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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11)화 (10/159)

11화

란셀 후작가의 저택은 셀레스타인 공작가 만큼이나 화려했다. 정문에서 저택까지 가로지르는 길 양옆으로 정원사가 매일같이 관리한 듯한 정원의 풍경이 펼쳐지고, 저택 앞에는 커다란 분수대가 시원하게 물을 뿜어 올리고 있었다.

마차에서 내리자, 저택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들이 우리를 정원으로 안내했다.

넓은 정원 한쪽에 야외 연회장을 꾸려 놓았다.

뜰에는 테이블과 의자를 설치해 음식을 올려 두고, 한쪽에는 악단이 연주를 하고, 연회장 곳곳에는 잘 차려입은 남녀가 삼삼오오 모여 도란도란 이야기도 나누고 있었다.

장식과 음악도 훌륭했지만, 한쪽 테이블 가득 쌓여 있는 음식들이 무엇보다도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아침을 먹지 못하고 와서인지 음식을 보자마자 배 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 듯했다.

“후작과 후작 부인에게 인사 먼저 하고 오지.”

그런 내 마음을 알았는지 일리온이 바로 제동을 걸어왔다.

그래, 마냥 놀러 온 건 아니었으니까.

나는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시선을 돌리고 일리온을 따라갔다.

란셀 후작 부인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세바스찬의 말대로 이 연회장에 핑크색 드레스를 입고 있는 건 한 명뿐이었다.

떼를 써서 핑크빛 드레스를 입고 왔으면 꽤나 욕을 먹을 만한 그림이긴 했다. 고마워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일리온 덕분에 사교계에서 욕먹을 일 하나는 줄었으니 다행이었다.

“어머, 이게 누구인가요. 셀레스타인 공작님 아니세요?”

중년의 후작 부인은 기대했던 것과 다르게 호쾌한 느낌으로 나와 일리온을 맞이하였다.

“워낙 보기 힘든 사람이 이렇게 다 오시고, 내가 오래 살긴 했어요? 그렇죠?”

“무슨 말씀을……. 이렇게 초대해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공작께선 인제 보니 맘에 없는 말 하는 재주가 늘었네요.”

란셀 부인의 말에 일리온은 맥을 못 추고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아무리 일리온이라도 사교계 짬밥이 십수 년이 넘어가는 후작 부인의 말발에는 당할 재간이 없는 듯 보였다.

“이쪽은 소문만 무성한 리슈펠트 영애가 아닙니까?”

후작 부인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생신 축하드립니다, 부인.”

나는 최대한 우아하게 치맛자락을 걷어 올리며 그간 릴리와 한 연습의 성과를 보여 주었다.

“갑작스레 초대를 드려 폐가 될까 걱정했는데 이렇게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도대체 어떤 사람이 공작님의 마음을 훔쳐 갔나 했는데, 이렇게 사랑스러우신 분일 줄이야. 공작님께서 그간 안 보여 주려 한 이유를 알겠네요.”

처음 본 사람이 이리도 칭찬해 주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

“마음 같아선 좀 더 얘기를 나누고 싶지만, 손님들이 기다리시니 이따 다시 얘기할까요, 리슈펠트 양? 이따 공작님 안 계실 때 찾아갈게요.”

그렇게 말하며 란셀 후작 부인은 내게 눈을 찡긋해 보였다.

첫인상대로 꽤나 호쾌한 성격에 인싸 기질이 다분한 분이었다. 그리고 어째서 일리온이 이 연회에 오고 싶지 않아 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사교계의 중심인 사람과 일리온이라니, 상극도 이런 상극이 없지.

란셀 후작과도 마찬가지로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나자, 그제야 조금씩 주변의 귀족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연신 우리 쪽을 힐끔거렸는데, 누가 먼저 말문을 틀지 눈치 게임이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눈치 게임보다도 배 속의 허기가 더 다급한 나는 약간 전투적으로 일리온에게 물었다.

“음식 가지러 가려는데 뭐 드실래요?”

일리온은 테이블에 앉으며 괜찮다며 고개를 젓고는 옆에 지나가는 시종을 불러 차를 한 잔 내오라 시켰다.

나는 일리온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디저트 테이블로 향했다.

음식이 놓인 테이블은 그야말로 디저트 천국이었다.

에그타르트, 조각 케이크, 마카롱, 쿠키에 브라우니까지! 릴리에게 부탁해 겨우 먹을 수 있던 디저트들이 이렇게나 많다니!

공작저에서도 밥은 잘 나왔지만, 디저트는 어딘가 모자란 감이 있었다. 다분히 일리온의 취향을 따른 것이겠지만, 디저트에 환장하는 내게는 부족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여기서 한을 푸는구나.

역시 배운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달라. 내가 처음 볼 때부터 알아봤다니까.

오랜만의 디저트라 눈이 뒤집힌 나는 종류별로 하나씩 주워 담아 일리온이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눈치 게임은 이미 끝난 모양인지 일리온이 앉아 있던 테이블 맞은편에는 처음 보는 젊은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는 날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건넸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전 비셉 기블린이라고 합니다. 남작이지요.”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자 비셉은 입에 발린 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일리온은 이미 그 대화에 질린 듯 물어보는 물음에만 간간이 답해 줄 뿐이었다. 그래서일까? 비셉은 일리온에게 하던 어필을 멈추고 나와 대화를 이어 갔다.

“공작님께서 다정하다고 소문이 자자하시더라고요.”

다정이라니. 대체 기자들한테 얼마를 뿌렸길래 이런 헛소문을 진실처럼 믿는 사람이 있어?

난 헛웃음을 삼키며 눈알을 도르르 굴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이 자리를 이용하지 않으면 아까울 것 같다는 생각이 떠올라서 말이다.

그리고 떠올랐으면, 바로 실행에 옮겨야지.

“어머나 벌써 소문이 그렇게 났나요? 하긴, 공작님이 다정하시긴 하죠. 참, 디저트를 가져왔는데 공작님도 한 입 드실래요?”

“괜찮아. 단 건 안 좋아해서…….”

“그러지 말고, 아- 해 보세요.”

내 요청에 일리온은 못 볼 거라도 본 듯 날 바라보았다. 그러나 난 모르는 척, 시종일관 방긋거리며 일리온의 입 앞으로 마카롱 가져다 댔다.

“이야, 역시 사이가 좋으십니다.”

거기에 기블린 남작의 추임새까지 더해지니 더욱더 대놓고 거절하기 힘들 테였다.

비단 그만이 아니라, 주위에 보는 눈이 많았다. 모두가 우리 테이블을 흘끔거리고 있었으니까. 이대로 거절하면 주변에 어떻게 소문이 날까? 다정하신 공작님?

“아, 해 보시라니까요?”

한 번 더 재촉하자, 일리온은 마지못해 내가 내민 마카롱을 받아먹는다. 달콤한 마카롱을 한입에 넣은 일리온은 썩 기분 좋은 표정은 아니었다.

“맛있죠?”

“……그래.”

질문과 대답 사이 잠깐의 공백이 끔찍하리만치 단 걸 싫어하는 그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했다. 그가 억지로 참아 가며 맛있다고 말하기까지 얼마나 짜증을 꾹꾹 눌러 담았을지.

애써 표정을 다듬는 일리온을 보는 게 이렇게 즐거운 일일 줄 몰랐다. 그야 공작가에서는 절대로 할 수도, 볼 수도 없는 그림이었으니까.

어쨌든 일리온을 짜증 나게 만드는 데도 성공했겠다, 어디 나도 먹어 볼까.

텅텅 비어 어서 뭐든 달라고 소리치는 배를 붙잡고 오늘 첫 끼니를 먹기 위해 포크를 찍는 순간, 차갑고 시큼한 물이 내 얼굴에 쏟아졌다.

샴페인인가? 입가를 혀로 쓸어 보니 샴페인이 맞는 듯했다.

“어머, 어떡해. 괜찮으세요?”

실수로 내게 샴페인을 쏟은 영애는 아연실색했다. 그리고는 연신 미안하다며 손수건을 꺼내 닦아 주었다.

안타깝게도 그녀의 작은 손수건으로는 턱도 없어 보였다. 여전히 물기는 뚝뚝 떨어지고 있었고, 옷은 축축했다.

왜 하필이면 이제 막 먹으려는 타이밍에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나는 허탈한 얼굴로 흐르는 물기를 손으로 훔쳤다.

“라벤느.”

화장실에라도 가서 닦고 와야 하나 고민할 때 일리온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여기서 이러는 것보다는, 파우더 룸에라도 가서 제대로 닦는 게 좋을 것 같군.”

나는 내민 손을 잠시 바라보다 얼떨결에 그의 손을 잡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당황했다.

타인이 제 몸에 닿는 걸 끔찍하게 싫어하는 그가 먼저 손을 내밀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으니까. 아무래도 일리온은 내 예상보다도 더,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는 모양이었다.

***

“샴페인이 진하지 않아 다행이지만 괜찮으려나……. 비싼 건데…….”

수수하다고 투덜대긴 했지만, 고급 원단에 유명한 재단사가 만들어 준 옷이었다.

아무리 수수한 옷일지라도 한두 푼 하는 옷은 아닐 테니, 한없이 소시민에 가까운 나는 당장에 드레스에 얼룩이 남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뿐이었다.

여차하면 팔아서 도망 자금으로 쓸 물건인데……. 아침부터 반지도 잃어버리고, 드레스도 엉망이고 되는 일이 없는 하루였다.

파우더 룸에서 적당히 물기를 닦고 화장을 고치고 나오자, 일리온이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창 너머로 담배 연기가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고, 이따금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공작님?”

“아, 나왔나?”

내가 나온 것도 늦게 알아챌 정도로 창밖의 대화에 귀를 기울인 모양이었다.

“거기 뭐가 있나요?”

“아니. 바로 연회장으로 돌아가지.”

내 질문에 대한 대답 대신 일리온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나는 그의 뒤를 따르며 그가 바라보았던 창밖을 힐끔거렸다.

“공작이라고 거들떠보지도 않는 거 봤냐?”

“유명하잖냐. 가만 보면 자기가 하늘보다 더 높은 줄 안다니까?”

일리온에 관한 이야기였다.

어쩐지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창문 아래를 슬며시 내려다보았다. 아까 봤던 기블린 남작이 친구와 구석에서 궐련을 피우고 있었다.

“하여간 적통이니 어쩌니 나불거려도, 생긴 걸 봐라. 그게 어디 셀레스타인 사람이냐?”

“그래서 아까도 말했잖아. 일리온 그놈, 엘라인 자식 아니라고. 술집 여자랑 눈맞아서 누구 씨인지도 모르는 애를 아들로 삼은 게 맞다니까.”

둘은 뭐가 그리 웃긴지 연신 키득거리며, 일리온의 뒷조사라도 해 봐야 하는 거 아니냐는 막말을 주고받았다. 아무리 뒷담화라지만 좀 심한데…….

“그딴 근본도 없는 놈을 적통이라며 데리고 온 걸 보면, 선대 공작이 미쳤다는 소문이 사실일지도.”

“그 노인네, 죽기 전까지 정정하지 않았어?”

“몰랐어? 한때 엘라인이 죽고 미쳤다는 소문이 돌았잖아. 그 집에 허구한 날 사제들이 들락거린 거 몰라? 그게 다 그 노인이…….”

이런 이야기를 아까 그 무심한 표정으로 듣고 있었던 건가?

불과 몇 분 전까지도 자신에게 웃는 낯으로 칭찬을 쏟아 내던 사람이 지금은 자신과 자신의 부모를 모욕하고 있는데 어떻게 이렇게 태연할 수 있을까?

찌르면 피 한 방울 안 나올 사람이라서? 감정이 메말라서? 기블린이 상대할 가치도 없는 인간이라?

그게 아니면 이런 일에 이미 익숙해져 버려서?

난 앞서 걸어가는 일리온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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