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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8)화 (7/159)

8화

이놈의 멀미. 왜 이걸 간과했을까. 만반의 준비를 했지만 정작 멀미만큼은 준비하지 못한 나는 마차 안에서 반죽음 상태가 되었다.

아……. 아침에 아무것도 먹지 말걸. 출발한 지 10분 만에 올라오는 토기를 참으며 내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가기 시작했다.

간신히 바위산에 도착한 나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비칠비칠 마차에서 걸어 나왔다. 그나마 움직이지 않는 땅에 닿으니 좀 살 것 같네.

그러나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던 나는 한참을 그늘에서 쉬고 나서야 간신히 두 발을 딛고 설 수 있었다.

릴리는 좀 더 쉬는 게 좋겠다고 걱정했지만, 세바스찬이 날 감시까지 하는 마당에 언제까지 쉬고만 있을 수는 없지.

세바스찬의 목적이 내 감시인 이상, 내가 얼마나 꽃밭에 열정이 있는지 보여 줘야 했다.

나는 모종삽을 비장하게 쥐고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았다. 여기도 바위고 저기도 바위고…….

넓은 산을 보며 다시 한번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여길 꽃으로 물들이겠다니. 내가 정신이 나갔지. 이야, 인력 낭비도 이런 인력 낭비가 없다니까.

컨셉에 취해 제 발등을 찍은 기분을 느끼며 모종삽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깡!”

청명한 소리와 함께 찌르르한 진동이 내 관절을 자극했다.

끄아아…….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관절을 부여잡았다. 무슨 바위가 이렇게 많은 거야. 게다가 햇빛은 또 왜 이렇게 따갑고.

들고 온 수건으로 땀을 닦아 내며 둘러보자, 같이 온 하인들이 곡괭이와 삽으로 열심히 바닥을 다지고 있었다.

저 사람들도 주인 잘못 만나 무슨 고생인지 몰라.

“힘드시지 않습니까?”

한쪽에서 하인들과 땅을 고르던 세바스찬이 내게 다가왔다. 평소 입던 재킷을 벗고 셔츠를 걷어 올린 그는, 잘 관리된 몸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중년이 넘은 나이에도 나이보다 배는 젊어 보였다.

이런 게 바로 미중년이구나. 나는 속으로 침을 닦으며 세바스찬의 물음에 대답했다.

“힘들긴 하지만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인 걸요.”

전혀 틀린 말은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에 더 가까웠지만, 어쨌든 이렇게라도 미친 척을 해야 일리온이 나를 싫어할 거 아닌가.

“옆에서 도와드리지요.”

세바스찬은 그렇게 말하며 내 옆에서 삽으로 땅을 팠다. 어느 정도 땅을 파면 꽃씨를 심고, 또 자리를 옮겨 땅을 파고 씨앗을 뿌렸다.

“공작저에 온 지 며칠 안 지나셨는데, 지낼 만하십니까?”

파 놓은 땅에 꽃씨를 뿌리자 그가 물었다. 뭐, 하녀들은 냉랭하고, 일리온은 코빼기도 안 보이지만 지내는 것 자체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오히려 일리온의 미래를 모른다면 여기서 눌러앉아 돈이 주는 안락함에 젖고 싶을 정도로 살맛 났다.

“물론이죠.”

“궁금하신 건 없으신지요?”

“글쎄요. 딱히 없네요.”

내가 방긋 웃으며 대답하자 세바스찬 역시 미소를 지으며 날 바라보았다.

“결혼식 준비라던가, 없으신가요?”

“공작님께서 잘하시겠죠.”

결혼하기 전에 쫓겨날 거라 별로 관심은 없었지만 나는 예의상 대답해 주었다. 그러자 그가 의문스럽게 날 바라보았다.

“아가씨께서는 결혼식이 기대되지 않으십니까?”

은근 날카롭네. 갑자기 훅 들어오는 질문에 나는 서둘러 웃으며 대답했다.

“무, 물론 기대는 많이 하고 있답니다. 하지만 아는 게 없다 보니……, 제가 끼어들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요.”

노동이 힘들어 나도 모르게 나온 본심을 덮기 위해 핑계를 쥐어짜 냈다.

“아무래도 주인님께서 살가운 분은 아니셔서 아가씨께서도 힘드시겠죠.”

“살갑지 않은 정도가 아니던데…….”

나는 땅을 파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살갑지 않다니, 이 얼마나 귀여운 단어인가. 책 속의 일리온만 알고 있던 시절의 나라면 충분히 동의했을 말이었다.

아니, 한때 일리온을 최애로 여겼던 나라면 오히려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일리온을 변호했겠지.

‘일리온은 다시없을 다정남, 벤츠남임. 황제 따위 일리온 발톱에 때만도 못함. 반박 안 받음.’

이런 식으로…….

그러나 라벤느가 되고 겪은 일리온은……. 그래, 살갑다고 할 수 있었다. ‘살갑다’가 ‘살인이 갑자기 일어나지 않아 다행이다.’의 줄임말이라면 말이야.

일리온과 마주할 때면, 하루하루 수명이 닳는 느낌이라 이쪽은 죽어 나간다고…….

“아가씨께도 죄송한 일을 했어요. 내키지 않은 결혼이었을 텐데요.”

뇌 청순 모드를 장착한 나는 황급히 세바스찬의 말을 부정했다.

“그럴 리가요. 공작님은 너무 멋있는 분이잖아요? 그런 분과 결혼할 수 있다니, 꿈만 같아요!”

“아가씨께서는 공작님을 좋아하십니까?”

“그럼요. 무척 좋아한답니다.”

내 대답에 그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날 바라보았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제 마음이 조금 놓이는군요. 부디 그 마음 변치 말아 주세요.”

“……네? 아, 네! 물론이지요.”

왠지 친절한 옆집 할아버지를 속이는 기분이라 말을 내뱉자마자 입 안이 썼다. 일리온이 반역을 저지르면 세바스찬도 죽게 될 것이다.

그 미친 황제에게 자비란 없으니까.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도 이상하게 가슴이 답답해졌다.

‘아니야,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야.’

나는 모르는 척 애써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내 목숨 하나 건지는 것만 생각하자. 내 목숨 하나도 앞날을 장담 못 하는데, 다른 사람 걱정을 할 여유는 없었다.

다시금 마음을 다잡고 모종삽으로 땅을 내리쳤다.

이번엔 깡 하는 소리와 함께 뚝 하는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불안한 마음으로 모종삽을 땅에서 살며시 뽑아내자, 손잡이 부분만 똑 하고 빠져 버렸다.

“헉, 안 돼! 데이지!”

나는 눈물을 머금고 데이지의 몸통 부분을 흙바닥 속에서 낑낑대며 뽑아냈다.

어떻게든 데이지를 살려 보려 안간힘을 써 몸통 부분을 빼내자, 모종삽과 함께 투명한 돌멩이 하나가 툭 튀어나왔다. 아마도 이 돌멩이 때문에 삽이 부러진 모양이었다.

그 재수 없는 말이 현실이 됐잖아.

일리온이 아침에 했던 악담을 떠올리며 난 잠시 허탈하게 부러진 모종삽을 바라보았다.

‘하,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지…….’

나는 돌멩이를 등 뒤로 던지며 해맑게 릴리를 불렀다.

“릴리! 우리 챙겨 온 간식 먹자!”

***

똑똑.

매일 아침, 일정한 시각이 되면 찾아오는 불청객은 오늘도 어김없이 문을 두드렸다.

대답하지 않으면 문을 부술 기세로 두드릴 게 분명하기에 일리온은 오늘도 마지못해 들어오라 허락을 했다.

“오늘은 또 무슨 일로……, 아, 자네였나?”

“라벤느 아가씨인 줄 아셨나요?”

세바스찬이 웃으며 들어왔다.

“참고로 라벤느 아가씨는 근육통으로 앓아누우셨어요.”

“그런 사소한 일은 보고하지 않아도 돼.”

“알고 계시면 좋지 않을까 해서요.”

일리온은 능글맞게 웃고 있는 세바스찬을 바라보다 한숨을 쉬었다.

굳이 묻지도 않은 라벤느의 상태를 늘어놓는 이유야 뻔했지만, 세바스찬의 바람을 들어줄 생각은 없었다.

“그걸 보고하려고 온 건 아니잖아?”

“아, 참. 그렇죠.”

참으로 능청스러운 대답이었다. 처음부터 그 얘기를 하러 온 거면서.

“주인님 말씀대로, 어제 하루 아가씨를 관찰해 보았지만, 별다른 일은 없었습니다. 그저 산에 꽃씨를 뿌리고 돌아오셨어요.”

일리온은 세바스찬의 보고를 들으며, 펜을 까딱거렸다. 어제 아침에 제 방에 찾아와 모종삽을 데이지라 부르며 해사하게 웃던 라벤느의 얼굴이 떠올랐다.

‘너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기에 다른 꿍꿍이라도 있을 줄 알았더니, 정말 꽃을 심고 싶은 거였나?’

쉬이 믿기 힘든 얘기였지만, 원래도 라벤느와 비슷한 영애들의 생각을 이해하는 건 일리온에겐 죽었다가 깨어나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 감성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없으니, 감정적인 부분을 배제하고 사실만을 모아 라벤느에 대한 정의를 내릴 수밖에.

일리온은 그간의 라벤느의 행적을 떠올렸다.

‘돈 계산이 약하고, 남의 말에 잘 속으며, 허영심이 강하고, 제멋대로인 여자.’

어째서인지 라벤느에 대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어쩌다 이런 여자랑 결혼하겠다고 한 건지 의문만 차올랐다.

제가 무언가에 단단히 홀리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지금이라도 약혼을 없던 일로 물러야 하나 고민하던 일리온 앞에 세바스찬이 무언가를 내려놓았다.

“다만, 이런 걸 발견했습니다.”

투명한 돌덩이였다. 제법 크고 묵직한 돌덩이를 들어 올려 살피던 일리온이 세바스찬에게 되물었다.

“……마석?”

“예. 아가씨께서 구입하신 땅에서 나왔습니다. 아무래도 그 땅에 마석이 매장되어 있는 듯합니다.”

마석이란 마나가 깃든 돌로 마법사가 아닌 사람들도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해 주는 물건이었다.

마법사가 귀한 제국에서는 꽤나 고가에 거래되는 물건이었는데, 만약 그 땅에 마석이 매장되어 있는 게 사실이라면, 땅의 가치는 최소 수만 골드에서 수십만 골드까지 치솟을 테였다.

“리슈펠트는 마석이 매장된 걸 알고 그 땅을 산 건가?”

“글쎄요. 아가씨께서는 이 돌이 뭔지도 모르시는 것 같았습니다.”

마석을 뒷산 돌멩이 취급하는 듯한 라벤느의 행동을 떠올리며 세바스찬이 답했다.

“하긴, 거기다 꽃을 심겠다는 사람인데 알고 그랬을 리는 없겠지만…….”

일리온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우연이라고 받아들이기엔 어딘가 석연치 않았다.

우연치고는 너무 운이 좋지 않은가? 소가 뒷걸음질 치다 쥐를 잡아도 정도가 있지, 이건 쥐가 아니라 드래곤이라도 잡은 경우였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구매한 땅이라 해도…….’

쉽게 라벤느를 정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일리온은, 의외로 쉽사리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한동안 마석을 손에서 굴리던 일리온의 얼굴에 고민이 깊어져 갔다.

***

“아가씨, 아가씨!”

오지 않길 바라던 그 날이 결국 오고야 말았다. 릴리는 아침 일찍부터 날 흔들어 깨워 댔고, 난 현실을 받아들이기 싫어 일부러 릴리의 목소리를 무시하며 이불속으로 파고들어 갔다.

“릴리, 조금만 더 잘게.”

“무슨 소리세요! 지금부터 씻고 준비해도 늦는단 말이에요! 빨리 일어나세요!”

“릴리, 나 몸이 아픈 것 같아. 역시 연회는…….”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우는소리를 해 보았지만, 릴리는 내 꾀병 따위 안 통한다는 듯 이불을 냅다 걷어치워 버렸다.

“아직 근육통도 안 나은 것 같고, 목도 좀 아픈 것 같고…….”

“네, 네. 그 얘기는 씻으면서 들을게요.”

하나도 안 통하네. 나 요즘 불신의 아이콘이 되어 가는 것 같은데…….

눈빛이 형형하게 빛나는 게, 마치 이날이 오기만을 벼르고 있던 사람 같았다. 난 결국 침대 밖으로 꺼내져, 향유와 꽃잎을 푼 욕조에 담기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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