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5)화 (5/159)

5화

일리온이 성녀에게 반하고 난 뒤, 라벤느는 파혼을 제안받는다.

하지만 라벤느는 일리온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성녀를 독살하려다 발각돼 사형당했다.

다시 말해, 아무것도 안 하고 기다리기만 해도 난 파혼을 당할 예정이었다.

다만 이렇게 서두르는 이유는 아무리 전 약혼녀라 할지라도 반역자와 관련된 사람을 황제가 가만둘 리 없기 때문이다.

‘제국의 장미는 두 번 핀다.’라는 이 이상한 소설의 제목은 모두 황제의 기행과 관련이 있었다.

황궁에는 커다란 장미 정원이 있다. 잘 다듬어진 장미 정원에는 여름에 한 번, 그리고 가을에 한 번 장미꽃이 폈다.

이 세계가 특이해서 장미가 1년에 두 번 피는 게 아니었다.

가을에 피는 장미는 장미가 아니라 사람의 피였다.

황제는 매해 추수제를 앞두고 장미 정원에서 죄수들을 모아 배틀로얄을 펼쳤다.

마지막에 한 명이 남을 때까지 죄수들은 서로를 죽이고, 그들이 흘린 피가 정원을 붉게 물들이는 것이었다. 마치 장미꽃처럼.

그토록 잔인한 황제가 반역자는 물론, 그의 일가족을 가만둘 리 없었다.

비록 파혼당한 약혼녀일지라도.

그러니 하루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 먼 외국으로 숨어야 했다. 황제의 눈이 닿지 않는 곳으로.

이왕이면 원작에 진입하기 전에 말이다.

***

그날 이후, 언제쯤 일리온이 파혼 이야기를 꺼낼까 기다렸지만 의외로 잠잠했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종종 일리온이 이 저택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릴 정도로 조용했다.

저택 사람들은 내가 뭘 하든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고, 때가 되면 삼시 세끼가 나왔다. 게다가 필요한 데 쓰라며 돈까지 주니 이게 천국인가 싶을 정도로 평화로운 나날이었다.

저택에 온 지 5일째, 유난히 좋은 날씨를 그냥 보내기 아까워 하녀들에게 부탁해 정원에 테이블을 놓고 차를 마시기로 했다.

잘 다듬어진 정원과 따뜻한 햇볕에 향긋한 차까지. 외국의 유명 호텔에 여행이라도 온 듯한 기분에 마음이 풀어졌다.

‘아, 이런 곳에서 평생 살 수만 있다면 일리온의 첩이어도 상관없을 것 같은데…….’

돈도 많고, 집도 좋고, 말만 하면 다 들어주는 시종들까지. 여기서 계속 살 수만 있다면 일리온이 성녀를 좋아하든, 황제를 좋아하든 아무 상관이 없을 듯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달콤한 꿈에 젖어 있기엔 다가올 미래가 너무 처참했다.

방금 전까지 하늘이라도 날 것 같던 기분이 순식간에 흙바닥 속으로 꼬꾸라졌다.

‘그러고 보니 원작 시작이 언제쯤이더라…….’

소설은 황제가 이웃 나라를 정복하고 성녀를 데려온 뒤 연회를 여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그 연회로부터 약 3개월 뒤가 일리온과 라벤느의 결혼식이었고. 역으로 계산하면 앞으로 약 두 달 뒤에 원작에 진입하게 될 것이다.

두 달이라니, 너무 짧은데……. 이렇게 여유 부리다가는 진짜 죽겠네.

“아가씨!”

내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 다음엔 무슨 일로 일리온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어 볼까 고민하던 나는 릴리의 외침에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인데 그렇게 허겁지겁 달려와?”

“아가씨께 연회 초대장이 왔어요! 다름 아닌 란셀 후작가에서요! 세상에!”

릴리는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란셀 후작? 그게 누군데?

이놈의 세계관은 소설 속 등장인물에 비해 사람이 너무 많았다. 성녀가 황성에 감금되다시피 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래서는 소설을 읽었다고 해도 별 도움이 안 되잖아!

아무튼, 후작이면 이 세계에서는 중요한 인물인 것 같긴 한데…….

“데뷔탕트도 안 한 아가씨한테 초대장이라니! 아가씨, 저한테 맡겨 주세요. 제가 세상에서 가장 예쁘게 꾸며 드릴게요!”

평소보다도 한층 기분이 상기된 릴리가 비장하게 소리쳤다.

그녀의 말대로 라벤느는 22살이 넘도록 데뷔탕트를 치르지 못했다.

대부분의 귀족 영애들이 사교계에 처음 발을 내딛는 것이 17살 전후인 걸 생각하면, 데뷔탕트를 하기엔 늦은 나이였다.

소설을 읽을 땐 단순히 백작가가 가난했기 때문이라 생각했지만, 막상 리슈펠트 백작가에서 일주일을 보내 보니, 비단 그것만은 아닌 듯했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 추측이지만, 백작 부부는 딸에게 그리 관심이 없던 모양이었다. 라벤느의 방과 물건들은 그녀의 동생 것에 비해 초라하고 낡은 것들뿐이었으니까.

게다가 날 대하던 동생의 태도 역시 사이좋은 남매라기엔 위화감이 들었다.

시대상으로도 돈 없는 귀족의 딸은 집안의 비상금 취급을 받으며 필요할 땐 돈 많고 늙은 귀족에게 팔려 가기도 했으니, 어쩌면 라벤느의 가족 역시 라벤느를 그런 취급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렇게 일리온에게 집착한 걸까? 파혼당하면 또다시 어디로 팔려 가게 될지 모르니까?

하지만 일리온은 어마어마한 위자료를 제시했었다. 그 정도면 굳이 다른 데 팔려 가지 않아도 됐을 텐데……. 아니면, 제시한 금액이 만족스럽지 않았나?

“가실 거죠?”

한참을 라벤느의 행동에 의문을 품던 나는 릴리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손을 뻗어 내 눈앞에 초대장을 바짝 가져다 댔다.

무언의 압박에 할 수 없이 초대장을 받아 든 나는 봉투를 열었다.

은은한 향기가 피어나는 종이엔 유려한 필체로 긴 글이 적혀 있었다.

서론이 장황했지만, 요는 일주일 뒤에 있을 후작 부인 생일에 초대한다는 내용이었다.

릴리의 말대로 데뷔탕트도 치르지 못한 채 스무 살을 훌쩍 넘겨 버린 라벤느에게는 너무도 과분한 초대장이었다.

나는 착잡한 표정으로 초대장을 접었다. 귀족의 예절도 제대로 모르는 내가 가기엔 껄끄러운 자리임이 확실했다. 혹여 실수라도 했다가는 날카로운 귀족들의 시선에 벌집이 될 게 안 봐도 뻔했다.

“아프다고 할까.”

“무슨 소리세요! 꼭 가셔야죠! 안 그래도 은근히 아가씨를 무시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번 기회에 아가씨께서 셀레스타인가의 안주인이라는 걸 보여 주셔야죠!”

평소엔 조용하던 릴리가 버럭 화를 내며 반대했다.

이야, 릴리. 네가 나 대신 공작한테 시집가라.

그 정도 패기면 뭘 해도 하겠는데?

감탄스러운 눈빛으로 릴리를 바라보자 릴리가 한숨을 쉬었다.

“안 그래도 아가씨 모르게 안 좋은 소문이 얼마나 많다구요. 아가씨께서 맘 상하실까 봐 말씀 안 드렸는데…….”

“무슨 소문?”

내 물음에 릴리는 머뭇거리더니 자신이 들었던 소문을 털어놓았다.

“그게, 잠자리로 공작님을 꼬셨다는 둥, 애가 생겨서 어쩔 수 없이 결혼하는 거라는 둥. 다들 뚫린 입이라고 정말…….”

“그런 헛소문에 너무 신경 쓰지 마.”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버리면 될 이야기였지만, 릴리는 아니었나보다. 그녀는 손을 불끈 쥐고 의지를 불태웠다.

“아가씨를 모시는 하녀로서 절대 그럴 수 없어요! 그러니까 이번 기회에 보여 주자구요. 공작님이 아가씨를 정말 좋아해서 결혼을 결정했다는 걸요!”

너 진짜……. 순진한 얼굴로 사람을 두 번 죽이는구나.

일리온이 날 좋아한다고 믿는 이 순수한 아이에게 과연 뭐라고 설명을 해 줘야 할지 모르겠다.

그나저나, 잠자리에 애까지 있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과분한 관심을 받고 있었다니. 몰랐는걸?

뭐, 갑자기 신데렐라가 된 가난한 영애를 질투하고 시기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일리온을 알고 있다면 이게 얼마나 터무니없는 소문인지 알 것이다.

일리온의 정조 관념이 어떻고 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가 남에게 몸을 보여 줄 수 없다는 아주 단순한 이유였다.

원작에서 자세하게 다루지 않아 전후 사정은 잘 모르지만, 일리온은 어릴 때 마녀에게 저주를 받았었다. 그리고 그 저주 때문에 온몸에 그 흔적이 새겨져 있었고.

그 사실을 남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한여름의 연무장에서도 목을 꽉 조이는 셔츠를 고집하는 사람이 잠자리라니, 말도 안 되는 얘기지.

그러니까 일리온 쟤는 죽을 때까지……!

……아니다. 그래도 한때 내 최애였던 서브남주의 명예를 이렇게까지 깎아내릴 순 없지.

난 떠오르는 한 단어를 고이 마음속에 집어넣으며 결심이 선 얼굴로 릴리를 바라보았다.

“연회에 가자.”

“아가씨……!”

릴리는 내 결심에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네 말대로 내가 어떤 사람인지 똑똑히 보여 줘야지.”

그래. 내가 일리온의 약혼녀로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사람인지를 말이야.

***

세바스찬은 중년이 조금 넘은 남자로, 이 저택을 관리하는 집사였다.

또한 릴리를 제외하고 이 저택에서 유일하게 대화가 불편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날 대하는 태도에서 은연중에 어떻게 생각하는지 드러나기 마련인데, 세바스찬 만큼은 내게 한결같이 친절하고 공손했다.

게다가 매일 아침 내게 안부 인사를 물으러 와 줬다.

만약 모든 게 계산된 행동이라면 그건 그것대로 인정해 줘야 할 정도로.

그의 집무실을 찾은 나는 그가 내온 차를 한잔 마시며 찾아온 용건을 말했다.

“실은 제가 연회에 초대를 받아서요.”

“아, 들었습니다. 란셀 후작 부인의 초대였죠?”

“예. 혹시 공작님께 허락받아야 할까요?”

“아가씨께 온 초대면 굳이 허락받으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대신 주인님께 언질은 주시지요.”

일단 일리온의 허락은 굳이 필요 없는 모양이다. 내게는 좋은 정보였다.

“안 그래도 사교 모임은 처음이라, 꼭 한번 가 보고 싶었거든요. 저, 공작님은 제가 방에 찾아오는 거 별로 안 좋아하시는 것 같으니 세바스찬이 좀 전달해 주실래요?”

“그럴 리가요. 아가씨께서 찾아오시는 걸 좋아하신답니다.”

……어머 세바스찬. 눈 하나 깜빡 안 하고 거짓말도 할 줄 아네요. 역시 이거 연기 아니야?

일부러 마주치기 싫어서 세바스찬에게 시키려고 했던 마음이 들킨 것 같아 난 멋쩍게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그럼 제가 가서 말씀드릴게요. 그리고 참, 입고 갈 옷이 없는데 구할 수 있을까요?

“음, 일주일 만에 드레스를 맞추기엔 좀 빠듯할 듯한데……. 일단 아는 재단사에게 연락해 샘플을 들고 방문하라 일러두겠습니다.”

역시 공작가의 집사야. 내가 뭘 필요로 하는지 말 안 해도 다 알잖아.

세바스찬에게 만족스러운 대답과 함께 차까지 얻어 마신 나는, 곧바로 일리온의 집무실로 향했다.

어차피 던질 폭탄이라면 빨리 던지는 게 좋다고 애써 스스로를 위로하며.

짧게 집무실 문을 두어 번 두드리자 일리온이 들어오라 허락했다.

“안녕하세요. 공작님!”

문이 열리자마자 그를 향해 산뜻한 인사를 건넸다.

역시 매도 맞아 본 놈이 더 잘 맞는다고, 한 번 저 살벌한 눈빛을 견뎌 냈더니 오늘은 훨씬 버틸 만했다.

일리온은 날 한 번 노려보더니 귀찮은 듯 시선을 돌려 서류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이에요, 공작님. 3일 만인가?”

“무슨 일이지?”

얼굴 보기 힘들다는 소리를 돌려 말했지만, 그는 내 말을 가볍게 무시하며 용건을 물었다.

“꼭 무슨 일이 있어야 오나요? 얼굴 보고 싶으면 올 수도 있는 거죠?”

“그럼 봤으니 이만 나가 봐.”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