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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1)화 (1/159)

1화

“저게 뭐고. 저 봐라, 저. 남자 잘못 만나서 난리다, 난리야.”

어린 시절 할머니는 종종 드라마를 보면서 기구한 여주인공의 인생에 대해 한탄을 하곤 하셨다.

“아이고, 불쌍해서 어째.”

드라마에 관심이 없던 나는 할머니가 왜 그렇게 화를 내는지 몰랐다. 그 당시 어린 나의 관심이라고는 그저 테이블에 놓여 있는 사탕뿐이었으니까.

할머니 옆에 누워 사탕을 하나씩 까먹고 있으면, 할머니는 종종 이런 말씀을 하셨다.

“지하야.”

“응?”

“니는 저런 놈 만나면 안 된다.”

“왜?”

“저런 놈이 여자 인생도 말아먹는 기다. 그러니까 너는 번듯한 남자 만나라. 알았제?”

‘저런 놈’이란 게 대체 무슨 놈인지 이해할 수도 없는 5살의 내게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세상 사는 낙이, 나와 드라마뿐이시던 할머니는 몇 번이고 내게 신신당부를 하셨다.

“응. 알았어.”

그때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할머니는 날 끌어안으며, 우리 강아지 하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어쩌면 할머니는 이걸 예상하신 걸지도 모르겠다.

남자를 잘못 만나 단두대에서 목이 잘릴 내 운명을 말이다.

***

‘빙의돼 버렸다. 그것도, 여주를 괴롭히다가 사형당하는 악녀에……!’ 라는 흔하디흔한 로맨스 판타지의 도입부를 스스로 내뱉게 될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왕 내뱉을 거라면 앞으로 내 목표는 돈 많은 백수! 역하렘! 주지육림! 같은 정신이 글러 먹은 어른이라면 한 번쯤 꿈꾸는 거창한 목표를 내뱉고 싶었다.

백작의 여식이라면 모름지기 이 세계의 특권층 아닌가!

아아, ‘특권층’이라니, 이 얼마나 동글동글하고 귀여운 단어인지!

평범한 사람이었을 적에는 사회의 부조리를 비난하기 위해 열변을 토하며 내뱉었을 단어겠지만, 손에 쥐기만 한다면 목숨 바쳐 지킬 소중한 단어였다.

그리고 이 권력을 이용해 방탕한 어른이 되고 싶다는 그런 소박한 꿈을 꾸고 싶었다.

그래, 어디까지나 내가 좀 더 평범한 백작가의 영애였다면 그랬을 거란 말이다.

“누님께서 이대로 돌아가시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답니다.”

낯선 천장 따위에 놀라지 않는, 로맨스 판타지로 절여진 뇌는 이 상황을 빠르게 인식하고 있었다.

날 누님이라고 부르는 오늘 처음 본 소년은 내 손을 꼭 잡고서 어쩐지 사뭇 과장된 연기로 날 걱정스레 올려 보았다.

왜 연기라고 생각하냐면, 그야 문밖에서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으니까.

‘정말 도움이 안 되는군. 그나마 시집이라도 가서 사람 구실 하나 생각했는데…….’

한겨울 서릿바람보다도 차가운 목소리로 날 비난했던 동생이 내가 깨어났다는 걸 알자마자 태도를 바꿔 걱정한 척해 봐야, ‘가족물인가?’ 같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어제 읽었던 로맨스 판타지 소설의 영향으로 꿈을 꾸고 있는 게 분명했다.

“누님, 안 그래도 공작님께서 걱정하신 모양인지 직접 오셨어요. 빨리 준비하고 내려오세요.”

일어나자마자 공작을 만나라니. 시작부터 하드 모드네.

아직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겠지만, 로판 세계의 불문율은 알고 있다.

공작은 지위가 높다는 것. 그리고 그런 높으신 분 앞에서 나 같은 일개 귀족은-방을 보아하니 귀족이 맞나 의심스러울 정도지만- 작은 실수에도 목이 날아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세계의 예법이 머릿속에 파바밧 하고 떠오르면 좋으련만, 꿈 주제에 그런 편의는 제공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예법은커녕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데다 옆에는 내게 적대감을 가진 소년까지 주렁주렁 달고서 공작을 만나라고?

나가 봐야 귀찮아질 게 분명했기에, 나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앓는 소리를 냈다.

“아직 몸이…….”

“누님, 지금 그런 말을 할 처지가 아닐 텐데요?”

“……응?”

어설픈 연기가 들켰나 싶어 소년을 바라보자, 표정이 싹 바뀐 그가 말을 이었다.

“누님을 살리겠다고 의사와 사제를 불렀어요. 들어간 돈만 이미 수십 골드란 말입니다. 제 말이 무슨 말인지, 누님께서는 똑똑하니 이해하시겠죠?”

아니,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데…….

시시각각 변하는 소년의 표정에 꿀 먹은 벙어리마냥 입을 다물고 눈치를 살폈다.

보통 상대방이 돈을 들먹이며 강압적으로 나올 때는 ‘돈값은 해야지 않겠니?’라는 말이 숨겨져 있었고, 눈칫밥이라면 남 부럽지 않게 먹어 온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이 나간 뒤, 낡은 드레스 몇 벌이 걸린 옷장에서 그나마 상태가 괜찮아 보이는 옷을 꿰입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대체 누구한테 빙의한 거지?

침대 하나만 놓인 작디작은 방에는 주인의 정체를 알 수 있을 만한 어떠한 단서도 놓여 있지 않았다.

그나마 알 수 있는 건, 내가 탁한 베이지색 머리카락에 녹색 눈동자를 가진 20살 남짓의 여자라는 사실뿐이었다.

결국, 그럴듯한 단서 하나 없이 의문만 한가득 안고 거실로 내려가자, 소년의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거실에 빙 둘러앉아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건, 이 낡은 공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귀티가 잘잘 흐르는 남자였다.

날 누님이라고 부르던 동생도 잘생겼다 생각했지만, 남자는 아예 종족이 다른 느낌이었다.

세상의 조명이란 조명은 모조리 가져다 댄 것처럼 혼자 빛나는 남자를 보며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하는데 중년의 여자가 내 손을 끌어당겼다.

“어머, 라벤느. 몸은 좀 괜찮니?”

조금 거친 그녀의 손길에 이끌려 엉거주춤 옆자리에 앉았다.

내가 빙의한 사람의 이름이 라벤느인가?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있는데. 어디서 읽었더라…….

“공작님께서 네가 걱정되어 이렇게 찾아오셨단다.”

라벤느의 아버지로 보이는 중년의 남자가 날 보며 말했다. 내가 걱정돼서 찾아왔다고? 저렇게 잘생긴 남자가 나를?

평민, 혹은 몰락한 귀족 영애와 공작의 로맨스를 다룬 소설들을 떠올려 보았지만, 여전히 라벤느라는 이름은 너무 생소했다.

그렇다고 이 상황에서 공작의 이름을 물어보는 것도…… 실례겠지.

입 다물면 중간이라도 간다는 명언을 되새기며 공작을 힐끔 바라보았다.

검은 머리카락에 붉은 눈동자, 조각처럼 잘생긴 얼굴은 로맨스 판타지 소설을 나열한 뒤 적당히 하나 고르면 열에 아홉은 얻어걸릴 법한 남자주인공의 외모였다.

“안 그래도 공작님께서 결혼하기 전까지 공작저에 살면서 적응하는 건 어떨지 물어보셨다.”

결혼? 이렇게 잘생긴 남자랑 내가? 이 정도면 로또 당첨인데?

갑자기 퐁퐁 솟아오르는 내적 친밀감에 공작의 차가운 얼굴마저도 다정해 보이는 착시 효과를 느끼며 혼자 감동에 젖어 갈 때쯤, 그가 입을 열었다.

“일주일 내로 공작저에 들어왔으면 하네. 준비할 게 많다면 사람을 보내 줄 테니.”

“알겠습니다. 맞춰서 준비하도록 하죠. 라벤느, 너도 가서 잘 배우도록 하거라. 넌 앞으로 셀레스타인가의 안주인이 될 테니…… 듣고 있니?”

“아, 네. 그럼요!”

눈앞의 남자와 결혼하는 것을 상상하던 난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주변의 눈초리가 따갑다.

그나저나, 셀레스타인이라. 엊그제 읽었던 피폐물 소설의 서브남주랑 이름이 똑같다니, 참 우연이네.

어쩌면 이렇게 생김새까지 똑같…….

나는 머릿속에서 끝도 없이 피어오르는 꽃 더미를 치워 내며, 다시 한번 셀레스타인 공작을 바라보았다.

공작은 마시던 차를 내려놓고 막 자리에서 일어서던 참이었다.

“그럼 용건은 끝났으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겠네, 리슈펠트 백작.”

리슈펠트라고?

설마 내가 그 ‘라벤느 리슈펠트’야?

생각해 보면 나는 어렸을 때부터 엄청난 똥손이었다. 뽑기, 사다리 타기, 랜덤 박스 등 무엇 하나 제대로 된 걸 뽑아 본 기억이 없을 정도로.

학교에서 자리 뽑기를 하면 언제나 맨 앞자리가 걸렸고, 도둑잡기에선 매번 조커를 뽑았으며, 99% 성공률을 자랑하는 게임에선 연이은 실패로 아이템과 함께 멘탈이 터져 나갔다.

하다못해 좋아하는 소설에서마저 내가 잡은 커플 주식은 반드시 휴지 조각이 된다고 하여 지능적 안티라는 억울한 오해를 산 적도 있었다.

참, 사람이란 쉽게 바뀌지 않는 모양이다. 이렇게 또 한 번 꽝을 뽑아 든 걸 보니 말이다.

내가 빙의하게 된 ‘제국의 장미는 두 번 핀다.’는 내 서재 목록 중에서도 유독 튀는 소설이었다.

피폐물이라는 장르에 걸맞게, 독자의 멘탈까지 피폐하게 만들어 버리는 지독한 스토리 진행으로 후반부에 가서는 매 화가 종착역을 방불케 했다.

하차하는 사람만 넘쳐 났다는 얘기다.

포로로 잡혀 온 성녀와 폭군인 황제, 그리고 여주인공에게 미쳐 반역을 결심하는 서브남주까지.

꿈도 희망도 없는 소설답게 내일이 없는 놈들만 모였다.

눈앞의 남자가 바로 그 서브남주 일리온이고, 나는 그의 약혼녀이자 성녀를 독살하려다 사형당한 라벤느였다.

그래서 그 반역이 성공했다면 내가 얼마나 똥손인지 이렇게 줄줄 읊지도 않았다.

문제는 공작의 반역이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이고, 그 결과 공작을 비롯해 그의 일가친척은 물론, 저택의 모든 사람이 처형당한다.

시한부가 유행이라지만 이런 시한부는 바란 적이 없는데요?

아니, 지병도 없는데 자연사를 걱정해야 한다니……. 나는 대체 무슨 죄야?

이제 와 생각해 보면 ‘빙의돼 버렸다. 그것도, 여주를 괴롭히다 사형당하는 악녀에……!’ 는 차라리 귀여운 감탄사였다.

그건 희망이라도 보이지.

이런 경우엔 그래,

“XX!”

방에 돌아와 혼잣말을 내뱉던 난 잠시 숨을 골랐다.

아니지. 이렇게 열 낼 거 없잖아? 어차피 이건 다 꿈인걸. 그래, 자고 일어나면 깰 거지같은 악몽일 뿐이야.

그러니 잠이나 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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