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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7)화 (6/159)

7화

“아가씨께서 그 분홍색 드레스를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 같던데, 추가로 한 벌 구입하시는 건 어떨까요?”

“그대가 언제부터 리슈펠트 영애의 집사가 되었어?”

“그야, 주인님께서 잘 지켜보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나이를 먹더니, 능구렁이가 다 됐군.”

못 당하겠다는 듯 웃는 일리온을 따르며 세바스찬은 걱정스럽게 주인을 바라보았다.

그의 주인은 사교계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데는 이골이 난 사람이었다.

스무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셀레스타인가를 물려받은 뒤부터 끊임없이 소문에 시달렸으니까.

전대의 셀레스타인 공작이 서거하고, 이제 막 20살이 된 젊은이가 차기 공작이 되자, 세상은 그의 적통성에 대해 수많은 낭설을 만들어 냈다.

그의 외모가 아버지나 조부모와 닮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흑발에 적안은 셀레스타인가를 다 뒤져도 없는 색이었기에, 일리온 뒤에는 늘 사생아라는 꼬리표와 함께 어머니에 대한 소문이 뒤따랐다.

일리온의 능력이 인정받기 시작하면서 그런 추문들도 차츰 사그라들었지만, 발톱을 숨긴 하이에나들은 이번엔 일리온이 결혼하지 않는 것을 두고 소문을 퍼트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저 특정 가문과 결혼 이야기가 오간다거나 하는 수준이었으나, 결혼 적령기가 다가와도 결혼을 하지 않자 공작이 남색이라거나 이미 숨겨 둔 자식이 있다는 식으로 소문은 부풀려졌다.

곧 사그라들 거라 생각했던 소문은 사교계를 넘어 마을 아낙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고, 마냥 방관할 수 없었던 일리온은 결국 라벤느와의 결혼을 택했다.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관심은 약혼녀인 라벤느에게 쏠렸다. 그녀가 가난한 귀족 영애라는 게 알려지자마자, 누가 시키지 않아도 세상은 그 둘이 서로 절절히 사랑하는 사이라며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일리온이 한동안 결혼을 하지 않은 이유도, 혼담을 거절한 이유도 어느새인가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서라는 보기 좋은 말로 포장되어 있었다.

그러니 이 절절한 로맨스의 주인공이자, 세기의 신데렐라인 라벤느는 주최자보다도 더 많은 주목을 받을 것이다.

드레스 하나, 머리 모양 하나로도 트집이 잡히는 귀족 사회이기에 일부러 최대한 주목을 덜 받을 수 있는 옷으로 고른 것이다.

당연히 그의 의도를 알고 있는 세바스찬은 그의 결정을 나무라는 게 아니었다.

그가 걱정하는 건 일리온이었다.

사랑이 없는 결혼은 귀족 세계에선 흔한 일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정략결혼이라고 해도 라벤느는 그가 앞으로 평생을 같이 살아야 할 사람이기도 했다.

지금이야 라벤느가 일리온이 밀어내도 웃으며 달라붙지만 그게 언제까지 가겠는가……. 서로 의지해야 하는 때가 언젠가는 올 텐데 왜 자꾸 거리를 두고 밀어내기만 하시는지…….

“그리고 다이아몬드 세트 말입니다만, 그건 주인님께서 직접 아가씨께 주시는 게 어떨까 하는데요. 약혼 선물이지 않습니까?”

“이름뿐인 약혼에 형식을 챙길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군.”

“그래도 직접 주시지요.”

“무슨 의미가 있는데?”

세바스찬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어렸을 때는 그래도 좀 귀여웠었던 것 같은데…….

“그러다 후회하셔도 모릅니다.”

“쓸데없는 소리를…….”

일리온은 세바스찬의 말을 일축해 버렸다. 제가 그 보석을 들고 가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뻔하지 않은가. 또 뻔뻔하게 아기 새라 불러 달라고 하겠지. 일부러 그 꼴을 보러 갈 필요가 어디 있단 말인가?

란셀 후작 부인의 연회도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안 가겠다고 거절했던 자리였는데, 라벤느 때문에 결정을 번복하기까지 했으면 일리온 나름대로 꽤 그녀의 사정을 봐주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왜 세바스찬까지 자꾸 자신을 들들 볶는지 모를 일이다.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아까부터 라벤느 생각만 하던 일리온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기분이었다. 집무실에 도착한 일리온은 결국 한숨을 쉬며 세바스찬에게 허락했다.

“그 분홍색 드레스도 사도록 해.”

“알겠습니다.”

세바스찬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

저택에 온 지 열흘째.

그간 일리온을 열 받게 만들기 위해 크고 작은 사고를 끊임없이 일으켰다. 그것도 아주 열심히.

작게는 서재에 찾아가 일 방해하기, 용돈 올려 달라 떼쓰기, 연무장 따라가서 검술 가르쳐 달라고 조르다 3분 만에 포기하고 칭얼거리기.

크게는 점술가를 불러 악령을 퇴치한다고 온 집 안을 들쑤시고 다니기, 사이비 교단을 초대해 저택에서 포교 활동 돕기 등등.

내 인생을 통틀어 이토록 부지런한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쉴 새 없이 사고를 치고 다녔으나, 일리온은 아직 날 그냥 내버려 두고 있었다.

인내심이 골든레트리버 수준인지, 아니면 날 포기하기로 한 건지.

표정을 보면 둘 다 아닌 것 같긴 한데…….

여느 때와 다름없이 오늘은 또 무슨 사고를 쳐야 하나 고민하며 식탁에 앉았다. 쓸 만한 계획 따윈 생각나지 않았다. 다만 아쉬운 건 디저트가 부실하다는 것.

일리온이 단 걸 좋아하지 않는다는 아주 평범한 이유로, 음식은 주로 담백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나마 가끔 나오는 쿠키 역시 설탕이 한참 부족했다.

내 머리가 안 돌아가는 건 당이 부족해서임이 분명했다.

머리를 쥐어짜 가며 간신히 오늘의 할 일을 결정한 나는 곧바로 세바스찬을 찾아갔다.

“세바스찬. 오늘은 제가 사 둔 땅에 꽃을 심으러 가고 싶은데요.”

바위산 하나를 통째로 꽃밭으로 만들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일리온에게 전했으니, 그 정신 나간 생각을 실천에 옮겨야 하지 않겠어?

“그러십니까? 마차와 하인들을 준비하겠습니다. 언제 출발하실 예정이십니까?”

“거리가 있으니, 오전에 출발하고 싶어요. 준비 부탁드릴게요.”

역시나 몇 마디 하지 않아도 알아서 준비해 주는 세바스찬에게 감동하며, 나는 만반의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일부러 신발도 굽이 낮은 편한 것으로 준비했고, 치렁치렁한 드레스 대신 바지와 셔츠를 입었다.

릴리는 나보고 어차피 일은 하인들이 할 텐데 이게 뭐냐며 말렸지만, 그건 릴리가 뭘 몰라서 하는 소리였다.

쇼라는 건 어차피 보여 주기 위한 것이고, 그러려면 옷부터 그럴듯하게 차려입어야 했다.

그래야 일리온이 내가 얼마나 꽃밭에 진심인지 깨달을 거 아니야.

물론 난 적당히 못하는 척 뒤로 빠질 거지만.

마지막으로 지난번에 릴리가 책과 함께 구입해 온 알록달록한 모종삽을 하나 챙겼다.

귀족의 원예 취미를 위해 만들어진 듯한 삽은 손잡이에 아름다운 조각이 세공되어 있었다. 이 조그마한 삽으론 바위산의 돌멩이 하나 제대로 못 파낼 테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채비를 마친 후 오늘도 일리온의 집무실을 헤집어 놓기 위해 문을 두드렸다.

“공작님, 들어가도 될까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들리지 않자, 나는 다시 한번 힘을 주어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쾅쾅쾅 하는 소리가 고요한 복도를 가득 메웠다.

‘이래도 안 열어?’

다시 한번 문을 주먹으로 내리치려던 찰나에,

“……들어와.”

하는 수 없다는 듯 허락이 떨어졌다. 그러나 집요하고 눈치 없는 영애는 그런 것에 기죽지 않는 법이지! 나는 당당하게 문을 열며 일리온에게 아침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이에요- 공작님. 오늘은 꽃을 심으러 가기 전에 공작님께 인사를 드리러 왔답니다.”

“그런 건 내게 보고할 필요 없으니 알아서 다녀와.”

그는 이제 정말 질린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도 시작이 좋군.

나는 그의 말을 가뿐히 무시하며 들고 있던 손가방에서 모종삽을 꺼냈다.

“그리고 공작님께 이 모종삽도 자랑하려구요. 어때요? 예쁘죠? 이 삽으로 꽃을 심으면 분명 꽃도 예쁘게 필 거예요.”

“……그래, 그 삽이 꽃을 심을 때까지 부러지지 않고 남아 있다면 그러겠지.”

일리온은 반짝반짝 빛나는 내 삽을 한심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내 역할에 심취해 말을 이었다.

“이 모종삽 이름은 데이지라고 정했답니다. 정말 잘 어울리는 이름이죠?”

일리온은 데이지라는 이름에 어이가 없는 듯 턱을 괴고 날 바라보다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전 데이지랑 같이 꽃 심고 올게요-. 제가 없어도 밥 잘 드시고 계세요.”

“쓸데없는 걱정을.”

그래. 넌 내가 없어도 잘 먹고 잘 사는 사람인데 왜 모르겠니.

그의 냉랭한 한마디에 받아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일리온의 잔뜩 찌푸려진 얼굴에 오늘은 이 정도로 만족하기로 하며 집무실을 나와 현관으로 향했다.

현관 앞에는 세바스찬과 릴리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 벌써 준비가 끝났네요?”

“네. 뒤쪽 마차에는 하인들이 짐을 싣고 대기하고 있습니다. 앞쪽 마차에 타시지요.”

나는 마차에 오르기 전 세바스찬에게 모종삽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일리온에게 물었던 것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세바스찬, 이거 어때요? 예쁘죠? 이 삽으로 꽃을 심으면 분명 꽃도 예쁘게 피겠죠?”

내 말을 들은 세바스찬은 웃으며 ‘그러실 겁니다, 아가씨.’라고 대답했다.

역시, 세바스찬이야. 이 저택을 떠나게 된다면 당신이 제일 그리울 거예요. 일리온에게 다친 마음을 세바스찬에게 치유하며 난 마차에 올라탔다.

“그럼 전 다녀올게요.”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네?”

세바스찬이 날 따르며 말했다. 왜 당신이 따라와? 저택은 어쩌고? 의문이 가득한 표정으로 세바스찬을 바라보자 그는 인자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가씨가 걱정되니 동행하라는 주인님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

아까 일리온의 반응은 그게 아니던데. 혹시 몰라 날 감시하겠다, 이건가? 그래, 일리온이라면 그럴 수 있지.

그런데 어쩌나. 정말로 꽃만 심고 올 건데.

덕분에 추가 노동력을 얻게 된 나는 기쁜 마음으로 대답했다.

“어머나, 공작님께서 절 걱정해 주신다니, 이렇게 기쁠 때가. 좋아요. 세바스찬도 같이 가요. 사람은 많을수록 즐거운 법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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