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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13)화 (12/159)

13화

나는 또 한 번 멍하니 되물었다. 목격자를 자처한 이는 아까 내게 샴페인을 쏟았던 영애였다. 이름을 모르겠으니 그냥 샴페인 영애라고 하자.

“제가 그 반지를 훔쳤다는 증거라도 있나요?”

“리슈펠트 양께서 훔친 반지를 가방에 넣는 걸 봤으니까요.”

얘는 뭘 목격했길래 이렇게 당당한 거야?

어이없는 표정으로 샴페인 영애를 노려보는 사이 주변의 이목이 우리 쪽으로 집중됐다.

하긴, 다른 사람도 아닌 오늘 처음 사교계에 데뷔한 영애가 도둑으로 의심받고 있으니, 흔한 디저트보다 더 맛있는 안줏거리임은 분명했다.

알고 보니 그 영애가 다름 아닌 셀레스타인가의 차기 공작 부인이라는 것 역시 이 소란에 장작을 더하기 충분했고.

그런데 어쩌나, 난 율리아가 잃어버렸다는 반지를 본 적도 없는데?

“리슈펠트 영애,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해 주시겠어요?”

율리아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고, 주위 사람들은 날 뾰족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은 오늘 받았던 그 어떤 시선보다도 차갑고 날이 서 있었다. 속삭이는 대화 속에는 마치 내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비아냥도 섞여 있었다.

물론 내가 오늘 잘못한 일을 따지자면 당장에라도 손가락으로 꼽아 가며 잘못을 나열할 수 있었다. 그야 걸리는 게 한두 개가 아니니까.

하지만 맹세하건대 율리아에게는 그 어떤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다.

오히려 나야말로 묻고 싶었다. 대체 왜 날 의심하는지!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율리아가 재차 요청했다.

“리슈펠트 양. 제가 영애를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괜찮으시다면 가방을 확인해 봐도 될까요?”

코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으며 난 율리아에게 순순히 가방을 넘겼다.

샴페인 너, 내가 율리아 얼굴 봐서 참는 줄 알아라.

나는 속으로 이를 아득바득 갈며 태연히 웃어 보였다.

내가 훔치긴 뭘….

“어머, 이건…….”

“이거 보세요. 제가 말했잖아요!”

아니, 그게 왜 거기서 나와?

있을 리 없을 거라 장담했던 반지는 믿기 힘들지만 내 가방에서 나왔고, 샴페인 영애는 자기 말이 맞았다며 잘난 듯 콧대를 세웠다.

난 멍하니 율리아가 꺼낸 반지를 바라보았다. 그건 다름 아닌 내가 오늘 아침에 잃어버린 반지였다.

믿기 힘들었지만, 생각보다 그럴듯한 가설이 하나 만들어졌다.

잃어버린 반지를 율리아가 찾았고, 율리아로부터 반지를 건네받은 샴페인 영애가 일부러 내게 샴페인을 쏟아 정신없는 틈에 반지를 내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반지를 잃어버렸다며 과하게 가방을 털어 내는 퍼포먼스를 해 주변의 이목을 집중시킨 뒤, 터트린 거라면?

스스로도 정말 이럴 수 있나 생각해 보았지만, 다른 가능성은 떠오르지 않았다.

이게 바로 귀족 영애식 신고식인가? 날 사회적으로 매장하기 위한 참으로 우아하고 기가 차는 방법이었다.

이 얼마나 좋은 먹잇감인가?

귀족 사회에 대한 지식도, 사교계에 대한 경험도, 자신의 결백을 변호해 줄 인맥도 어디 하나 내세울 게 없는 몰락한 백작가의 여식.

게다가 그녀의 가장 큰 방패인 공작마저 자리를 비운 상태였으니 이보다 요리하기 쉬운 먹이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한다?

만약 일리온 이 자리에 있었다면 이 멍청한 촌극을 빠르게 끝낼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 그를 기다리며 이야기를 길게 끌고 가 봐야 나만 손해였다.

주변 여론은 이미 내가 도둑이라고 믿고 있었으니까.

소문이란 나쁘면 나쁠수록 쉽게 바뀌지 않는다. 이후 진실이 밝혀지더라도, 사람들은 그 사실 여부에 관심이 없다.

그들의 뇌리엔 이 순간 내가 도둑으로 몰렸다는 사실만이 낙인처럼 남을 것이다.

지금 중요한 건 반지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가 아니었다. 그런 증명하기 힘든 일로 이야기를 끌어 봐야 율리아에게 유리할 뿐이었다.

대응을 결심한 나는 고개를 들어 율리아를 마주 보았다.

사교계는 고작 책에서 읽은 몇 마디로 배운 게 다지만, 어차피 사람 사는 세상 다 비슷한 법이다. 그리고 내가 정치질에는 또 일가견이 있거든.

“실은 아까 샴페인을 닦으려고 파우더 룸에 갔다가 주운 물건이에요. 최근에 제가 도둑맞은 약혼반지와 너무 비슷해서, 혹시 반지의 주인이 장물을 구매한 건 아닌가 걱정되어 후작 부인께 따로 조용히 말씀드리려 했는데……. 율리아 양의 물건이었군요.”

“약혼반지……라구요?”

율리아가 되물었다. 그녀의 눈이 잠깐 흔들렸다. 그래 너도 어이가 없겠지. 설마 이게 약혼반지라고 생각이나 했을까?

내가 아무리 무지렁이 약혼녀일지라도 약혼반지를 잃어버리는 머저리일 줄 몰랐겠지. 그래, 나도 몰랐으니까. 하…….

“예. 안타깝게도 약혼식을 치른 지 얼마 안 돼 도둑맞았답니다. 사방으로 수소문해도 결국 찾을 수 없어서 포기했는데 오늘 파우더 룸에서 발견하고 무척 놀랐어요.”

난 살짝 주저하며 말을 이었다. 마치, 이런 말을 이렇게 공개된 장소에서 하고 싶지 않았다는 뉘앙스를 풍기며.

“사안이 사안인 만큼 자세히 조사해야 할 일이라, 조용히 처리하려 했는데……. 물론 율리아 영애를 의심하는 게 아닙니다. 영애께서는 장물인 줄 모르고 구입하셨을 테니까요.”

내 태연한 거짓말에 율리아의 입이 벌어졌다. 율리아의 입장에서 보면 놀랄 일이었다.

아침에 잃어버린 반지가 순식간에 도둑맞은 물건이 된 것도 모자라 이제 자신은 장물을 구입해 버린 게 되었으니 말이다. 아마 내가 이렇게까지 대응할 거라곤 생각지 못한 거겠지.

“거, 거짓말하지 마세요. 그럼 시실리아 양이 거짓말이라도 한다는 건가요?”

순식간에 뒤바뀐 상황에 율리아가 소리쳤다. 너 아까는 날 의심하지 않는다며? 손바닥 뒤집듯 빠른 태세 전환에 기가 찰 지경이었다.

모르고 장물을 살 수도 있는 일이었다. 백작 영애로서 자존심은 좀 상할지언정, 명예가 손상될까 봐 저어되는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그 물건이 장물일 수도 있다는 걸 인정해 버리면 공작의 조사를 피하긴 힘들었다.

그렇기에 오히려 아니라고 우길 셈으로 시실리아를 끌어들인 거겠지만, 그따위 대응을 할 바에는 차라리 인정하는 편이 좋았을 것이다.

“시실리아 양께서 무슨 의도로 절 모함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증거도 없이 계속 절 범인이라 하신다면, 저뿐만 아니라 셀레스타인가에 대한 모함이라고 생각하고 대응하겠습니다.”

공작가의 이름을 들먹이니 시실리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아마도 둘은 내가 당황한 나머지 횡설수설하며 기껏해야 잃어버린 반지랑 너무 똑같아서 자기 건 줄 알았다는 핑계나 댈 거라 예상했을 것이다.

더불어 그녀의 작당에 놀아났다는 걸 처절하게 깨달으며 트라우마 때문에 다시는 사교계에 발붙이지 못하게 할 계획이었겠지.

율리아가 내 반응에 아무 대책이 없는 것만 봐도 그만큼 날 무시했다는 뜻이었다.

정말이지, 날 얼마나 바보로 보았기에 이까짓 바보 같은 촌극을 준비해 놓고 기세등등했던 건지.

“반지는 돌려드리죠. 율리아 양. 어차피 주인을 찾아 드릴 생각이었습니다. 이렇게 공개된 장소가 아니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아쉽네요. 제가 후작 부인께 좀 더 빨리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제 잘못이 큽니다. 부디 용서하시길.”

하지만 이쯤에서 물러서기로 했다.

내가 일리온에게 받은 퀘스트는 얌전히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 해프닝은 해프닝으로 끝나는 게 가장 좋았다. 괜히 일리온 귀에 들어가서 복잡한 일이 생기는 것도 사양이고.

게다가 나는 사교계에 미련이 없지만, 이 두 사람은 앞으로도 이 세계에서 계속 발붙이고 있어야 할 사람들이다.

아무리 행태가 괘씸해도 앞날이 창창한 이들을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짓밟아 놓을 생각은 없었다.

그저 의심받는 분위기를 전환하고, 두 사람에게 내가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인상만 심어 주면 충분했으니까.

“이 물건은 장물이 아니에요. 훨씬 전에 맞춤 제작으로 산 거라고요!”

이대로 사건을 끝내려 하는데 율리아가 소리쳤다. 내가 미안하다고 했을 때 그냥 입 다무는 편이 그나마 네 이미지를 지킬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었을 텐데…….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러세요? 그럼 어디에서 구매하셨는지 알려 주실 수 있을까요? 혹시라도 제가 도둑맞은 반지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내 질문에 율리아는 입술을 꾹 다물어 버렸다.

색이 옅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가게 이름을 잘못 말했다가는 더 이상 해프닝으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그르노블 백작까지 나서야 할 테니까.

그건 알고 있는 모양인지 율리아는 말을 잇지 못했다. 더 이상 내게 덤벼 봐야 자기 손해라는 걸 알고 있는 듯했다.

상황을 살피던 후작 부인이 끼어든 건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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