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15)화 (14/159)

15화

낮에 마차에서 잤기 때문인지, 밤이 늦었지만 두 눈은 말똥거렸다.

침대에 누워 한참을 눈만 꿈벅이다 결국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주방에가서 물이나 한잔 마실까 하며.

이미 모두 잠자리에 들었을 시간이라 저택은 조용했다.

아무도 없을 거라 기대하며 주방에 도착하자, 안쪽에서 작은 불빛이 새어 나왔다.

“세바스찬?”

누군가 싶어 살짝 고개를 빼꼼히 내미니, 세바스찬의 모습이 보였다.

“아가씨? 이 시간에 여긴 어찌한 일로…….”

생각지도 못한 등장에, 놀란 표정이었다.

“잠이 안 와서요.”

“그러셨군요. 실은 저도 잠이 안 와서 한잔하려던 참인데……. 괜찮으시면 같이 하시겠어요?”

내 대답에 세바스찬은 웃으며, 들고 있던 술병을 내게 보여 주었다.

“그래도 되나요?”

“아가씨께서 좋아하실지 모르겠지만…….”

세바스찬도 참. 별걸 다 걱정하네.

흔쾌히 그의 제안을 승낙하며, 냉큼 세바스찬의 맞은편에 앉았다.

세바스찬은 내게 잔을 내밀고, 술을 조금 따라 주었다.

“이건 무슨 술이에요?”

“포도주에요. 공작령 중 델라스라는 곳의 포도가 유명하거든요. 덕분에 저택엔 괜찮은 포도주가 많답니다.”

그런 고급 정보를 이제야 알려 주다니! 공작저에 온 보름간의 시간을 손해 본 기분이었다.

그가 건넨 술은 생각보다 달콤해 맛있었다.

순식간에 한 잔을 비우고 컵을 내밀자 세바스찬은 빈 잔을 채워 주며 물었다.

“오늘 연회는 어떠셨나요?”

“뭐, 많은 일이 있었죠.”

나는 마지못해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정말 많은 일이 있었지. 차마 세바스찬에게 다 털어놓을 수 없는 게 아쉬울 정도였다.

“별로 즐겁지 않으셨나 보네요.”

혼자 가도 재미없는 자리를 일리온과 동행한 것도 모자라, 사교계 신고식까지 거하게 치렀으니.

재미가 아니라, 10년 치 액땜이라도 하고 온 기분이었다. 하지만 난 고개를 저으며 거짓말을 했다.

“그럴 리가요. 즐거웠어요. 음식도 맛있었고. 또…….”

다만, 안타깝게도 더 이상 생각나는 게 없었다. 음식마저 맛이 없었더라면 얼마나 끔찍했을지.

“혹시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말없이 술잔을 바라보자 세바스찬이 한 번 더 물었다.

“일은 무슨, 별일 없었어요! 참, 세바스찬, 혹시 다른 술은 없어요?”

“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들을 지워 내기 위해, 일부러 호들갑을 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은 제가 칵테일을 조금 만들 줄 알거든요!”

***

집무실 불을 끄고 나오던 일리온은 소란스러운 소리에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시종들은 모두 잠자리에 들었을 시각이었다.

저택의 규칙을 모르는 이가 남아 떠들고 있는 모양이었다.

후작 부인의 연회에서 돌아오자마자 쉬지도 못하고 밀린 일을 하고 나온 참이라 피곤이 몰려왔지만, 그냥 무시하기엔 신경이 쓰였다.

가벼운 주의라도 줄 생각으로 일리온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제 얘기 좀 들어 보라니까요? 어떻게 약혼반지를 그렇게 줄 수 있어요? 결국, 그것 때문에 제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알아요?”

“그, 그건…….”

“물론, 반지를 잃어버린 건 잘못했어요. 근데! 끼워 줬으면 아무 일 없었을 거 아니에요? 그렇죠?”

“그, 그렇죠. 아가씨 말씀이 맞습니다.”

그러나, 이 꼴을 볼 거라면 그냥 방으로 돌아가는 편이 나았을 듯했다.

일리온은 소란의 정체를 깨닫고 괜한 걱정을 했다며 후회했다.

“하지만! 그것도 포함해 역시 제 잘못이 맞는 것 같아요.”

“……네?”

열변을 토해 내던 라벤느는 갑자기 태도를 바꾸었다.

“그러니까, 전 합당한 대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가씨?”

“그러니 내일은 공작님께서 제게 요구하시겠죠.”

“뭘 요구하실 거란 말씀이세요?”

“그야, 물론…….”

꾸벅거리며 라벤느는 기어이 테이블에 고개를 기대고 잠이 들었다.

“물론? 아, 아가씨?”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일리온은 고개를 저으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뭐 하나? 주정뱅이를 상대로.”

뜻밖의 손님에 세바스찬이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주인님. 아직 안 주무셨습니까?”

일리온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서너 가지의 술과 얼음, 과일들이 테이블 위를 어지럽게 장식하고 있었다. 그냥 보기에도 세바스찬의 취향은 아니었다.

“영애의 술 취향인가?”

“술에 조예가 깊으시더군요. 칵테일이라는 걸 만들어 주셨습니다.”

조예가 깊다라니. 설마 이 꼴을 보고 그 말을 믿을 거라 생각한 건가.

그나저나, 이렇게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연회에서 한 잔도 마시지 않았다니, 조금 의아했다.

“마침 잘 오셨습니다.”

세바스찬은 일리온을 보며 빙긋 웃었다. 일리온은 무슨 얘기냐는 표정으로 세바스찬을 바라보았다.

“안 그래도 아가씨를 어떻게 방까지 모시고 가야 하나 걱정했거든요.”

“그래? 그럼 수고하게.”

“어딜 가십니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으로 가려던 일리온은 세바스찬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내 방.”

“아가씨는 어쩌고요?”

“사람을 시켜.”

“시종들은 모두 자러 갔는걸요?”

“그럼 자네가 가게.”

“전 여길 치워야죠.”

일리온은 테이블 위에서 새근거리는 라벤느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귀찮은 일이었다.

“그럼 부탁드릴게요.”

다시 한번 거절하려던 일리온을 제치고, 세바스찬이 먼저 말을 건넸다. 그는 이미 양손에 빈 술병을 들고 테이블을 치우고 있었다.

역시 그냥 방으로 돌아갈 걸 그랬다.

일리온은 5분 전의 판단을 후회하며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규칙적인 발걸음 소리가 잔잔히 복도를 울렸다.

방으로 가는 길은 조용했고, 이따금 창밖에서 벌레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음…….”

양팔에 가만히 안겨 있던 라벤느가 몸을 들썩이더니 눈을 떴다.

“일어났나?”

일어났으니 직접 걸어서 방에 돌아갔으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제 바람과 다르게 라벤느는 졸음이 가득한 눈을 깜박일 뿐이었다.

그러더니 느릿한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일리온……? 꿈……인가?”

팔자 좋군. 일리온은 끝까지 태평한 그녀를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진짜 일리온이야?”

공작님이란 호칭도 모두 빼 버린 채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그러더니 손을 뻗어 제 볼을 콕콕 찔렀다.

‘하, 이대로 던져 버릴 수도 없고.’

술 취한 사람을 상대로 화를 내는 건 득보다 실이 많았다. 일리온은 침묵을 택했다.

“아, 반응이 없는 걸 보니 꿈이 맞구나. 하긴 진짜였으면 벌써 한 소리 했겠지.”

그녀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다, 뭐가 재밌는지 까르르 웃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기대며 다시 눈을 감았다.

“오늘 연회에 다녀왔는데…….”

그리곤 여전히 느릿한 말투로 속삭이듯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다녀와 보니까 왜 그렇게 싫어했는지 알 것 같더라.”

일리온은 무심한 표정으로 앞만 바라보았다.

조용한 복도엔 라벤느의 목소리와 그의 발소리만 잔잔하게 울렸다.

“세상엔 참 못된 사람이 많은 것 같아. 이유 없이 다른 사람을 싫어하는 사람도 많고. 머리카락 색이나, 눈동자 색이 다르다고 해서 비난받을 이유는 아니잖아.”

가만히 듣고 있자니, 낮에 있었던 일을 얘기하는 모양이었다.

좀처럼 끝나지 않을 술주정에 일리온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말에 대꾸했다.

“비난받을 이유는 아닐지라도, 감수해야 하는 일이야.”

“왜?”

“그런 자리니까.”

한 치의 고민도 없는 대답이었다.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네.”

일리온은 말없이 걸었다. 그의 침묵에는 동의도 포함되어 있었다.

한참 잠잠하던 라벤느가 고개를 들었다.

“그걸로 괜찮아?”

“뭐?”

“넌, 그래도 괜찮아?”

녹색 눈동자가 느리게 깜박이며 자신을 올려다봤다.

괜찮냐고? 왜 그런 걸 물어보지?

일리온은 문득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제자리에 멈춰 선 일리온은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쓸데없는 걸 물어보는군.”

“왜 쓸데없어? 네 기분을 물어보는 건데?”

“…….”

왜냐니. 자신에겐 너무 당연한 얘기라 한 번도 의문을 가져 본 적이 없는 질문이었다.

일리온은 또 한 번 입을 다물었다.

“꿈이라 그런가, 이게 내 상상력의 한계인가 봐.”

그렇게 말하는 라벤느는 고개를 저었다.

“미안해.”

“……뭐가?”

“난 네가 다른 사람의 말에 상처받지 않을 거라 생각했어.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럴 리 없겠더라. 너도 결국은……, 그냥 평범한 사람인걸.”

“평범……?”

일리온은 라벤느의 말을 되뇌며 물었다.

아직 졸음이 가시지 않은 모양이었지만, 두 눈은 오롯이 자신을 비추고 있었다.

“혼자서 견디느라 많이 힘들었겠다, 너도…….”

라벤느는 손을 뻗어 이번엔 일리온의 볼이 아닌 머리카락을 살며시 쓸어 넘겼다.

그렇게 머리카락을 몇 번 쓸어 넘기던 라벤느는 이내 졸린지, 눈을 감고 자신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일리온은 조금 복잡한 표정으로 라벤느를 바라보았다.

한 번도 의심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자신은 늘 감정을 죽여야 한다 교육받았고, 그 말에 충실했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 역시 그저 묵묵히 감내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기분이나 감정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라벤느의 질문은 잔잔했던 일리온의 마음에 동그란 파문을 일으켰다.

속에서 응어리진 무언가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불안했다.

일리온은 버릇처럼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쓸데없는 감정은 버려라. 중요한 건 네가 아니라, 가문이다. 언제나 그 사실을 명심해.’

귀에 못이 박히듯 들었던 선대 공작의 말이 들려오는 듯했다.

일리온은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멈췄던 발걸음을 옮겼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