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서재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단정한 차림의 일리온이 책상에 앉아 날 바라보았다.
여전히 눈이 부시는 외모였다. 어째서 작가가 그의 미모를 설명하기 위해 몇 페이지씩 할애했는지 단박에 납득할 정도로.
덕분에 하녀가 문을 닫고 나가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멍하니 얼굴에 정신을 빼앗기고 말았다.
“바쁜 하루를 보낸 모양이군.”
그의 시선이 내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쓱 훑었다.
늦게 들어와서 그런 걸까, 아니면 내 더러워진 치맛단과 구두를 봐서 그런 걸까. 아마 둘 다겠지.
뭐, 좀 바쁘게 돌아다니긴 했지만 내가 아무리 바쁘대도 일리온보다 바빴을까.
아침 식사에도 나오지 않았던 사람한테 듣고 싶은 말은 아니었다. 생각보다 뒤끝 있는 성격이라서 말이야.
그러나 여기서 그런 유치한 말싸움을 해 봐야 득이 될 게 없으니, 일단은 웃어 보였다.
“방에 가만히 있는 것도 심심해, 하녀와 함께 산책을 좀 다녀왔답니다.”
“산책을 꽤 멀리까지 다녀오셨더군.”
내가 어딜 갔다 왔는지 벌써 다 알고 있다는 말투였다.
날 찾을 때부터 이미 대부분의 정보가 그의 귀에 들어갔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난 어디까지나 아무것도 모르는 영애를 가장하며 놀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 제가 어딜 다녀왔는지 이미 알고 계셨어요?”
“땅은 갑자기 왜 산 거지?”
내가 토끼처럼 눈을 뜨건 말건, 그는 자신이 궁금한 사실을 곧바로 물어봤다. 이래 봬도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하는 중인데…….
일리온의 시선이 마치 날 탐색하듯 집요하게 달라붙었다.
“어머, 소식이 정말 빠르네요. 저는 또, 제가 저택에 도착한 것도 모르고 계시나 했는데.”
내가 살짝 뾰로통한 표정으로 되묻자 공작의 반듯한 이마에 살짝 금이 가기 시작했다.
“저녁 드셨으면 저랑 차 한잔하실래요?”
“긴말할 시간 없어. 그저 왜 갑자기 땅을 산 건지 궁금해서 부른 것뿐이야.”
“저랑 차 한잔하실 시간도 없으신 거예요? 전 공작님이 저를 언제쯤 불러 주실까 기대했는데, 정말 서운해요.”
일리온은 말없이 날 노려보더니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한쪽에 놓인 종을 울렸다. 곧이어 하녀가 들어왔고, 그는 하녀에게 차를 내오라 명령했다.
말이 안 통하니 이길 수가 없다는 건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일 거다.
나와 말을 섞기 싫을 테지만 아쉬운 사람은 내가 아니라 일리온이었다. 그러니 내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나는 아주 당당하게 서재 한쪽에 놓인 소파에 앉아 차를 기다렸다.
일리온은 황제에 비하면 분량이 적은 서브남주였다. 그 몇 없는 등장에서 그를 묘사할 때면 언제나 예민하고 날이 서 있다는 표현을 했다.
다만 기본적으로 남에게 감정을 토해 내지 않는 사람이기에, 대개는 어떤 상황에서도 평정을 유지한다.
조금 전만 봐도, 자신이 그토록 싫어하는 행동을 상대방이 했음에도 감정 동요가 거의 보이지 않으니까.
그리고 그런 성격 때문인지, 발산되지 못한 감정 때문에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나쁜 버릇이 있었는데 그게 반역을 일으키는 촉매제가 되지 않았나 싶다.
뭐, 일리온이 그런 성격이 된 것도 본인이 원해서는 아니었지만.
일단 오늘 목표는 저 갑옷 같은 얼굴을 어떻게든 깨부수는 것이었다. 그야 물론, 안 좋은 쪽으로.
곧이어 하녀가 차를 가져왔고, 나는 따뜻한 차를 마시며 잠시나마 하루의 피로를 녹여 냈다.
“자, 이제 왜 샀는지 얘기해 봐.”
이제 겨우 한 모금 마셨는데, 급하기도 하지.
일리온은 맞은편 소파에 등을 기대 팔짱을 끼고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저런 모습도 화보 속 한 장면 같다니, 사기라니까.
아쉽게도 그 모습을 차분히 감상할 시간이 없는 나는 그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서서히 감정을 잡기 시작했다.
“공작님께선 모르시겠지만, 전 어릴 적부터 꽃을 좋아했답니다. 하지만 가난한 집에서 자라 온 저는 정원은커녕 그럴듯한 마당도 없었죠.”
공작은 별로 관심이 없다는 듯 내 말을 듣고 있었다.
확신하건대, 그는 내가 꽃이 아니라 드래곤 똥을 좋아한다고 해도 저런 표정을 지을 것이다. 그만큼 ‘서론에 별 관심이 없지만, 말을 섞기 싫으니 들어나 보자.’ 하는 표정이었으니까.
하지만 여기가 클라이맥스라고.
나는 연기의 신을 소환하는 심정으로 감정을 실어 한 마디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그래서 생각했어요.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꼭 드넓은 땅을 온통 꽃밭으로 물들이겠다고!”
정적이 내려앉았다.
내 말이 꽤나 황당한 모양인지, 일리온은 한참을 눈만 가만히 깜박였다.
그러더니 그의 표정이 조금 구겨졌다. 이제야 내 말을 이해한 모양이었다.
그 머리 좋은 남자가 말뜻 하나 이해 못 해 버벅대는 모습이라니. 하지만 내 말 아직 안 끝났단다.
나는 스스로의 연기에 심취해 두 손을 모으고 기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때마침 아주 좋은 땅이 싼 가격에 나왔다지 뭐예요. 게다가 땅 모양이 하트라니 너무 예쁘지 않나요? 나중에 땅이 꽃밭으로 물들면 분명 거대한 하트 모양이 될 거예요. 사람들도 좋아하겠죠? 공작님께도 꼭 보여 드릴 테니 구경하러 오세요.”
“하.”
그의 입에서 웃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게 작게 새어 나왔다.
“혹시 땅에도 시세라는 게 있다는 걸 아나?”
질문의 의도는 명확해 보였다. ‘설마 그걸 모른다고 하지는 않겠지?’
그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나는 활짝 웃으며 답했다.
“시세요? 그게 뭔데요?”
“…….”
“꼭 알아야 하나요? 뭐, 제가 몰라도 공작님께서 아시니까 괜찮지 않을까요? 부부는 서로 돕는 거라고들 하잖아요?”
내가 완벽한 너에게 단 한 가지 오점이 되어 줄 수 있단다. 어때? 앞으로 ‘서로 도와 갈 미래’가 좀 걱정되지 않니?
일리온은 내 한심한 대답에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고민하는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이 대화를 지속하는 게 과연 가치 있는 일인가.’를 고민하고 있을지도.
“그 땅의 가치는 고작해야 200골드였네. 그게 시세야. 그대는 그걸 2000골드에 사 온 거고.”
어딘가 체념한 말투와는 다르게, 그의 설명은 친절했다.
생각보다 더 저렴했잖아? 역시 양아치는 양아치네. 난 부동산 중개사의 수완을 속으로 칭찬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 공작님께서 잘못 아신 게 아닐까요? 중개사분께서 저보고 미모가 아름다우니 가격을 좀 깎아 주겠다고 했는 걸요? 덕분에 무척이나 저렴하게 구매했답니다. 공작님도 그 땅을 보시면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끼실 거예요.”
물론 중개사가 그런 말은 한 적 없지만 예쁘다는 말에 홀라당 속아 땅을 산 것으로 위장했다. 그래야 공작의 속이 뒤집어질 테니까.
그리고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얼마나 어처구니없으면 화를 낼 생각도 없는 듯했다.
한숨의 깊이가 아까보다 더 깊어진 걸 보니 기껏해야 3분? 아니, 1분 이내로 축객령을 내릴 듯했다.
어쩐지 아까보다 배는 더 피곤해 보이는 얼굴을 보며, 좀 더 일리온의 신경을 거슬러 보기로 했다.
내가 저택에 있는지 없는지, 관심도 없는 사람 얼굴을 보겠다고 종일 발이 부르트도록 돌아다녀 겨우 만든 기회였다. 여기서 끝내긴 아깝지.
“그보다 공작님. 앞으로는 저보고 그대라는 말 대신 애칭으로 불러 주시면 안 되나요? 곧 결혼할 사이인데 어쩐지 거리감이 느껴져서 싫어요.”
이만 대화를 끝내려던 공작은 이어지는 말에 못마땅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반듯한 얼굴에 짜증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러고 보니, 어제 읽던 로맨스 소설에서 남자주인공이 여자주인공에게 아기 새라고 부르더라고요. 얼마나 낭만적이었는지! 그래서 말인데, 공작님께서도 절 ‘아기 새’라고 불러 주시겠어요?”
아기 새를 강조하며 철없는 아이처럼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순수하고 해사한 미소를 발산했다.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일리온은 한동안 대답 없이 앉아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질문은 끝났으니 가 보게.”
결국, 내 말을 못 들은 것으로 치부한 모양이었다.
“어머, 벌써요? 조금 더 있다 가면 안 되나요? 겨우 공작님 얼굴 봐서 너무 좋은데 벌써 가라고 하시다니요.”
물론 마음에도 없는 소리였지만, 그에게 조금이라도 더 데미지를 주기 위해 버텨 보았다.
“리슈펠트 영애.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게.”
아기 새라 불러 달라니까 굳이 내 성을 부르면서 말하는 그의 모습에 난 속으로 웃음을 삼키고 일어났다.
이 정도면 결혼을 재고할 만한 충분한 인상을 심어 준 듯하니까.
“어쩔 수 없죠.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고.
“참, 혹여 아기 새라는 말이 입에 안 붙으시면, 라벤느라고 불러 주세요. 리슈펠트 영애라니, 너무 내외하는 것 같잖아요.”
***
방에 돌아온 나는 한동안 미동도 없이 시체마냥 침대 위에 널브러졌다. 긴장이 풀리니, 손 하나 까딱할 힘도 남지 않았다.
일리온의 얼굴과 분위기는 상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그가 뿜어내는 박력이랄까, 카리스마 같은 것은 왠지 모르게 상대를 주눅 들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그의 모습은 대부분 여주인 성녀에게 한없이 다정했던 모습뿐이라, 날 탐색하려 하는 눈빛도, 취조하려는 듯한 말투도 모두 일리온이 아닌 낯선 사람인 것만 같았다.
생각해 보면 그의 다정함은 어디까지나 성녀 한정이었으니 라벤느가 보게 될 일리온은 내가 모르는 모습뿐인 게 당연했다.
“공작님은 만나고 오셨어요?”
“응.”
“어떤 분이셨어요? 소문대로 잘생기셨나요?”
릴리가 옷 갈아입는 걸 도와주며 물었다.
나와 공작가에 올 때만 해도, 그저 신문으로나 겨우 볼 수 있었던 공작의 얼굴을 직접 볼 수 있게 되어 들떠 있던 아이였으니 궁금할 만도 했다.
“그래 잘생기긴 했지.”
“조각 같다는데 정말 그래요?”
“응. 말하는 조각상이야.”
난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대충 대답해 주었다.
“전 언제쯤 볼 수 있을까요?”
“글쎄.”
릴리한테는 미안한 말이지만, 이왕이면 그녀가 일리온의 얼굴을 보기도 전에 쫓겨나길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