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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3)화 (3/159)

3화

내 대답이 그리 설득력 있지 않은 모양인지 릴리의 얼굴은 펴질 줄 몰랐다.

“아니 그게 아니라. 아가씨도 참, 이런 쓸모없는 땅이 뭐가 좋으세요? 게다가 돈도 없으시잖아요.”

쓸모없으니까 좋은 거야! 비싸면 더 좋고! 그리고,

“내가 돈이 왜 없어? 이제 곧 제국에서 가장 돈 많은 남자랑 결혼할 건데, 빌리면 되지.”

착한 어른은 절대 해서는 안 될 말을 하며 웃자, 릴리가 입을 쩍 벌리며 날 바라보았다.

그래. 네가 생각해도 모시는 아가씨가 정신이 나가 보이겠지. 그렇지만 이 정도는 해야 쫓겨날 수 있는 거 아니겠니?

넋이 나간 릴리를 뒤로하고 중개사에게 질문을 던졌다.

“중개사님? 이 땅은 얼마 정도 하나요?”

부동산 중개사의 뇌가 빠르게 움직이는 게 보였다. 저 조그마한 뇌로 열심히 계산기를 두드리는 중이겠지.

“영애께서도 보시다시피 땅이 좀 좋은지라……. 아무리 못해도 2천 골드는 주셔야 합니다. 이것도 정말 가격 잘 쳐 준 거예요.”

개소리를 정성스럽게 하는군. 맘에 들었어. 합격!

“어머나, 정말 좋은 가격이네요. 구매하기로 하죠.”

“그럼, 1800까지 깎아……, 예? 저, 정말로요? 2천 골드라고 들으신 거 맞죠?”

내 말에 부동산 주인은 당황하며 횡설수설했다.

아니, 네 입으로 2천 골드라며. 왜 네가 더 당황하는 건데.

단박에 200골드를 깎아 줄 생각을 하고 있던 걸 보면, 땅 가격이 생각보다 저렴한 모양이었다. 1000골드, 아니 주인의 표정을 보아하니 500골드 이하일지도 모르겠다.

하긴, 누가 줘도 안 가질 땅인데, 다른 의미로 부르는 게 값이겠지.

“물론이죠. 2000골드에 구매할게요.”

내 말에 주인은 만면에 피어오르는 미소를 숨기지 못하고, 계약서를 준비하겠다며 서둘러 마차로 향했다.

“저, 아가씨. 그런데 대금은 어떻게 준비하실 건데요? 공작님께서 허락해 주실까요?”

“어머, 릴리. 공작님의 허락이 왜 필요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되묻는 릴리를 보며, 그녀가 아직 깨닫지 못한 정답을 친절히 알려 주었다.

“내가 언제 공작님한테 돈을 빌린다고 그랬니? 대출은 은행 가서 받아야지.”

“네?”

“릴리 너도 알아 두렴. 돈은 지인한테 빌리는 게 아니야. 은행한테 빌리는 거지. 지인이랑 돈 관계로 엮이면 인생 피곤해진다.”

“……네?”

릴리는 울상을 지으며 다시금 제가 들은 게 맞냐고 물어보았다.

나, 참. 요즘 왜 이렇게 내 말을 의심하는 사람이 많은 거지? 그렇게 신용이 없나?

이게 다 라벤느가 너무 순진하게 생겨서라니까.

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마차에 올라탔다.

***

세상 물정 모르는 영애를 연기하는 건 꽤 지치는 일이었다. 산을 오르느라 구두와 드레스는 엉망이 되었고, 머리는 잔뜩 헝클어져 있었다. 게다가 장시간 멀미로 체력마저 바닥이 나 버렸다.

그래도 아직 잔금을 치르는 일이 남았기에 뻗어 있을 수만은 없었다.

반쯤 시체가 되어 비척비척 일어선 나는 릴리의 도움을 받아 마차 안에서 최대한 치장을 하고 은행을 방문했다.

“아가씨, 셀레스타인 상단의 주거래 은행은 여기가 아닌데요.”

“나도 알아.”

“그럼 왜?”

궁금해하는 릴리를 뒤로하고 은행 문을 열었다.

돈을 빌릴 때는 자신감이 중요한 법이다. 최대한 자세를 곧게 펴고 미소를 지으며 주변을 둘러보자, 누군가 새하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뛰쳐나왔다.

난 그의 옷에 달린 이름표를 살폈다.

‘은행장, 빈센트.’

은행장이 이렇게 달려 나올 정도면 역시나 셀레스타인의 이름이 대단하긴 대단한 모양이었다.

“리슈펠트 영애께서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아, 그럼 잠시 안쪽으로 들어오셔서 얘기를 나누시죠.”

주변 사람들의 이목을 신경 쓰며 말하자, 내 의도를 눈치챈 은행장은 날 안쪽으로 안내했다.

은행장의 개인실로 자리를 옮긴 나는 그가 내놓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이 은행에서 제일 높은 사람답게 마시는 차 취향도 고상했다.

내 입맛이 아니라는 얘기였다.

한 모금 마시고 더 이상 손이 가지 않을 것 같은 차를 테이블에 내려놓은 뒤 나는 바로 용건을 꺼냈다.

“돈을 좀 빌리려고 왔는데요.”

“예? 셀레스타인 공작님께서요?”

“아뇨, 제가요.”

셀레스타인처럼 돈 많은 사람이 무슨 돈을 빌리려는 건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있던 빈센트는 내 대답에 의구심을 드러냈다.

“영애께서 왜?”

“은행장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제가 곧 셀레스타인 공작님과 결혼을 하잖아요?”

‘셀레스타인’과 ‘결혼’이란 말에 힘을 주어 말했다.

다시 말해, 나는 앞으로 셀레스타인가의 안주인이 될 사람이니 내 신용도는 곧 셀레스타인의 신용도와 동일하다는 어필이기도 했다.

“그런데, 흔한 보석으로 치장하고 싶지 않아서요. 물론 공작님께서는 다 사 주시겠다고 하셨지만, 저희 가문이 가난한 탓에 맨몸으로 시집가는데, 예물만큼은 제가 사야지요.”

“그, 그러십니까?”

“그래서 말인데 2천 골드만 빌릴 수 있을까요?”

역시나 철없는 영애처럼 화사하게 웃으며 턱없는 액수를 부르자 빈센트는 당황했다.

그러나 그는 노련한 은행장답게 금세 진정하고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금액이 좀 큰지라, 잠시 생각을 해 봐야겠는데요.”

생각해 본다는 말은 지금 당장 빌려줄 수 없다는 얘기였다.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다가는 이 이야기가 공작의 귀에 들어가 버릴 것이다.

어차피 머지않아 일리온이 알게 되겠지만, 그건 내가 대금을 모두 치른 뒤여야만 했다.

그 때문에 일부러 소식이 늦게 도착하도록 셀레스타인 상단의 주거래 은행이 아닌 이곳을 찾은 것이다.

그의 망설임이 길어져 봐야 손해인 나는 쐐기를 박듯 말을 흘렸다.

“이번 건만 잘해 주시면 공작님께 얘기해서 이 은행을 주거래 은행으로 바꾸는 데 도와드릴 수도 있는데…….”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는, 이곳이 상단의 주거래 은행이 아니기에 던질 수 있는 미끼 때문이다.

셀레스타인 상단의 주거래 은행이 가지는 의미는 상당했다. 제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상단이 자금을 맡기는 곳. 다시 말해, 이 상단과 거래를 하면 단숨에 제국 제일의 은행으로 치고 올라갈 수 있다는 얘기였다.

물론 공작한테 부탁해 봤자 재고할 것도 없이 단칼에 거절당하겠지만 세상 사람들은 다행히 그 사실을 모른다.

세상은 나를 세기의 신데렐라라고 말하고 있었고, 공작과의 결혼을 신분을 초월한 사랑의 결실이라 떠들기 바빴다.

그러다 보니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은 내 말이라면 공작이 껌뻑 죽는 줄 안다.

물론 어디까지나 언론이 뿌린 추측성 기사일 뿐이지만 지금 지점장은 내가 공작에게 그 정도의 영향력이 있다고 믿고 있을 것이다.

빈센트는 잠시 고민하는 듯 수염을 만지작거렸다. 머릿속은 지금 계산기를 두드리느라 정신없을 것이다.

셀레스타인 상단의 주거래 은행이라니. 거절하기엔 무척이나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겠지.

“어려우시다면 어쩔 수 없죠. 다른 은행에 가 볼…….”

“잠깐 기다려 주세요, 영애! 물론 대출해 드려야죠. 신용은 충분하시니까요.”

빈센트는 혹여 내가 다른 은행으로 갈까 봐 황급히 붙잡았다.

“호호호. 이렇게 흔쾌히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참, 이 건은 부디 공작님께 비밀로 해 주세요.”

내 말에 그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은행장의 허가로 대출은 당일에 바로 나왔다.

꽤 큰 돈임에도 불구하고, 오직 신용만으로 이토록 많은 돈을 빌려줄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었다.

이게 바로 권력과 재력이 주는 안락함인가?

전세 대출 하나에도 쩔쩔매며 은행을 방문하던 게 얼마 전의 일인데, 셀레스타인 이름만 들먹이는 것만으로 이렇게 쉽게 돈이 나오다니. 역시 돈은 많고 볼 일이고 권력은 쥐고 볼 일이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제법 묵직한 돈주머니를 들고나오자 릴리가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정말 빌리신 거예요?”

“그럼. 바로 빌려주던데?”

안에서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알 리 없는 릴리는 마냥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보았고, 난 태연하게 마차에 올라탔다.

***

“흠흠, 땅 주인께서는 오늘 바쁜 일이 있으셔서, 못 오신다고 하시네요. 아아,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문서는 미리 다 받아 두었으니까요.”

중개사는 가증스럽게 웃으며 설명을 했다. 본인이 중간에 돈을 남겨 먹으려면 땅 주인이 있으면 안 되겠지.

거래하자는 말에 이미 한발 먼저 땅문서를 주인에게서 사 온 거라고 생각하지만, 뭐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온종일 여기저기를 돌아다녀서인지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가고 있었고, 심신이 피곤한 나는 적당히 계약서를 읽고 서명을 했다.

“그럼 이걸로 계약이 성사된 겁니다. 나중에 무르겠다고 하시면 안 됩니다.”

주인은 혹여 셀레스타인 공작이 찾아오는 게 아닌지 걱정스러운 모양이었다. 어쩌면 거래 이후로 이 다 쓰러져 가는 가게가 사라질 것을 염려하는 걸지도.

그가 뭘 걱정하는지는 알겠으나, 일리온이 가게를 찾아올 일은 없었다.

일리온이라면 차라리 나랑 파혼할지언정, 사람을 보내지는 않을 테니까.

약혼녀가 멍청해서 사기당했다고 광고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말이다.

파혼이 결정된다면 난 당연히 위자료를 요구할 예정이고, 내 이름으로 빌린 2천골드는 위자료로 메꾸면 그만이었다.

약혼녀라고 이렇게나 대대적으로 광고했는데 파혼이라니.

평생 결혼도 못 하고 늙어 죽을 수도 있는데, 당연히 공작님이 보상해 주셔야지.

그러니 릴리도 중개사도 너무 걱정할 필요 없었다.

“물론이죠.”

나는 그를 안심시키며, 2천골드짜리 종이 쪼가리를 들고 가게를 나왔다.

***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몸을 이끌고 저택에 도착하자, 하녀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공작저의 하녀들은 어딘가 모르게 날 깔보는 태도를 보였다.

내심 그들도 지체 높은 가문의 딸을 안주인으로 모시고 싶었을 텐데, 이름만 백작인 영지도 없는 가문의 딸이 주인이라고 저택에 눌러앉았으니 달가울 리 없을 만도 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돈 없는 집안에서 팔려 온 내 팔자지 뭐.

아무튼, 내가 어디서 뭘 하든 관심 없는 하녀들이었기에, 날 기다리는 건 평범한 일은 아니었다.

“공작님께서 찾으십니다.”

하녀는 나를 보고 공손히 인사를 건네며 용건을 전달했다.

웬일로 날 기다리나 했더니, 역시나 공작의 부름이었다.

오늘 벌인 일이 벌써 일리온의 귀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굳이 이 밤중에 날 부르진 않을 테니.

못해도 하루는 걸리겠지 싶던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종일 걸어서 엉망인 드레스와 구두, 땀인지 기름인지 모를 것으로 번들거리는 얼굴, 털어 내면 먼지가 한 바가지는 나올 것 같은 머리 상태까지.

물론, 일리온이 내 몰골을 어떻게 생각하든 알 바 아니었지만 일단 좀 씻고 싶었다.

“그전에 먼저 씻고 싶은데요. 땀 냄새도 나고.”

“죄송하지만, 저택에 도착하시는 대로 바로 모셔 오라 하셨습니다.”

하녀의 말투는 공손했지만, 표정은 단호했다. 한 번 더 요구해 볼까 하는 내 투지를 꺾을 만큼.

그래, 난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하는 사람이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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