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2)화 (2/159)

2화

그리고 안타깝게도 꿈은 깨지 않았다. 그저 이곳이 현실이라는 걸 다시금 깨달았을 뿐.

다만 현실 도피에도 한 가지 장점은 있었다. 시간이 아주 빨리 갔거든.

그 증거로, 일주일을 어떻게 보냈는지 기억도 안 나지만 내 몸은 어느새 공작가로 배달되어 있었다.

공작저의 푹신한 침대에서 눈을 뜬 나는 한결같이 따사로운 아침 햇살에 눈살을 찌푸렸다. 미세 먼지도, 자동차 소음도 없는 완벽한 아침의 모습이었다.

이걸로 이 세계에서 맞는 일곱 번째 아침이다.

이쯤 되니 정말로 앞으로의 일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릴리, 너라면 꽃길로 된 지옥과 가시밭길로 된 천국 중 어떤 걸 고를래?”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며칠 전에 내 시녀로 고용된 릴리에게 물었다.

이제 스무 살을 갓 넘긴 릴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꽃길로 된 천국은 안 되는 거예요?”

“안타깝게도 인생은 그렇게 날로 먹을 수 있는 게 아니란다.”

“네?”

물론 날로 먹고 싶다! 누구보다도 간절히!

하지만 귀족 영애는 허울뿐이었고, 집안은 평민과 뭐가 다른지 모를 만큼 가난했으며 약혼자는 곧 반역을 저지를 것이다.

하다못해 좀 모자란 사람이 약혼자였으면 좋았으련만, 이놈의 공작은 제국에서 가장 큰 기사단과 상단을 운영하는 가문의 수장이었다.

할 줄 아는 거라고는 먹고 자고 숨 쉬는 것뿐인 내가 과연 도망칠 수 있을까?

장담하건대, 하루 만에 붙잡혀 온다는 것에 내 남은 인생을 걸어도 좋았다. 뭐, 그래 봐야 반년 정도 남았나?

“릴리, 수도의 남자들은 잘생겼다던데, 정말 그래?”

“아무리 잘생긴들 공작님만 하겠어요?”

알게 뭐람. 약혼녀가 와도 나와 보지도 않는 공작 따위.

“전에 그랬지? 내 얼굴이 신문에 쫙 깔렸다고?”

“그럼요. 코흘리개 아이들까지 아가씨의 이름을 알걸요?”

“칫, 바람은 글렀네.”

결국, 꽃길로 된 지옥 역시 보장된 길이 아니었다.

나한테 관심도 없는 공작 대신 수도의 잘생긴 남자들을 옆구리에 끼고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이라도 즐겨 보려 했지만, 내가 공작의 약혼녀라는 걸 알면 누가 들이대겠느냐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대로 죽기엔 너무 억울하다. 그렇다고 내가 먼저 파혼하자는 얘기는 도저히 못 하겠고.

“어떡하지…….”

한참을 이불 속에서 몸부림치던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따지고 보면 이렇게 고민할 일이 아니었다.

내가 안 되면, 일리온의 입에서 먼저 파혼하자는 얘기가 나오면 되는 거 아닌가?

그러려면 그 반듯한 얼굴이 잔뜩 일그러질 정도의 충격이 필요하겠지.

“릴리, 마차 좀 준비해 줘. 마을에 나가자!”

“네? 왜요?”

“갈 데가 있어서.”

생각보다 괜찮은 계획이 떠올랐거든.

***

공작저에 온 지 이틀밖에 안 되었지만, 대강의 분위기는 파악할 수 있었다.

먼저, 이 저택은 내게 그리 친절하지 않았다. 그들이 무례하다는 게 아니었다. 다만, 내게 호의적이지도 않았다.

하긴, 날고 기는 영애들을 다 제치고 공작가에 시집올 영애가 한낱 몰락한 귀족이라니. 나라도 맘에 안 들겠다.

게다가 약혼녀가 공작저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내다보지도 않는 주인을 보면, 이미 내가 얼마나 허수아비 약혼녀인지 눈치챘을 것이다. 모르는 게 이상하지.

원작 속 한없이 다정했던 남자는 대체 어디로 가고, 어디서 이런 찬바람 풀풀 날리는 북부 대공 같은 남자가 나타난 걸까?

심지어 여긴 북쪽도 아니잖아!

유난히 따스한 햇볕을 쬐며 내 얕고 넓은 판타지 세계의 지식이 얼마나 덧없는지 한탄스러웠다.

뭐, 기대한 것보다 대우가 나쁘긴 했지만, 그래도 원작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 이해는 갔다.

일리온은 대외적으로 내보일 수 있으며, 사교계에 알려지지 않고, 결혼을 빌미로 자신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을 가문의 여식을 원했다. 몰락한 귀족의 여식인 라벤느는 그 조건에 딱 맞는 여자였다.

어디까지나 비즈니스 관계였으니 일리온이 내게 관심이 없다 해서 억울할 일도 아니었다.

그러니 우리가 뭐 그리 절절한 사이라고 같이 죽을 필요가 있냔 말이다.

세기의 사랑은 여주랑 찍고, 무덤은 나랑 같이 들어가자고? 억울해서 눈이나 감을 수 있겠냐고!

“아가씨, 도착했어요.”

릴리의 말에 상념에서 빠져나와 활기가 넘치는 시내를 바라보았다.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이제야 조금 이곳이 소설 속이라는 실감이 들기 시작했다.

“릴리는 수도에서 살았다고 했지?”

“네. 여기서 하녀 교육을 받았어요.”

“그럼 이곳 지리에 빠삭하겠네?”

“물론이죠! 어디 가고 싶은 곳 있으세요? 카페? 의상실? 말씀만 하세요.”

릴리가 자신에 찬 모습으로 두 손을 불끈 쥐며 말했다. 어디든 안내하겠다며 잔뜩 들뜬 모습이었다.

“그럼 부동산 중개소를 좀 소개해 줘.”

“네? 부동산이요?”

예상했던 대답과는 한참 떨어진 모양인지, 릴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응. 이왕이면, 허름하고 주인이 가장 양아치 같아 보이는 곳으로 부탁해.”

“야, 양아치요? 좋은 데 놔두고 왜 하필 그런 곳에 가고 싶으신데요?”

부동산에 가자는 것도 이해가 안 가지만, 덧붙이는 사족 역시 도무지 이유를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그야, 그런 데가 순진한 영애가 가서 눈 뜨고 코 베이기 딱 좋으니까!

물론 릴리에게는 자세한 이유를 말해 줄 수 없기에, 난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의도를 알 수 없는 내 부탁에 릴리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고, 이따금 날 힐끔거렸다. 내 말대로 안내를 해 주는 게 옳은 일인지 자신이 없는 모양이었다.

“어머, 릴리. 길을 모르는 거야?”

“그, 그럴 리가요! 가시죠, 아가씨! 제가 수도에서 제일 악명 높은 중개소로 안내해 드릴게요!”

귀엽기는. 내 도발에 넘어간 릴리는 씩씩하게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셀레스타인 공작은 세상 물정 모르고, 마냥 곱게 자라 머릿속이 꽃밭인 영애들을 끔찍하게 싫어했다.

우연을 운명이라 부르짖으며 어떻게든 일리온과 대화라도 한번 해 보려 귀찮게 굴었으니까.

거기에 대한 내 생각은 조금 달랐지만…….

정말로 머릿속이 꽃밭이라면 그렇게 안 할 거거든.

하지만 일리온은 이미 그런 영애들에게 이골이 난 사람이니, 그런 사람들에 대한 편견이 머리 깊숙이 박혀 있을 것이다.

라벤느를 결혼 상대로 고른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고르고 골라서 부인으로 맞이할 여자가 위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것도 모자라서 그 청순하고 꽃만 든 뇌로 가산을 탕진하려 한다면 어떨까?

일리온은 머리가 좋으니 내 정신 나간 금전 감각을 몇 번 경험하다 보면, 그의 입에선 자연스럽게 파혼 이야기가 나올 것이다.

제국 제일의 상단을 운영하는 가문의 안주인으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겠지.

어느 쪽도 꽃길이 아니라면, 하다못해 지옥에라도 가지는 말아야지.

그게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도착한 곳은 간판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위태롭게 달려 있는 가게였다.

대롱거리는 간판이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히 문을 열고 들어가자, 콧수염을 이상하게 기른 남자가 의자에 거의 눕다시피 앉아 신문을 읽다 날 슬쩍 바라봤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날 한참 뚫어져라 보더니, 이내 의자에서 스프링처럼 튕겨 나왔다. 그리곤 허둥지둥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내게 다가왔다.

“아이고, 이런 누추한 곳에 리슈펠트 영애께서 어쩐 일이십니까?”

수도의 사람들이 내 얼굴을 다 알 거라 했던 릴리의 말은 사실인 모양이다. 덕분에 자신의 지위와 재력을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땅을 좀 사고 싶어서요.”

“땅이요?”

“네. 괜찮은 임야를 좀 보여 주시겠어요?”

“건물이 아니고, 임야를요?”

“네. 공기 좋고 물 맑은 곳이면 정말 좋을 것 같아요.”

헤실거리며 요청하자 중개인의 눈빛이 바뀌었다. 아주 요리해 먹기 그만인 호구를 잡은 눈이었다.

그래, 내 성심성의를 다해 호구가 되어 줄 테니 어디 한번 빨대를 잘 꼽아 보렴.

“요즘 휴양지를 찾는 귀족분들이 많긴 하죠. 일단 지도를 한 번 보고 직접 가 보실까요?”

그는 부산스럽게 지도를 가져와 테이블에 펼치며 말했다.

“이곳으로 말할 것 같으면 수도에서 가깝고, 공기도 좋고, 경치도 그만이죠. 휴양지로는 제격입니다.”

주인은 지도 한군데를 가리키며 그곳이 얼마나 좋은 곳인지에 대해 읊었다. 아직 마지막 남은 양심을 채 버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난 그가 보여 준 지도를 들여다보다 그가 추천한 곳이 아닌 다른 곳을 짚었다.

“여긴 어떤가요?”

교통도 불편하고 산세도 험해 주변엔 아무도 살지 않으며, 굳이 누군가 들어가서 살 것 같지도 않은 땅을 가리키며 묻자 주인이 머뭇거렸다.

“여긴…….”

“땅 모양이 아주 예쁜 게 여기가 맘에 들어요”

그리고 하트 모양이었지.

“예?”

내 정신 나간 얘기에 주인은 얼이 빠져 물었다. 더불어 옆에서 가만히 듣던 릴리의 얼굴에도 경악이 물들었다.

이런 쓸모없는 땅을 사서 뭐 하냐고 말하고 싶은 눈치였다.

“그, 그렇죠. 모양이 아주 예쁘죠. 영애께서 보는 눈이 있으십니다. 그럼 이 땅을 보러 가실까요?”

“네, 그러죠.”

그러나 당황하는 것도 잠시, 그는 곧바로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이제야 조금 쓸 만한 낚시꾼의 모습이 되었다.

***

“우욱.”

“어머, 아가씨 괜찮으세요?”

“으, 아니……. 그보다 아직 멀었어?”

나는 울렁거리는 속을 부여잡고 물었다. 창밖은 어찌 된 일인지, 나무와 바위밖에 보이지 않았다. 마을을 벗어난 게 벌써 한 시간 전 같은데, 가도 가도 산뿐이라니.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가까운 곳으로 고르는 건데!

울퉁불퉁한 길을 내달릴 때마다 아침에 먹었던 수프와 빵이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우욱…….”

나는 다시 한번 입을 막으며 올라오는 토기를 삼켰다.

“아직 한참 남았어요. 조금만 참으세요. 아가씨.”

빌어먹을 세계관. 땅은 또 왜 이렇게 넓은 건데? 하 진짜…….

역시 사람은 안 하던 짓을 하면 탈이 나는 모양이었다.

한참을 달려서 도착한 곳은 지도에서 본 것보다 더욱 처참했다. 산세가 험한 데다 바위산이라 농사도 힘들고, 그렇다고 나무가 많은 것도 아니라 돈 될 구석은 전혀 찾아보기 힘들었다.

아, 물론 공작 뒤통수에 던지기 적당한 돌은 지천으로 깔려 있었지만.

“어떠십니까?”

부동산 주인도 이 정도로 처참한 땅인 줄은 몰랐던 모양인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말했다. 이제 와서 별로라고 그러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주 맘에 들어. 그래 이 정도는 돼야지!

“생각보다 정말 좋은 땅이네요! 호호호. 역시 이 정도 땅이면 꽤 비싸겠죠?”

나는 뇌 청순, 철없는 영애 컨셉을 유지하며 물었다.

네가 잡은 호구 중 가장 큰 호구가 돼 줄 테니, 어디 가격을 최대치로 불러 보시죠.

시종일관 미소를 유지하며, 중개사의 답을 기다리는데 릴리가 갑자기 내 손을 붙잡고 귓가에 속삭였다.

“아가씨, 정말 이걸 사시게요?”

“응, 그럴 건데?”

“제가 아무리 아는 거 없고, 까막눈이여도 이 땅은 별로예요. 게다가 저 중개사도 뭔가 사기꾼 냄새가 나고…….”

최대한 믿음직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안절부절못하는 릴리를 진정시켰다.

“그건 걱정하지 마. 부동산 중개 허가증도 제대로 갖고 있던걸?”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