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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12)화 (11/159)

12화

소설에선 일리온의 과거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다.

서브남주다 보니 그에게 많은 분량을 할애하지 못한 이유도 있겠지만, 일리온은 성녀에게 자신의 과거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었다.

자신의 어려움을 토로하기엔 성녀는 이미 정신적으로 많이 지친 상태였으니까.

대신 한결같은 모습으로 성녀의 옆에 머물며, 그녀의 쉴 곳이 되어 주었다.

마음이 꺾여 버린 성녀가 내뱉는 모진 말에도 상처 하나 받지 않는 단단함과 한결같이 다정한 모습은 내 취향과 맞지 않는 이 피폐물 소설을 계속 읽어 가는 이유이기도 했다.

하지만 문득 그의 과거에 대해 떠올려 보니, 나 역시 일리온에 대해 알고 있는 게 많지 않았다. 마녀의 저주를 받았다는 것과 그리 행복하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것 말고는…….

당당히 걷는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는 여전히 누가 뭐라 하든 절대로 꺾이지도 구부러지지도 않을 것 같은 사람으로 보였다.

마치 세상의 추문 따위는 자신의 지위나 명예에 그 어떤 흠도 내지 못할 걸 확신하는 것처럼.

하지만, 그건 모순 아닌가? 이렇게나 남들의 눈을 신경 쓰는 성격이면서 정말 태연할 수 있나?

“그리고 말이야, 데리고 온 약혼녀도 가관이라니까.”

어느새 두 사람의 대화 주제는 일리온에서 나로 옮겨 갔다.

“그래. 나도 봤어. 어디서 그런 모자란 여잘 데리고 온 것인지. 아까 음식 들고 온 거 봤나? 난 거지가 온 줄 알았다니까.”

“아하하. 안 그래도 적당한 단어가 안 떠오르던데, 거지 맞네, 맞아.”

“…….”

싸늘한 얼굴로 내 욕을 하며 폭소하는 두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일리온만 욕하는 거였으면 그냥 지나치려고 했는데, 내 욕까지…….

안 그래도 오늘 사고 칠 타이밍만 노리고 있었는데, 잘됐네.

일리온이야 잃을 게 많으니, 가만히 있을지 몰라도 난 아니었다.

어차피 웃으면서 미친 척하는 게 컨셉이고 곧 저택에서 쫓겨날 예정이니 머지않아 사라져 버릴 명예-그런 것이 있는지도 의문이지만-를 좀 더 깎는다고 아까울 것도 없었다.

난 최대한 차분한 표정으로 창가 옆에 놓인 화병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화병에서 꽃을 뽑아낸 뒤 안에 담긴 물을 창밖으로 시원하게 쏟았다.

“그런 여자가 안주인으로 들어왔으니 셀레스타인 공작가도 이제 망하는 일만…… 으아아악!”

여전히 일리온을 안주 삼아 담배를 피우고 있던 비셉과 그의 친구는 내가 쏟아부은 물에 기겁하며 위를 올려다봤다.

“……리, 리슈펠트 영애?”

“어머나- 괜찮으세요?”

“이, 이게 무슨 짓입니까? 영애?”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한 두 사람은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내게 화를 냈다.

“연기가 올라오기에 불이라도 난 줄 알았지 뭐예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다 젖었잖아요!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야말로 약한 자에게는 강하고, 강한 자에게는 약한 사람의 표본이었다. 내가 공작이었으면 찍소리도 못했을 텐데.

“보상해 드릴 테니 공작님께 같이 가실래요? 그나저나 제가 아까 이상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음, 뭐라고 하셨더라, 적통이니 어쩌니 나불거려도……? 뭐라고 하셨어요? 거지라는 단어 때문에 잘 생각이 안 나는데.”

내가 귀에 손을 가져다 대며 되묻자 비셉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는 재주를 선보이더니, 구시렁거리며 달아났다.

처음부터 일리온에게 알랑거려 뭐라도 하나 얻어 내려는 것 같아 보였는데 역시나 끝까지 못난 사람이었다.

“어머? 남작님! 어디 가세요? 보상해 드린다니까요?”

하여간 도망 하나는 빠르다니까. 이 화병이 일리온 거였으면 화병째로 던졌을 텐데, 아쉽네.

난 화병에 다시 꽃을 꽂아 놓고 제자리에 돌려 두었다.

“방금 뭘…….”

앞서 걷던 일리온이 작은 소란에 어처구니가 없는 얼굴로 뒤돌아 날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 된 거 끝까지 미친 척해 보지 뭐.

“자나 깨나 불조심. 꺼진 불도 다시 보자. 모르세요?”

“……불이라고?”

“아니었나요? 제 눈에는 쓰레기에 불이 붙은 거로밖엔 안 보이던데요? 마침 화병에 물이 들어 있어 다행이죠?”

일리온은 날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래, 어서 하고 싶은 말을 하렴. ‘미쳤나?’라거나, ‘제정신이 아니군.’ 이라거나, ‘이런 여자를 내가 약혼녀로 들이려 했다니!’ 같은 말이면 아주 좋겠어.

세 개를 한 번에 말해 주면 더 바랄 게 없겠는데.

난 기대에 부푼 표정으로 일리온을 바라보았다.

“그대는 아무래도 예절 교육을 다시 받는 게 좋겠군…….”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 기대에 전혀 미치지 못했다.

“세바스찬에게 일러두지.”

“뭘요?”

“그대의 가정 교사를 알아보라고.”

“네?”

나한테 예절 교육을 시키겠다고? 왜 얘기가 거기로 튀어?

“저, 공작님? 제가 이래 보여도 나름대로 예절 교육을 다 받고 왔답니다?”

내가 웃으며 그 말을 철회할 것을 은연중에 요구하자 일리온은 불신이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대의 가문에 대해 나쁘게 말할 생각은 없지만, 그게 받은 거라면 리슈펠트 백작은 꽤나 그대를 풀어놓고 키웠나 보군.”

이 자식이, 이미 나쁜 말 다 해 놓고 뭐라는 거야.

“가정 교육을 못 받았다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럴 리가. 리슈펠트 백작이 그대를 얼마나 애지중지 키웠는지 얘기하는 거네.”

그런 뉘앙스가 아니던데? 태연하게 중얼거리는 일리온을 뒤따르며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예절 교육할 시간과 정성이면 차라리 날 내쫓아 달란 말이야!

***

연회장으로 돌아오자 후작 부인이 우릴 보며 반갑게 다가왔다.

“어머, 둘이 어딜 그렇게 조용히 다녀오시는 거예요? 아무튼, 젊다는 건 좋다니까요.”

“그게 아니고 잠깐, 파우더 룸에…….”

뭔가 이상한 오해를 하는 듯해 내가 황급히 해명하자 부인은 다 이해했다는 듯 손을 저었다.

“애써 변명 안 하셔도 돼요. 좋은 시간은 보내고 오셨어요?”

“……아, 네.”

비록 좋은 시간이라고 불릴 만한 순간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긍정적인 방향의 오해라면 굳이 정정하지 않기로 했다. 정정해 봤자 믿어 줄 것 같지도 않고.

“그보다 아까 남편이 공작님을 찾던데, 아무래도 사업 얘기로 하실 말이 있나 봐요. 하여간 내 연회 때는 좀 참아 달라고 했는데 오늘이 아니면 안 된다고 하시는 바람에…….”

후작 부인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일리온에게 부탁을 했다. 그래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거였구나.

“그럼 잠시 뵙고 오죠.”

“아, 남편은 지금 서재에 있을 거예요.”

다행히 일리온은 연회장보다는 사업 얘기가 더 편한 사람이라 그녀의 부탁에 크게 개의치 않아 했다.

다만 그냥 가기엔 아무래도 걱정이 되는지 굳이 내게 작게 속삭였다.

“부디 내가 없는 동안 얌전히 있길 바라네.”

참 많은 것이 담겨 있는 한마디였다.

일리온의 기대를 배신하고 싶지는 않았으나, 안타깝게도 오늘 하루 너무 많은 일을 겪어서인지 내게 더는 난동을 피울 에너지가 남지 않았다.

그러니 이후 시간은 일리온의 바람대로 얌전히 디저트나 먹다 돌아갈 셈이었다.

마침 후작 부인은 돌아가지 않고 내게 관심을 보이며 대화를 걸어왔다.

“연회는 즐기고 계시나요. 리슈펠트 양?”

“네. 연회장도 너무 예쁘고 음악도 즐겁고, 무엇보다 디저트가 많아서 좋아요.”

“영애도 달콤한 디저트를 좋아하시나 보네요.”

“네. 하지만 공작님은 별로 안 좋아하셔서요. 그래서 먹으려면 늘 마을에 다녀와야 해요.”

“저런, 디저트는 삶의 낙인데, 남자들은 은근 모른단 말이에요.”

역시 배운 사람. 뭘 알아. 나는 후작 부인의 말에 격하게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어떻게 이 맛을 모르고 살 수 있는 거죠? 미각에서 단맛을 느끼는 부분만 다 빠진 게 분명하다니까요.”

“하하하, 영애는 표현이 참 재밌네요. 그럼 시간 나면 언제 한번 놀러 올래요? 레시피를 알려 줄게요.”

후작 부인의 제안에 난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 안녕하세요. 어디서 즐거운 웃음소리가 난다 했더니, 두 분이 계셨네요.”

한창 대화가 재미있어질 무렵, 반가운 얼굴이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영애. 이렇게 또 뵙네요.”

아침에 날 도와주었던 율리아였다.

“실은 아까부터 말을 걸고 싶었는데, 영 기회가 나지 않아서요. 잠깐 옆에 앉아도 될까요?”

“물론이죠. 율리아 영애라면 언제든 환영이에요.”

그녀는 자연스럽게 우리 테이블에 앉았고, 그녀의 합석으로 대화는 좀 더 화기애애해졌다.

사교계의 사소한 이야기부터 시작해 요즘 수도에서 유행하는 것, 최근에 자신이 빠져 있는 취미까지 주제가 다양해 두 사람이 하는 얘기를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걱정했던 것과는 다르게 사람들은 친절했고.

그간 읽었던 수많은 소설은 결국 소설일 뿐이었다며, 이대로라면 일리온이 내준 숙제를 손쉽게 완료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율리아가 당황한 얼굴로 가방 안을 뒤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음, 이상하네. 여기 어디에 넣어 둔 것 같은데.”

“혹시 뭘 잃어버리셨어요?”

“그게, 반지를 잃어버린 것 같아서요. 분명히 가방에 넣어 뒀는데.”

한참 가방을 뒤적이던 율리아는 급기야 가방 안에 물건을 죄 빼놓으며 가방을 털기 시작했다. 화려하게 장식된 거울과 화장품 몇 개가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떨어졌다.

“어머, 어떡해, 정말 잃어버렸나 봐요.”

“혹시 어디서 떨어뜨린 거 아니에요?”

“아까 손 씻을 때 분명 가방에 넣어 놨는데? 어디로 간 거지?”

율리아는 망연히 가방 안쪽을 만지작거렸다. 반지를 잃어버렸다는 동질감을 느꼈기 때문일까, 왠지 남 일 같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서며 물었다.

“혹시 잃어버린 화장실이 어디예요? 가서 찾아볼게요.”

“……그러실 필요 없어요.”

그러나 대답은 의외의 곳에서 들려왔다.

“……네?”

“제가 봤어요. 아까 리슈펠트 양이 율리아 양의 가방을 뒤지는걸요.”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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