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9)화 (8/159)

9화

“오늘따라 향기가 엄청 좋네.”

“특별히 이날을 위해 산 것들이에요.”

“마을에 다녀온 거야?”

“네. 아가씨께서 소설을 열심히 읽으실 때, 나가서 사 왔죠.”

릴리가 열의를 불태울 때 혼자 뒹군 게 미안해 애써 변명처럼 한마디 더 해 봤다.

“나도 같이 데려가지. 왜 혼자 갔어?”

“그야, 아가씨는 마을에 가면 이상한 것에만 관심을 가지시니까요!”

갑자기 머리를 감겨 주는 릴리의 손길에 힘이 들어갔다.

“사이비 교인들을 집에 초대하시질 않나, 이상한 점쟁이한테 꽂히셔서 악령 퇴치를 해 달라고 부르시질 않나! 제가 세바스찬 집사님 볼 면목이 없어요!”

어쩐지 머리 감기는 손길에 감정이 다분히 실린 것 같더라니……. 그것 때문이었구나.

“그게, 다 계획이…….”

“네네, 알겠으니 눈 감으세요. 헹굴 거예요.”

아무래도 쌓인 게 많아 보이는 릴리의 모습에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화난 것 같으니, 일단은 조용히 하자는 대로 해야지.

“이렇게 올린 머리 스타일이 요즘 유행이래요. 이거 배우려고 고생 좀 했다니까요.”

릴리는 쉴 새 없이 재잘거리며, 꾹꾹 참아 놓은 말을 터트리듯 수다를 떨었다. 반쯤 넋이 나간 채로 릴리의 수다에 고개를 끄덕이다 보니 어느새 화장도 머리도 모두 끝나 있었다.

옷을 갈아입고 거울을 바라보자, 평소에 보던 라벤느가 아닌 다른 여자가 날 마주하고 있었다.

“와, 릴리……. 대단하다.”

라벤느야 워낙 본래도 예쁘긴 했지만, 이렇게 꾸미고 보니 정말 기품 있는 귀족처럼 보였다. 안타깝게도 내용물은 기품과는 한참 떨어진 인간이었지만…….

너무도 달라진 모습에 나는 호들갑을 떨며 릴리를 치켜세웠다.

“릴리, 너 샵 차려야겠다. 아니, 내가 나중에 여길 뜨면 하나 차려 줄게! 동업하면 되겠다!”

“아가씨께서 뜨긴 어딜 떠요. 여기가 아가씨 집인데.”

내 말에 릴리는 눈을 가늘게 뜨며 또 무슨 이상한 꿍꿍이를 벌이냐는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참, 이것도 하셔야죠.”

내가 어색하게 웃고 있는 사이 릴리가 상자를 하나 가져왔다. 상자를 열어 보니 다이아몬드로 만들어진 액세서리가 담겨 있었다. 세바스찬이 준비해 주었다는 물건일 것이다.

“이것도 끼면 돼?”

목걸이와 귀걸이를 끼고, 마지막으로 상자 한쪽에 꽂힌 반지를 보며 묻자 릴리가 대답했다.

“네. 장갑 위에 착용하세요.”

새끼손톱보다 살짝 큰 다이아몬드가 가운데 딱 박혀 있는 반지는 누가 봐도 비싸기 그지없어 보였다. 역시 공작가라 아무거나 안 쓴다 이거로군.

장갑 위로 반지를 끼우자 꽤 그럴듯한 장식이 되었다.

음, 그래도 영 부족한데.

명색이 제국 최고 가문의 부인이 될 사람인데, 열 손가락이 허전하지 않게 색깔별로 하나씩 끼워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사파이어, 루비, 에메랄드 같은 예쁘고 화려한 보석이 얼마나 많은데!

역시 그때 더 달라고 난리를 피웠어야 하는데…….

“이제 출발할 시간이에요, 아가씨.”

“아침은?”

“드레스를 방금 조였는데 아침은 무슨 아침이에요. 어차피 후작가 가시면 맛있는 거 많이 드실 거니까 그냥 가세요.”

“아니, 그래도 난 아침 먹어야 하는데?”

내가 아침으로 염불을 외우거나 말거나, 릴리는 단호하게 내 팔을 끌어당겼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릴리는 힘이 정말 셌고, 낙엽 같은 라벤느의 몸으로는 끌려가는 게 고작이었다.

어떻게든 안 가려고 버텨 보려 했지만, 결국 이렇게 끌려가게 되는구나. 일주일 전의 내 판단을 후회해 봐야 이미 늦었다는 사실만 뼈저리게 느껴질 뿐이었다.

홀에 내려가자 일리온은 이미 채비를 마치고 날 기다리고 있었다. 내 드레스와 색을 맞춘 듯한 남색 정장은 넓은 어깨와 쭉 뻗은 다리를 더욱 도드라지게 보여 주었다.

평소에 셔츠를 꽉 잠그고 베스트만 걸치고 있는 모습도 잘생겼다 생각했지만, 제대로 차려입으니 묘하게 금욕적이면서도 위험한 분위기가 풍기는 듯했다.

그리고 그 잘생긴 얼굴은 어쩐지 평소보다 조금 기분이 나빠 보였다.

아직 아무 짓도 안 했지만, 대개 일리온이 화난 이유는 나였기에 아마도 저 미간 주름의 원인은 높은 확률로 나일 것이다.

“릴리, 우리 많이 늦었어?”

내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릴리의 귓가에 속삭이자 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또 한마디 하겠군. 나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 웃으며 계단을 내려갔다.

“어머, 공작님, 많이 기다리셨나요?”

“분명 10시까지 내려오라고 했던 것 같은데, 영애 방에는 시계가 없나?”

공작은 팔짱을 끼고 정문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리며 한마디 했다.

그러게 누가 같이 가자고 했나? 혼자 가겠다는 걸 자기가 억지로 따라온다고 한 주제에.

오늘도 하고 싶은 말은 산더미였지만, 애써 속마음을 꾹꾹 눌러 담으며 웃어 보였다.

이러다 몸에서 사리가 나오는 거 아닌지 몰라.

“공작님께 예쁘게 보이려다 보니 좀 늦었지 뭐예요?”

“…….”

그래, 이젠 아주 말하기도 귀찮은 모양이구나.

말없이 날 응시하던 일리온의 얼굴엔 읽기 힘든 감정이 잠시 스치고 지나갔다. 내가 너무 예뻐져서 놀라기라도 했나? 싶었지만 그건 아닌 듯했다.

나한테 화내거나 질려 하는 건 기가 막히게 잡아낼 수 있는데, 그 외의 감정은 조금 어렵단 말이지.

잠시 스쳐 갔던 표정이 뭔지 고민하며 마차로 향하는데, 어쩐지 릴리도 세바스찬도 따라오려는 기색이 없었다.

“세바스찬은 안 따라가나요?”

“예.”

“……네?”

뭐? 왜? 왜 안 가는데?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세바스찬을 바라보았다. 그는 연륜이 묻어 나오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두 분께서 오붓하게 다녀오시지요.”

오붓? 그게 우리 두 사람 사이에 가당키나 한 단어였어?

그보다 세바스찬! 설마 지금 날 저 진공 상태의 마차에 넣어 산소 부족으로 죽일 셈이에요?

그러나 아무리 간절한 표정으로 바라보아도 세바스찬은 말을 바꿀 기미가 없어 보였다.

하는 수 없이 마지막 희망인 릴리를 애처롭게 불렀다.

“리, 릴리. 너라도 따라올래?”

“오늘은 저택 일을 돕기로 해서요. 다녀오세요. 아가씨.”

릴리는 아주 상쾌한 얼굴로 내게 손을 흔들었다.

릴리 너마저…….

울고 싶은 걸 참으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려 일리온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냉랭한 표정으로 마차 앞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아, 차라리 기절하고 싶다.

멀어져 가는 마차를 보며 릴리가 긴 한숨을 쉬었다. 아침부터 잔뜩 부산을 떨었더니, 피로가 한 번에 몰려오는 듯했다.

“공작님께서 함께 가 주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아가씨와 제가 갔더라면…….”

릴리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최근 라벤느의 기행으로 미루어 보건대, 두 사람만 연회에 참석했다면 아마 다음 날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릴지 몰랐다.

아니, 확실하게 실릴 테였다. 라벤느는 공작 부인이 된다는 자각이 없어도 한참 없었으니까.

거기다 기센 영애들한테 밉보이기라도 했다가는……. 릴리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떨며 상상을 떨쳐 냈다.

“그 반대죠.”

“……네?”

“아가씨께서 공작님과 함께 가 주셔서 다행인 겁니다.”

알쏭달쏭한 세바스찬의 말에 릴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그럴 리가.

“저, 세바스찬 님, 제가 이런 말 드려도 될지 모르겠지만, 최근에 아가씨 때문에 가장 고생이 많으신 건 세바스찬 님 같은데요.”

그러나 세바스찬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고생이라뇨. 요즘같이 일하기 즐거운 날도 없는걸요.”

‘그 주인에 그 집사도 아니고……. 일 중독도 저 정도면 중증인데.’

어쩐지 세바스찬에게 연민의 감정이 샘솟고만 릴리는 속으로 기도했다. 부디 오늘만큼은 라벤느가 아무런 사고도 치지 않고 무사히 돌아올 수 있게 해 달라고.

아침을 안 먹길 정말 다행이었다. 먹었더라면 이 질식할 것 같은 분위기에서 그대로 마차에 토하고 말았겠지. 일리온 앞이라 잔뜩 긴장을 해서인지 오히려 멀미가 싹 달아나고 말았다.

“란셀 후작가는 앞으로 얼마나 가야 하나요?”

“한 시간 정도.”

“…….”

앞으로 한 시간을 더 버티라니……. 할 수만 있다면 마차 문을 열고 뛰어내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역시 아까 기절을 해야 했는데!

날씨 얘기는 마차 출발하자마자 했고, 드레스 얘기도 아까 했고, 경치 얘기도 했고…….

이제 또 무슨 얘기를 하지? 어떻게 대화를 이어 갈지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던 내게 공작의 손에 끼워진 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저랑 똑같은 반지 끼셨네요.”

내 손에 낀 반지를 공작에게 보여 주며 말을 걸었다. 일부러 세트로 맞춘 반지라는 얘기가 나올 거라 생각했는데 일리온의 입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단어가 튀어나왔다.

“그야, 약혼반지니까.”

“……네?”

그러네, 세트일 수밖에 없는 반지네. 하하, 제대로 들은 거 맞지?

“약혼반지요?”

“그래. 사람들에게 보이는 자리니, 약혼반지 정도는 끼는 게 좋겠지.”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니냐. 라벤느가 삐뚤어진 데는 네 탓도 있을 거다.

세상은 공작가의 전통을 따라 약혼식이 가족만 참여하는 자리에서 소소하게 진행된 걸로 알고 있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일단 약혼식이 그리 성대하지 않은 것은 공작가의 전통이 맞았다.

워낙 이름 있고 영향력 있는 가문이다 보니, 약혼식부터 서로 오겠다는 사람이 좀 많아야지.

그래서 몇 대 전부터 공작가는 약혼식은 간소하게, 결혼식은 성대하게 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세상이 잘못 알고 있는 나머지 반은, 나와 공작은 그 간소한 약혼식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공작의 부모와 조부모는 이미 세상을 떴다. 그리고 라벤느의 가족은 팔아넘기듯 딸을 공작저에 보냈다.

다시 말해 약혼식에 참석할 가족들마저 없을뿐더러, 나는 결혼 전에 공작저에 와서 살기로 한 것뿐 실제로는 그 흔한 반지 교환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 반지가 스리슬쩍 액세서리 틈에 끼어 있었다니!

나는 끼고 있던 반지를 빼서 공작에게 건넸다.

“공작님!”

하이 톤으로 그를 부르자, 마차 안에서 마저 서류를 검토하던 일 중독자가 고개를 들고 날 바라보았다. 자꾸 부르는 게 귀찮은 눈치였다. 그러나 내가 누구야? 눈치 없는 뇌 청순 영애잖아.

나는 짐짓 모르는 척 웃으며 말했다.

“끼워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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