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이런, 이런, 분위기가 굳었네. 그냥 단순한 오해가 있었던 모양이네요. 자, 자, 오해는 풀고 연회를 계속 즐기도록 하죠. 음악을 좀 더 신나는 거로 바꿔 볼까요?”
그녀가 손짓하자 멈췄던 음악이 다시 연주되었다. 흥을 돋우려는 듯 아까보다 훨씬 경쾌한 음악이.
역시나 이 연회에서 가장 요령이 좋은 사람다웠다. 부인의 한마디에 사람들은 천천히 사건에서 관심을 거두고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물론 이걸로 사건이 다 해결된 건 아닐 것이다.
다만 소곤거리는 입들은 아까와는 다르게 내가 아닌 율리아를 담고 있었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약혼반지를 도둑맞아 상심이 크시겠어요.”
지나가던 귀족이 내게 다가와 위로해 주었다.
왠지 모르겠지만, 며칠 전 읽던 소설책 속 악녀의 대사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어쩔 수 없죠. 공작님께서도 더 예쁜 거로 사 주시겠다고 하셨으니, 거지한테 적선한 셈 치고 잊어야겠어요.”
흘끔 본 율리아의 표정이 무섭게 굳어 가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악녀 입장에서의 그 발언은 꽤나 속 시원한 발언이었던 것 같다. 왜냐면, 나도 속이 시원해졌거든.
“내가 뭘 사 주기로 약속했다는 거지?”
속으로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는데, 뒤통수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억지로 입술을 당기며 뒤를 돌아보았다.
얘는 왜 항상 필요할 때 안 나타나고, 곤란한 타이밍만 골라서 나타나는 걸까.
일리온은 팔짱을 끼고서 내 설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첫날 나를 관찰하던 그 표정으로.
“후작님과 이야기는 잘 끝나셨어요?”
“그래.”
“그럼 저희도 슬슬 돌아가 볼까요?”
나는 애써 말을 돌리며 후작 부인을 불렀다. 자신의 질문이 그대로 넘어가는 것에 일리온은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나는 그럴수록 더욱 유난을 떨며 후작 부인을 찾아다녔다.
돌아간다고 하자, 후작 부인은 많이 아쉬워 하며 꼭 한번 놀러오라 당부했다.
마차가 천천히 후작저를 벗어나자 드디어 연회가 끝났다는 실감이 밀려왔다.
생각해 보면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 정신이 하나도 없는 하루였다. 아침부터 반지도 잃어버리고…….
‘아 참, 반지를 잊고 있었네. 율리아가 가져갔는데 어떻게 찾아오지? 분명 돌아가는 길에 다시 찾자고 했었는데.’
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이 위기를 어떻게 넘어갈까 하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긴장이 풀려서인지 멀미가 다시금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일리온은 어디서부터 방금 전 사건을 지켜본 걸까? 설마 처음부터? 그럼 좀 곤란한데.’
“심각한 표정이군.”
“아침에 잃어버린 반지 말이에요. 그게 좀 걱정돼서.”
“도둑맞았다던 반지?”
처음부터 다 들었냐.
그걸 알고 있다는 건 거의 처음부터 나와 율리아의 싸움을 관전했다는 이야기였다. 그걸 알면 좀 도와주던가. 그걸 보고만 있었어?
무슨 핑계를 대야 할지 몰라서 머리만 굴리고 있는데, 일리온이 한마디 더했다.
“사교계에 경험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꽤 말을 잘하더군.”
“제가 어렸을 때부터 말을 곧잘 한다고들…….”
“그런 말이 아니야.”
나도 알아.
생각할 시간을 벌기 위해 대충 던진 말이 보기 좋게 잘리고 말았다.
일리온은 그 좋아하던 서류도 내버려 둔 채로 보석같이 붉은 눈으로 날 가만히 응시했다.
날 관찰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내가 한동안 대답이 없자 일리온의 단정한 입술이 먼저 열렸다.
“데뷔탕트도 치르지 않은 영애가, 사교계에서 어느 정도 영향력이 있는 사람의 말을 뒤엎기란 쉽지 않지. 그르노블 영애가 멍청하게 굴긴 했지만,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처한 상황에 당황해 반박하거나, 혹은 결백을 증명하려 했을 거야. 하지만 영애는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며 겉으로는 사과하는 척, 여론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더군.”
“제가 아무리 아는 게 없다지만 율리아 양이 절 모함하려는 것도 모르는 바보는 아니랍니다.”
“그거 다행이군.”
“…….”
저거 일부러 추임새 넣는 건가? 나는 손을 꽉 쥐며 일리온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는데, 마침 어제 읽던 로맨스 소설이 생각나더라고요. 그 글의 주인공도 저처럼 도둑으로 모함받았었죠. 그래서 소설에서 읽은 대로 말해 봤을 뿐이었는데 괜찮았나요?”
“……소설을 따라 했다고?”
“네. 그런 다음에 악녀가 주인공의 뺨을 때리려는데 왕자님이 구해 주는 장면이 최고였어요. 하지만 역시 소설이랑 현실은 다르네요. 절 구해 주러 올 왕자님은 없나 봐요. 공작님은 옆에서 구경이나 하신 모양이니까요.”
“논점을 흐리지 말게. 그러니까, 소설에서 본 장면을 흉내 냈을 뿐이라는 건가?”
논점을 흐리는 게 내가 해야 할 일이야. 물타기 몰라?
“저, 그보다 공작님.”
일리온은 팔짱을 끼고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죄송한데 속이 안 좋아서 그러는데…… 마차 좀 세워 주세요. 토할 것…… 우욱…….”
아까부터 참고 있던 멀미에 기어이 속이 탈이 났다.
나는 황급히 입을 막고 고개를 숙였고, 내 행동에 당황한 일리온은 내게서 멀찍이 떨어지더니 마차를 세워 달라 마부에게 요청했다.
마차가 완전히 멈추기도 전에 나는 문을 박차고 뛰쳐나와 숲속 나무를 부여잡고 속을 게워 냈다.
“우웨에엑.”
연기가 아니라, 정말로 속이 안 좋아서 조금만 늦었어도 마차에서 그대로 게워 낼 뻔했다. 아까 디저트를 너무 많이 먹은 모양이었다.
내 아까운 디저트들이 형체도 남지 않은 채 나무의 거름이 되어 버린 처참한 광경을 보고 싶지 않아 애써 시선을 돌렸다.
이렇게라도 일리온의 질문을 피한 건 좋았지만 안타깝게도 내 지능은 게워 낸 거름 덩어리와 함께 빠져나간 모양이었다. 울렁거리는 머리는 돌연 파업을 선언했다.
이 상태로 공작이랑 대화를 이어 나갔다가는 어디서 말실수를 할지 몰랐다.
이렇게 된 거, 일단 아픈 척이나 하자.
손수건으로 입을 닦고 마차로 돌아온 나는 다 죽어 가는 얼굴로 일리온에게 앓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공작님, 제가 멀미가 너무 심해서요. 실례인 줄은 알지만, 좀 누워서 자도 될까요?”
일리온은 기막힌 타이밍에 앓는 소리를 하는 내 행태가 의심스러운 모양이었지만, 아픈 사람을 흔들어 대답을 들을 정도로 나쁜 놈은 아닌지, 짧게 숨을 내뱉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온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상체를 의자에 눕힌 후 잠을 청했다.
자세가 불편하긴 했지만, 워낙 멀미에 시달려서 그런지 눈을 감고 있으면 그대로 잠에…….
“악, 윽, 아야.”
아무리 의자 쿠션이 좋으면 뭐 해. 바퀴 진동이 다 올라오는데.
바퀴가 돌부리에 걸릴 때마다 한 번씩 튕겨 나오는 탓에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저기, 공작님.”
자다 말고 왜 또 부르냐는 듯 그가 귀찮음이 가득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저 무릎베개 해 주…….”
“싫다.”
아니 말은 끝까지 들어 보고 거절하라고.
“공작님은 정말 너무하세요. 아기 새라고도 안 불러 주시고, 아까는 제가 뭐라도 잘못한 것처럼 나무라시고, 이젠 아픈 사람한테 이렇게 매정하게 구시다니.”
내 말에 일리온의 눈썹이 비뚜름하게 세워졌다. 내가 몇 절까지 하나 두고 보는 모양이었다.
“그럼 재킷이라도 빌려주세요.”
어차피 처음부터 무릎베개는 기대도 안 했다. 사람 심리가 첫 번째 부탁을 거절하면, 좀 더 쉬운 두 번째 부탁은 거절하기 힘든 법이거든.
결국 일리온은 무릎베개에 비하면 별거 아닌 두 번째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내게 건네주었다.
일리온의 남색 재킷을 받아 들고 잘 접어서 마차 의자에 놓아두자, 아쉬운 대로 쿠션 역할을 해 주었다.
이런 말 하면 좀 변태 같긴 하지만, 일리온의 재킷에서는 기분 좋은 냄새가 났다.
무슨 꽃향기인지는 나중에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
***
일리온은 잠든 라벤느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생각하면 할수록 이상한 여자였다.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하면서도, 하는 행동은 어딘가 거리감이 느껴졌다.
또 하나 마음에 걸리는 건 지금껏 그녀가 보여 주었던 행동이 어딘가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분명 하는 짓을 보면 철부지 영애들과 다름이 없는데, 오늘 그녀가 율리아를 대할 땐 단순히 철부지라 하기엔 석연찮은 점이 너무 많았다.
그러나 아무리 고민해 봐도 이유를 모르겠다.
사교계를 잘 모르면서도, 그 짧은 순간에 율리아를 주장을 뒤엎을 만큼 눈치도 머리도 좋은 이가, 구태여 자신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을 왜 하겠는가?
그렇다고 라벤느의 행동에 악의가 있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아니었다.
사기당해서 땅을 사거나, 사이비 종교인을 집으로 들이는 행동에 악의라니. 그저 지독히도 바보 같은 짓만 골라 하며 제 인내심을 시험하고 있을 뿐이었다.
‘괜히 생각만 많아지는 것 같군.’
그녀의 말대로 정말 소설 속 대사를 따라 해 위기를 넘긴 것에 불과할 수도 있었다. 스킨십을 시도해 오지 않은 건 아침에 제가 한 말 때문일 수도 있고.
태연하게 자는 걸 보면, 오히려 그편이 더 설득력 있어 보였다.
어느 쪽이든 상황을 꼬아서 해석해 봐야 나오는 건 없었다.
결국, 아직은 판단하기 이르다는 결론을 내리며 일리온은 라벤느를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