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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잘 키워보려고 했을 뿐인데 (129)화 (129/129)

내게는 에드윈의 대견함을 확인한 티타임이었지만 레이넌은 전혀 다른 시간을 보낸 것 같았다.

티타임 이후 레이넌은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한테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뭔가 속상한 건지, 외로운 건지 알 수 없는 감정이 내내 그를 에워싸고 있었다.

가끔 원망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레이넌이 조금은 안쓰럽게 느껴졌다.

너무 에드윈 편만 들었나. 아니, 그래도 설마 애한테 경쟁심을 가질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해는 넘어갔고, 오늘 밤 역시 나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자연스럽게 레이넌의 침실로 들어서고는 내내 궁금했던 걸 물었다.

“혹시 제가 에드윈 칭찬만 해서 속상하셨어요?”

“아니.”

다른 때보다 무뚝뚝한 그의 대답을 듣고 나는 조심스럽게 다른 추측을 꺼내 봤다.

“그럼 혹시 토라지신…….”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레이넌은 고개를 휙 돌려 나를 바라봤다.

“……건 아니시겠죠?”

강렬한 그의 시선에 나는 하려던 말의 방향을 완전 반대로 바꾸었다.

여전히 살아 있는 내 생존 본능에 놀라는 사이 레이넌은 작게 한숨을 쉬고는 속마음을 털어놨다.

“이것 봐. 그대와 나의 사이는 바뀌었는데 그대는 바뀌지 않았지.”

“일종의 직업병이라서요.”

어색하게 웃는 나와는 달리 레이넌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나한테도 시간이 필요해. 그대와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그러기 위해서 그대와 함께 보낼 시간이 필요하단 말이지.”

어떤 의미인지 바로 알아들은 나는 슬쩍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붙잡았다.

입술까지 물고 웃음을 참는 나를 보고도 레이넌은 말을 계속 이어 갔다.

“에드윈이랑은 시간을 훨씬 많이 보내지 않았나. 그만큼 편안하게 여기고.”

“그랬죠.”

“하지만 그대는 나를 아직 그만큼 편히 여기지 않는 것 같아. 나는 그게 부족한 시간 때문인 것 같군.”

그의 말에 나는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작게 새어 나온 웃음이었지만 레이넌은 진지하게 되물었다.

“너무 유치한 질투 같은가.”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나는 그의 두 손을 잡았다. 레이넌은 잠시 내 손을 바라보더니 힘을 주었다.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에드윈만큼 공작님이 편해지려면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 건 당연한걸요.”

레이넌은 내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듯 의아한 얼굴을 했다.

이번엔 내가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마음을 꾹꾹 눌러 담은 힘에 레이넌은 조금은 편안해진 듯했다.

지금까지 꼭 붙들고 있던 손에 오히려 힘을 조금 풀며 그는 옅은 미소를 보였다.

“이렇게 손만 잡아도 아직 많이 떨려요. 여전히 자고 일어나면 공작님의 마음이 갑자기 변하는 게 아닐까 불안할 때도 있고요.”

나직하게 흘러나오는 내 말에 레이넌은 입을 꾹 다물고 빤히 나를 바라봤다.

“에드윈이랑 공작님을 향한 사랑은 다른 형태를 지니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시간이든 다른 무엇이 되었든 같을 수 없어요.”

“그래. 그런 거였군.”

뭔가를 참는 것 같기도, 울컥한 것 같기도 한 레이넌의 모습에 슬쩍 입꼬리를 올리자 그는 그대로 입술을 겹쳐 왔다.

다급하고 거칠게 밀어붙이는 그의 손길에 몸이 조금씩 뒤로 밀렸다.

그리고 침대에 다리가 걸렸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그 와중에도 레이넌은 내가 다칠까 걱정되었는지 내 뒤통수를 손으로 감쌌다.

레이넌이 말했듯 조금 더 편안해질 때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의 배려도, 이런 뜨거운 접촉도 조금씩 자연스러워지고 있었으니까.

“이제 여유가 좀 생겼나 보군. 다른 생각도 하고.”

레이넌은 언제 불안해했냐는 듯 평소와 같이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그 끝에 아주 미약한 웃음이 담겨 있었다.

변명을 할 시간은 주지 않았다. 레이넌은 오히려 잘됐다는 듯이 평소보다 더욱더 끈질기고 격렬하게 나를 파고들었다.

***

뜨거웠던 침실의 온도가 조금은 내려갔지만 그의 품 안은 여전히 따뜻했다.

레이넌의 품 안에 안겨 있던 나는 조심스럽게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그나저나 타나베른 후작은…… 언제부터 슈나이더의 사람이 되었어요?”

예민할 수도 있는 질문이었지만 레이넌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아버지께서 살아 계셨을 때부터.”

그리 짧은 시간은 아니리라 짐작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정도로 오래전부터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타나베른이 슈나이더의 사람이라는 것만으로도 레이넌에게는 큰 충격이었을 터였다. 그런데 그 오랜 시간 동안 슈나이더의 사람이었다니.

이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레이넌이 어떤 기분이었을까.

문득 그때 함께 있어 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형님의 사고도 타나베른이 큰 몫을 했더군. 형님의 장례식에서 눈물까지 흘린 사람이.”

아마 함께 있었더라도 큰 도움이 되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어떤 위로의 말을 할 생각도 못 하는 지금처럼.

위로의 말 대신 안고 있던 손에 힘을 주고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레이넌이 오히려 나를 달래듯 천천히 내 등을 쓸어 주었다. 그 손길이 너무도 다정하고 부드러워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사람을 아예 안 믿고 살 수는 없지. 대신 따지고 따져서…….”

잔잔히 이어지던 말은 끝내 흐려졌다.

“그래도 폐하나 로만, 아멜리아, 에드윈, 그리고 저까지……. 신뢰 없이 살아오신 것치고는 많이 얻으셨는데요.”

내 말에 그는 작게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렇군.”

그리고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뭔가 골똘히 생각하던 그는 다시금 입을 열었고, 조금 전과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했다.

“그렇군, 정말.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대 말대로 많았어.”

“그렇죠?”

뿌듯한 목소리로 되묻는 나에게 그는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만 이마에 입을 맞추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타나베른도 슈나이더도 황궁의 감옥에 갇혀 있어. 슈나이더는 곧 공개 처형을 당할 거고, 타나베른은 슈나이더 일당들과 함께…….”

“그래서 많이 바쁘셨군요. 여러 곳에 공백이 생겨나서 그걸 메우느라요.”

“어차피 누군가의 자리가 비면 금방 새로운 주인이 나타나기 마련이지. 폐하께서 미리 준비해 놓으셨더군. 조금만 더 정리되면 한가해질 거야.”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정말 모든 것이 마무리가 되어 가고 있다는 실감이 났다.

어쩐지 힘이 빠져 레이넌의 품에 편안히 몸을 맡겼다. 조금씩 나른해지는 정신 속에서 문득 지금껏 잊고 있던 한 사람이 떠올랐다.

몸을 일으키자 레이넌은 무슨 일이라도 있느냐고 묻는 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아.”

그의 얼굴에는 아주 짧은 순간 비웃음이 스쳐 지나갔다.

“제 가문에서 쫓겨나서 어딘가를 떠돌고 있다던가…….”

“쫓겨나요?”

“그렇지 않으면 크라우스가도 망할 테니까 벨라를 크라우스가에 둘 수 없지.”

“그렇군요.”

그는 떠도는 소문을 들은 것처럼 말했지만 아마 벨라의 행방을 알고 있을 터였다.

아니. 어쩐지 벨라가 그렇게 된 데에 레이넌이 한몫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잠시 그가 뭔가를 했는지 물어보려다가 그만뒀다. 그가 뭘 했든 내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게다가 궁금한 건 그녀만이 아니기도 했다.

마빈이나 에린, 캐서린은 어떻게 됐는지도 궁금했고, 체이스는 어떻게 하기로 했는지도 궁금했다.

하지만 여러 궁금증은 일단 마음속에 묻어 두었다.

모처럼 한가롭게 둘만의 시간을 조금 더 즐기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레이넌에겐 타나베른에 대한 주제 하나만으로도 정신적으로 꽤 피곤할 것이 분명했다.

질문 대신 나는 다시금 그의 가슴에 고개를 기댔다.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그의 심장 소리를 내 호흡이 따라갔다.

“나도 그런 생각을 해.”

어느새 서늘해진 공기를 타고 퍼지는 가라앉은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눈을 감고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레이넌의 심장 소리와 목소리가 함께 겹쳐졌다. 묘하게 편안해지는 느낌이라 눈이 서서히 감겼다.

“아무래도 무서워서 안 되겠다고 그대가 도망가 버리는 건 아닐까.”

레이넌의 말에 나는 눈을 감은 채 웃었다. 하지만 그에게서 웃음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곧 그는 내 손을 허공으로 들었다. 감았던 눈을 뜨자 약지에서 반작이는 반지가 보였다.

레이넌은 반지를 만지작거리더니 곧 그의 얼굴 쪽으로 끌어와 입을 맞췄다.

“슈나이더가 무너졌으니 우리의 계약도 끝이군.”

“……그렇네요.”

여러모로 파란만장한 시간이었다. 그간 거쳐 온 많은 일이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것만 같았다.

레이넌은 상체를 들어 나를 내려다봤다. 한동안 그의 눈을 가득 채웠던 불안함은 한결 가신 채였다.

그런 레이넌을 바라보니 오히려 내가 안도를 얻었다.

한층 편안한 마음으로 그를 향해 웃으니 그에게서도 미소가 되돌아왔다.

언제나처럼 사랑이 가득 담긴 눈길과 함께.

“르네.”

“네.”

“나랑 결혼해 주겠나?”

진지한 레이넌의 물음에 나는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입만 벌리고 있었다.

레이넌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작게 웃음을 흘려 내고는 내 머리카락을 살며시 쓸었다.

“언젠가 그대에게 했던 말이 있지. 이제 그대 없는 삶을 상상할 수가 없다고. 정말이야.”

“아…….”

그는 사람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 프러포즈했던 밤의 말을 다시 한번 꺼냈다.

“아마 그때도 나는 진심이었던 것 같아. 아무리 생각해도 그만큼 내 마음을 잘 표현하는 말이 없더군.”

그는 여전히 대답 없는 나에게 무슨 말이라도 해 보라든가, 대답하라든가 어떤 재촉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뭔가 큰일을 앞두고 마음을 단단히 다잡는 것처럼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대를 사랑해. 그러니 나와 결혼해 줘.”

전에 프러포즈 받았을 때와는 전혀 다른 기분이 들었다.

물론 그날도 괜히 설렜지만 지금처럼 행복하지는 않았다.

이제 그의 말에 담긴, 그의 눈빛이 품은 감정을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나는 말로 대답하는 대신 손을 뻗어 그의 목에 둘렀다. 내가 잡아당기자 그는 어떤 반항도 없이 그대로 끌려왔다.

웃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그리고 내 웃음은 그의 입 안에서 서서히 퍼져 나갔다.

비슷한 웃음이 내 안으로 밀려들었다.

서로의 숨과 웃음을 나누는 것만으로 이렇게 마음이 풍요로울 수 있다니.

레이넌과 함께하며 이제까지 몰랐던 감정을 참 많이 깨달은 것 같았다.

나는 작게 숨을 몰아쉬며 레이넌에게서 떨어졌다. 하지만 그의 숨도, 내 숨도 서로의 입술에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그래서 대답은?”

결국 레이넌은 안달이 난 듯 초조하게 내 대답을 물어 왔다.

다급하게 나를 탐하고 싶다는 욕망이 그의 눈에서도, 목소리에서도 느껴졌다.

하지만 그보다 내 대답이 먼저라는 듯 애써 참는 그를 보니 말 대신 웃음이 흘러나왔다.

“애태우지 말고, 르네.”

“좋아요. 결혼해요.”

이제야 들었다는 듯 그는 씩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 역시 나와 다르지 않았다.

행복한 감정이 레이넌과 나를 가득 채우고 채워 끝내 흘러넘치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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