? 다른 곳에서 말 나올 일도 없고.’
나는 머리를 짚었다. 차라리 내 쪽에서 위자료 대신 땅을 줄 테니 파혼하자고 할까?
시도할 가치는 있지만, 리스크가 너무 컸다.
사람들의 시선이나 평판에 신경을 쓰는 남자가 과연 이걸 받아들일까 하는 점이 우선 불확실했다.
그리고 내가 먼저 파혼을 제안하면 지금껏 해 온 짓이 모두 그와 파혼하기 위해서라는 게 드러날 텐데, 그것이 밝혀졌을 때 자신을 능욕하려던 약혼녀의 요청을 순순히 들어주겠느냐는 것이 두 번째 걱정이었다.
막말로, 일리온이 열 받아서 어차피 결혼하면 네 땅이 내 땅인데, 파혼해서 쓸데없이 구설에 오를 바에야 결혼을 강행해 버리겠다고 선언하면 어쩔 것인가?
갑자기 과부하가 된 머리가 또다시 파업에 들어갔다.
“그나저나, 이건 어디서 나셨어요?”
이불 속에서 머리만 부여잡고 꼼지락대자 화장대 서랍에서 액세서리를 발견한 릴리가 물었다.
“아, 그거. 저번에 점쟁이가 집에 온 적 있잖아.”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을 끄집어냈기 때문일까, 분위기가 급격하게 다운된 릴리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기억하죠. 아가씨께서 직접 유령을 퇴치해 달라고 부르셨는데 어떻게 잊겠어요? 복채 줄 때까지는 절대 안 나가겠다고 해서 그날 제가 세바스찬 님께 얼마나 사과를…….”
한참을 기억을 곱씹던 릴리가 획 하며 고개를 돌렸다.
“설마, 이것도 그때 그 사기꾼한테서 사신 거예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기꾼이라니.”
뭐 나도 그 의견에 이견은 없지만.
“얼마 주고 사셨어요?”
“세 개 합해서 1골드?”
“세상에 누가 줘도 안 가져갈 싸구려 구슬로 만든 장신구에…… 1골드나 쓰셨다고요? 세바스찬 님께서 용케도 허락하셨네요”
실은 뒤에 0 하나를 뺀 거지만 릴리의 반응을 보니, 빼길 잘한 것 같았다. 속여서 미안.
저택의 재정 관리는 세바스찬이 주로 하고 있었고, 그 재정엔 내 생활비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 필요한 게 있으면 세바스찬에게 돈을 달라고 요청해 구매하곤 했는데, 그날도 적당히 세바스찬한테 액세서리를 사고 싶다고 해서 받은 돈이었다.
릴리의 한 달 월급이 2골드 정도였으니, 그걸 고려하면 10골드란 꽤 큰돈이었지만, 여기가 어디인가?
제국의 태양조차도 함부로 못 한다는 셀레스타인 공작가이다. 돈이 발에 채게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드레스 하나에 쩨쩨하게 이래라저래라.
아, 갑자기 이야기가 딴 대로 샜네. 아무튼, 1골드든 10골드든 이걸로는 일리온 재산에 아무런 타격도 안 간다. 내가 쓴 줄도 모르겠지.
저 물건을 산 것도 딱히 일리온한테 어떻게 해 보겠다는 생각으로 구매한 건 아니었다. 그저, 사람이 힘들면 미신 같은 것에라도 의지하고 싶고 그러지 않는가?
그래서 샀다.
원하는 사람한테 미움받게 해 준다는 장신구. 그것도 세 개나.
난 비장한 표정으로 장신구를 양손에 착용했다. 이걸 착용한다는 건 내가 궁지에 몰릴 대로 몰렸다는 걸 인정하는 것 같아 싫었지만, 지금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다.
그런데 진짜 일리온이 날 싫어하게 되는 거 맞아? 착용해도 아무런 변화도 없는데?
나는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처럼 너덜거리는 팔찌를 살펴보았다. 장신구를 살짝 들쳐 뒷면을 바라보자 거기엔 ‘MADE IN CHINAA’라고 적혀 있었다.
“릴리, 여기가 어디야?”
어딘가 많이 익숙한 글자에 릴리를 보여 주며 물어보자 릴리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이웃 나라예요. 이 나라 제품은 저렴해서 좋은데 품질이 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