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뭐?”
일리온의 미간이 접히기 시작했다. 아마, 이대로 평화롭게 후작저까지 가길 바랐겠지만 그럴 순 없지.
“약혼반지는 직접 끼워 주셔야죠. 이게 약혼반지인 줄 알았으면 절대 제 손으로 안 꼈을 거예요.”
“…….”
“공작님께서 안 끼워 주시면 오늘 이거 안 끼고 다닐래요.”
난 일부러 부루퉁하게 말했다. 그렇게 되면 곤란한 건 나일까, 너일까? 일단 난 아닌 것 같은데…….
“실은 무릎 꿇고 프러포즈 받고 싶었지만, 이 정도로, 으앗……!”
그렇게 일리온과 실랑이를 할 무렵, 갑자기 차체가 돌부리에라도 부딪힌 것인지 크게 요동쳤다.
엉덩이가 의자에서 떨어질 정도의 충격에, 나는 순간적으로 잡고 있던 반지를 놓치고 말았고, 내 손에서 벗어난 반지는 순식간에 마차 창문을 넘어 밖으로 퉁겨지고 말았다.
나는 망연하게 창문을 바라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애써 공작과 시선을 마주하지 않은 채 창문만 바라봤지만, 일리온의 살벌한 시선이 볼에 따갑게 부딪히는 듯했다.
“이게 뭐 하는…….”
“그, 그게 그러니까……. 마, 마차를 세워 주세요!”
다급한 목소리로 창문 밖으로 목을 빼고 소리를 질렀다. 황제한테 참수형을 당하는 것도 싫지만, 공작한테 칼 맞고 싶은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이름도 모르는 숲길을 내 무덤으로 만들 생각은 없다고!
“5분, 아니 10분만 주세요. 바로 찾아올게요!”
마차가 멈춘 뒤, 나는 허겁지겁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공작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니 내게 할 말이 많은 듯 보였지만, 애써 무시했다.
그야, 너무 무서우니까……!
돌아온 길을 내달리며 주변을 살폈다.
이런 일은 결코 계획에 없었다. 일리온에게 금전적인 피해를 주고자 노력을 하긴 했지만, 저 반지는 어쨌거나 일리온이 내게 준 내 물건 아닌가?
그러니 일리온과 파혼하고, 잘생긴 미래의 남편과 새살림 차릴 자금으로 쓰려고 생각했던 물건이었다.
적당히 일리온을 화나게 만들려 한일인데! 하필이면 그때 손에서 놓칠 게 뭐람. 하다못해 마차 안에 떨어졌다면 주울 수라도 있지!
한참 주변을 뒤지면서 길을 되돌아갈 무렵, 저 멀리서 흰색 마차 한 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잠시 반지 수색을 멈추고 한쪽으로 길을 비켜 주었다.
그러나 그대로 지나칠 거라 생각했던 마차는 내 옆에서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창문을 막고 있던 흰색 커튼이 걷히며 인형처럼 생긴 영애가 내게 말을 걸었다.
“어머나, 리슈펠트 양 아니세요?”
유명해서 좋은 것도 있지만, 이럴 땐 난감하네. 상대방은 나를 아는데 나는 상대방이 누군지 모르다니.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상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문을 열고 마차에서 내렸다. 풍성한 핑크빛 머리카락이 어깨 너머로 넘실거리며, 하늘색 드레스가 우아하게 살랑거렸다.
마치 천사가 세상에 강림한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저는 율리아 그르노블입니다. 그르노블 백작가의 여식이지요. 언젠가 꼭 한번 리슈펠트 양을 뵙고 싶었는데, 이렇게 만나 뵙게 돼서 반가워요.”
율리아는 치맛자락을 살포시 펼치며 내게 인사를 건넸다. 세바스찬의 도움을 받아 인사 예법을 배우긴 했으나, 이토록 교본 같은 우아한 인사는 처음이었다.
그녀의 인사를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허겁지겁 치맛자락을 들어 고개를 숙였다.
“그나저나, 마차도 없이 여기서 뭐 하고 계세요?”
“그게, 실수로 반지를 잃어버려서요. 마차는 앞에 대기해 놓고 찾는 중이에요.”
“어머, 중요한 반지인가요?”
“……그렇죠. 선물 받은 거니까요.”
약혼반지를 잃어버렸다고 말했다가는 얼마 남지도 않은 체면마저 깎일 듯해 나는 적당히 웃으며 얼버무렸다.
“저런,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
“아니에요! 괜히 영애의 귀한 시간을 뺏는 건 아닐지…….”
나는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이럴 때일수록 서로 도와야 하는 거 아니겠어요?”
진짜 천사인가? 감격에 겨워 율리아를 바라보자 빙긋 웃었다. 천사 맞구나.
율리아의 도움으로 그녀의 시종과 함께 셋이서 반지를 찾아 나섰다. 그러나 머리가 하나에서 셋으로 늘어나도 반지는커녕 비슷한 것도 찾을 수 없었다.
“혹시, 숲속으로 굴러갔을 수도 있겠네요.”
“설마…….”
낙담한 표정으로 끝이 보이지 않는 숲을 바라보자 율리아가 물었다.
“좀 더 찾아볼까요?”
“아니에요. 더 이상 영애의 시간을 뺏을 수 없죠. 그렇게 대단한 반지도 아닌걸요.”
“하지만, 어머. 셀레스타인 공작님 아니세요?”
율리아가 어딘가를 바라보더니 아까 봤던 교본 같은 인사를 건넸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공작님.”
“안녕하십니까.”
“정말 오랜만이에요. 그때, 그렇게 헤어지고 마음에 걸렸는데……. 오늘 이렇게 다시 뵙게 돼서 다행이에요.”
뭐지……. 뭔가 두 사람 사이에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듯한 이 대화는?
그러나 일리온은 그녀의 말에 그저 고개를 까딱일 뿐 별다른 대답은 하지 않았다.
“라벤느, 시간이 늦었으니 반지는 돌아오는 길에 찾고 이만 가도록 하지.”
옆에 사람 있다고 라벤느라 부르는 것 좀 봐. 평소에는 리슈펠트라거나 그대라고 부르면서……. 은근 다른 사람 눈을 신경 쓴다니까.
그러나 저지른 짓이 있기에, 별다른 토를 달지 않고 일리온의 뒤를 따랐다.
***
“셀리.”
두 사람이 멀리 사라진 걸 확인하고 율리아가 하녀를 부르며 손을 내밀었다. 셀리는 그녀의 손 위로 작은 반지 하나를 내려놓았다.
“과연, 잃어버리면 난리 날 물건이긴 하군. 꽤 비싸 보이는 반지야.”
율리아는 두 손가락으로 반지를 집어 찬찬히 살펴보았다.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거절하려 했던 연회였으나, 셀레스타인 공작이 참여한다는 소식에 부랴부랴 준비해 왔는데, 이렇게 뜻밖의 수확까지 얻을 줄이야.
“그나저나 그 대단한 리슈펠트가 누군가 했는데, 저런 촌뜨기 같은 영애일 줄…….”
그간 셀레스타인의 짝으로 율리아만 한 사람은 없다며 사교계에서도 두 사람을 부단히도 밀어주었었다. 그렇게 되도록 그녀가 의도했으니까.
천사 같은 얼굴로 적당히 웃으며 사교계의 여론을 장악하는 것쯤이야 그녀에겐 숨 쉬는 것만큼 쉬운 일이었다.
차기 공작 부인이 되기 위해 얼마나 공을 들였는데 셀레스타인 공작은 이름도 모르는 가문의 여식을 약혼녀로 들였다. 그녀의 그간 노력이 물거품이 되고 만 것이다.
리슈펠트? 애초에 그런 가문이 있는지도 몰랐다. 심지어 자신과 같은 백작가라니, 물론 같은 백작가라도 그 지위는 하늘과 땅 차이였지만.
율리아는 어떻게 하면 저 촌뜨기를 비웃음거리로 만들 수 있을지 고민했다. 자신의 천사 같은 얼굴과 사교계에서 쌓아 온 이미지를 이용하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율리아는 반지를 손가방에 넣으며 입꼬리를 말아 올려 웃었다.
***
“반지는 정말 죄송해요……. 돌아오는 길에 꼭 찾을게요. 어떻게든…….”
“…….”
아무 말도 안 하고 굳은 표정으로 있는 일리온을 바라보며 가시방석에라도 앉은 기분이었다. 아까까지 손가락에 낀 반지도 어느새 빼 둔 채였다.
아마 둘 중 하나가 반지를 끼는 것보다는 둘 다 안 끼는 편이 세상의 관심을 하나라도 줄일 수 있을 테니 그런 결정을 한 모양이었다.
“역시 모르겠군.”
한참을 굳은 표정으로 고민하던 일리온은 뜻 모를 얘기를 하더니 한쪽에 내려놓았던 서류를 집어 들었다.
“많이 화나셨나요?”
“뭘, 아……. 반지 말인가?”
뭐야, 다른 생각 중이었어?
“그거라면 미안하다. 사과하지.”
“……네?”
왜 네가 사과해? 잃어버린 건 난데? 갑자기 무섭게 왜 그래?
“저, 잃어버린 건 전데…요……?”
“그 원인을 제공한 건 나니, 내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지. 그대가 반지를 직접 받지 못한 걸 마음에 담아 둘 거라 생각 못 했어. 세바스찬의 충고를 들을 걸 그랬군.”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일리온은 너무도 쉽게 자신의 잘못임을 인정했다.
일부러 미움받기 위해 일리온 앞에서 얼쩡거려서 그렇지 원래 일리온은 냉정한 성격일 뿐, 인성이 글러 먹은 인간은 아니었다.
책 속에서 성녀에게 워낙 다정한 모습이 인상에 남아 어쩔 수 없이 비교하곤 했지만, 그 다정함이란 것도 결국은 그가 가진 선한 성품을 기반으로 한 감정이었다. 물론 가차 없고 무서운 것도 맞지만…….
문득 내가 라벤느가 아닌 성녀에 빙의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내 운이 조금만 더 좋아서, 성녀에 빙의했더라면 좀 더 다정하게 굴어 줬으려나?
“하지만 그대도 우리가 정략결혼 한 사이라는 걸 좀 더 자각해 줬으면 좋겠군. 나는 그대와 결혼하는 조건으로 그대의 가족에게 충분한 대가를 지불했어. 그러니 내게 본인이 꿈꾸는 남편을 요구하지 말게. 남편 노릇은 할 생각도 없고, 할 수도 없으니까.”
내 헛생각을 단숨에 날려 버리는구나. 그래, 난 라벤느고 네게 달라붙는 파리들을 쫓기 위한 부적이었지.
저 잘생긴 얼굴은 때때로 내가 누군지를 망각하게 만들어 버리는 재주가 있다니까.
정말 위험한 얼굴이야.
“하지만 앞으로 평-생 같이 살아야 하는데, 좀 더 사이좋게 지내면 안 되나요?
딱 잘라 그렇게 말하더라도 고분고분 들어줄 생각이 없는 나는 일부러 평생을 강조하며 운을 뗐다.
“결혼하면 아이도 낳아야 하고, 아이를 낳으려면 첫날밤도 보내야 하고, 그러려면 사이가 좋아야 하잖아요.”
“아직 내 말을 이해 못 했군. 난 영애랑 결혼해도, 아이를 가질 생각도, 첫날밤을 보낼 생각도, 사이좋게 지낼 생각도 없네.”
“어머, 혹시 부끄러우셔서 그러시는 거예요? 그렇게 부끄러워하실 거 없는데…….”
내가 방긋방긋 웃으며 말하자 일리온은 인상을 찌푸렸다. 곧이어 그는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무시로 일관했다. 굳게 다문 입술과 감정 없는 얼굴은 시종일관 서류 더미에 고정되어 내 말은 들리지도 않는 듯했다.
이 좁은 공간을 공유하고 있음에도 마치 두꺼운 벽이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느낌. 내게는 아주 딱 알맞은 거리감이었다.
일리온에게서 미움받아 쫓겨나야 살 수 있는 운명인데, ‘사이좋게’라니, 말도 안 되지.
난 씁쓸한 마음을 감추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마차는 어느새 숲길을 빠져나와 들판을 내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