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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잘 키워보려고 했을 뿐인데 (128)화 (128/129)

“근데 타나베른도 같이 물을 마셨는데 왜 잠들지 않은 거야?”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어 보려는 내 노력을 눈치챘는지 아멜리아와 세실은 작게 소리를 내어 웃었다.

“마신 척만 했대요. 체이스가 물에 수면제를 탈 거라는 걸 알고 있어서.”

“알고 있었대?”

“네. 체이스의 계획을 세세하게 알고 있었다는데 정작 체이스는 타나베른이 슈나이더의 사람이라는 걸 몰랐다더라고요.”

“그런데…… 어떻게 타나베른이 슈나이더의 사람일 수 있지?”

내 말에 아멜리아도, 세실도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들의 얼굴에 어린 난감함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여전히 모두에게 충격적인 건 타나베른이 슈나이더의 사람이었다는 사실이었다.

나 역시도 그랬고.

그 생각만 하면 마음이 참 불편하고도 서글펐다. 레이넌이 얼마나 그를 믿었는지 잘 알았기에.

티를 내지는 않지만 그의 상심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일 터였다.

“후작으로만 머물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에요. 슈나이더는 그 틈을 잘 노렸고.”

아멜리아는 씁쓸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언제부터?”

“……그건 공작님께 들으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대로 끝나는 이야기가 아닌 듯했다. 내가 알지 못하는 후일담이 있었던 걸까.

그렇다면 레이넌에게 묻는 것이 맞았다.

“씁쓸하네.”

내 말에 아멜리아와 세실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르네 님, 자꾸 이렇게 찾아다니게 만드시면 저도 너무 힘듭니다.”

로만의 지친 목소리가 위에서 들려왔다.

“저도 할 일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나를 찾으러 다닐 틈이 없다는 말이었다. 나는 미안함을 담아 어색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른 가시죠. 이 정도면 충분히 쉬셨어요.”

“쉬는 것도 공작님 곁에서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공작님이 일을 못 하고 계세요.”

아멜리아와 로만은 간절함을 담아 내게 말했다.

사정을 듣고 나니 그들에게도 못 할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았어. 안 그럴게, 이제.”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말하고 로만은 서서히 속도를 올려 걸었다. 나는 그의 속도에 맞출 생각이 없었지만 아멜리아는 능숙하게 내 보폭을 넓혔다.

레이넌의 집무실 근처에 다다르자 집무실보다 레이넌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일을 못 하고 있다는 말이 거짓이 아님을 보여 주듯 그는 초조하게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었다.

“르네.”

금세 나를 발견한 레이넌은 성큼성큼 걸어와 나를 껴안았다.

“일단 들어가셔서 일부터 하시죠.”

다른 때라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로만은 나와 레이넌 사이에 손을 넣어 우리 둘을 떼어 냈다.

그리고 레이넌이 뭐라 말할 틈도 주지 않고 그의 등을 떠밀었다.

그런 와중에도 레이넌은 내 손을 꼭 잡고 있어 나 역시 떠밀리듯 집무실로 돌아왔다.

만약 레이넌의 눈에 내가 정말 죽은 것처럼 보였다면 지금처럼 잠시라도 떼어놓지 않으려는 그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됐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니라는 걸 확인했는데 이렇게까지 불안해하는 이유를 알 수 없기도 했다.

내일은 레이넌에게 티타임을 가지자고 제안을 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더 들을 이야기도 남은 듯했고, 무엇보다 그의 불안의 이유를 알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안심시켜 주고 싶기도 했고, 무엇보다 조금이라도 쉬게 해 주고 싶었다.

오늘이면 좋겠지만 나 때문에 시간을 꽤 낭비했다는 걸 알기에 오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길 선택했다.

***

“이제야 겨우 쉬네요.”

오늘도 레이넌은 내가 있는 걸 확확인할 때를 제외하곤 쉬지 않고 계속 바삐 일했다.

슈나이더가 잡혀 들어감으로 그에게 할당된 일이 레이넌에게 돌아갔다고 했다.

게다가 슈나이더와 레이넌 사이에서 벌어진 일에 대한 뒷수습도 만만치 않은 듯 보였다.

티타임을 가지자는 말에 로만은 인상을 썼지만 레이넌은 기뻐했다.

당장 준비하라는 말에 사용인들은 바삐 움직였고, 금세 디저트가 눈앞에 차려졌다.

앞에 놓인 차를 마시려는데 레이넌은 다급하게 내 손목을 붙들었다.

“공작님?”

뜬금없는 그의 행동에 의아한 눈을 하고 레이넌을 불렀다. 그는 잠시 내 찻잔을 노려보더니 비장하게 말했다.

“일단 내가 먼저 먹어 보지.”

“네?”

레이넌은 내 손에 들린 찻잔을 가져가서 조심스럽게 한 모금을 머금었다.

신중하게 맛을 느껴 보던 그는 곧 고개를 끄덕이며 내 손에 찻잔을 다시 쥐여 주었다.

“이제 슈나이더도 잡혔는데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연달아 두 번 뭔가를 마신 후 중독되고 잠들어서 레이넌은 내가 뭘 마시는 데 예민해져 있는 것 같았다.

내 말에 레이넌은 한숨을 쉬며 내 어깨에 기댔다.

허리에 감겨드는 레이넌의 손을 느끼며 나도 그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아니. 여전히 불안하고 걱정돼. 그러니까 당분간만이라도 내게서 떨어지지 마. 그래야 빨리 불안을 지울 수 있어.”

“네. 찰싹 붙어 있을게요. 근데 공작님.”

“응?”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슈나이더는 잡혔고, 저는 무사하잖아요.”

조금이라도 그가 안정을 찾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건넨 말이었다. 하지만 레이넌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대는 몰라. 칼슨이 잠든 거라고, 이 또한 치유의 과정이라고 말했지만……. 내 눈엔…….”

그는 잠시 말을 그대로 삼켰다. 그때의 감정이 다시 떠오른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레이넌은 말을 이어 가는 대신 상체를 아래로 내렸다. 내 목덜미에 얼굴을 대고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다시 눈 뜨지 않으면 어쩌나……. 살면서 그렇게 무서운 적은 없었어.”

나 역시 처음이었다. 레이넌이 약하고 가여워 보인 것은.

나는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조심스럽게 토닥였다.

괜찮다고. 이제는 정말 다 끝났다고.

그렇게 말해 주고 싶었던 내 마음이 전달된 걸까.

레이넌의 숨은 조금씩 차분하고 규칙적으로 바뀌었다.

이제 조금 진정이 된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한 그때, 레이넌이 내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예상치 못한 그의 접촉에 내 몸이 움찔 튀었다.

하지만 레이넌은 그조차 짐작했는지 허리를 감은 손에 힘을 주며 다시금 입술을 묻었다.

그의 입술이 조금씩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을 때, 누군가가 노크를 했다.

순간 멈칫한 레이넌은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었지만 대답은 하지 않았다.

다시 한번 노크 소리가 들려오고, 이번에도 대답을 하지 않자 문이 벌컥 열렸다.

“아버지, 어머니.”

에드윈이 해맑게 웃으며 우리를 향해 걸어왔다. 여기서 티타임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듯 먼저 자연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도 오랜만에 두 분과 티타임을 함께 가지고 싶어서 왔어요.”

“그래. 잘 왔어.”

내 말에 레이넌은 나를 끌어안았던 손에 조금씩 힘을 풀기 시작했다. 에드윈을 반기는 나와는 달리 그는 영 내키지 않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에드윈도 그런 레이넌의 감정을 알아챈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를 불렀다.

“아버지?”

“그래. 앉아.”

레이넌은 소파 반대편에 손짓을 하며 대답했다. 하지만 에드윈은 생긋 웃으며 나와 레이넌 사이에 비집고 앉았다.

“저는 여기가 좋아요.”

워낙 레이넌과 내가 찰싹 붙어 있었던 터라 사실 에드윈이 앉을 만큼의 공간은 없었다.

하지만 에드윈은 엉덩이를 들썩이며 기어코 공간을 만들어 내고는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만족한 듯 웃으며 앞에 놓인 쿠키를 들어 먹기 시작했다.

레이넌의 미간에 주름이 잡히고, 그가 뭔가를 말하려는 듯 입을 여는 모습을 본 나는 얼른 에드윈 뒤로 손을 돌렸다.

나는 손을 그대로 레이넌의 어깨에 올리고는 싱긋 웃었다. 그러지 말라는 내 뜻이 전해졌는지 그는 낮게 혀를 찼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는 작게 웃고는 내가 그랬던 것처럼 에드윈의 뒤로 손을 둘러 내 볼을 만지작거렸다.

나도 모르게 소리를 내어 웃을 뻔했다. 아주 잠시 레이넌과 나 둘만 있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안 드세요?”

에드윈이 나를 돌아봤고, 나는 얼른 손을 다시 가져와서는 어색하게 기지개를 켰다.

“어머니?”

“응? 아…… 몸이 찌뿌둥해서.”

“그럼 제가 안마해 드릴까요?”

“그 정도는 아니야. 나중에…… 해 줘.”

내 말이 순간 느려진 건 에드윈의 뒤로 보이는 레이넌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에드윈을 방해꾼처럼 여기는 그의 생각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괜히 두 사람 사이에서 난감한 기분이 든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에드윈이 먹던 것과 같은 쿠키를 집어 들었다.

“맛있네.”

에드윈은 나를 빤히 바라보다 내 말에 만족한 듯 다시 쿠키를 먹기 시작했다.

“요즘 수업을 자꾸 빠진다지?”

잠시 이어진 침묵 끝에 레이넌이 먼저 말을 꺼냈다.

“잠을 줄여서라도 그날 공부는 해내고 있어요.”

에드윈은 싱긋 웃으며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레이넌은 슬쩍 인상을 쓰고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지만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무리 그래도 잠을 줄이면 어떻게 해. 한창 자랄 나이인데.”

“그래도…… 어머니를 보려면 어쩔 수 없잖아요. 어쩔 수 없긴 하지만 책도 읽어 주러 못 오시고…….”

시무룩한 에드윈의 모습에 마음이 약해져서 책 정도는 읽어 줄 수 있다고 말하려고 했다.

레이넌이 선수 치지 않았으면 그랬을 터였다.

“그러면 낮에 수업을 한두 개 정도 더 늘려도 되겠군.”

에드윈의 수업에 대한 말이었지만 대답은 내게서 나왔다.

“여기서 더요?”

“그간 공부를 하지 않았으니 따라잡으려면 그만큼 열심히 해야지.”

“아니, 에드윈이 영특하고 나이보다 철이 들었고, 배려 깊고, 성숙…….”

에드윈을 칭찬하는 말이 길어지자 레이넌의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레이넌의 기분이 조금씩 언짢아지기 시작했다는 걸 알아챈 나는 말을 돌렸다.

“자꾸 잊으시는 것 같은데, 에드윈은 아직 여섯 살이에요.”

“보통은 몇 년 전에 시작했어야 하는 것들이지.”

“지금도 너무 많아요. 놀 시간도 없잖아요.”

“검술이 노는 시간이지. 그 외에 또 시간이 더 필요한가.”

“그럼요. 그리고 검술이 왜 노는 시간이에요. 그건 수업이잖아요.”

“그렇다고 예전처럼 나무 타서 사과나 따고 그렇게 두자는 말인가.”

“뭐, 나무는 조금 위험하긴 하지만…… 그래도 갑자기 이렇게 생활을 바꾸면 에드윈도 답답하지 않겠어요?”

사과를 따는 걸 그의 장기로 자랑했던 것이 떠올라 잠시 목소리가 작아졌지만 그래도 다시 허리를 펴며 말을 이어 갔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아직 에드윈은 어리다고요. 어른 취급하시면 안 되죠.”

“그래. 나이는 어리지. 하지만 글쎄…….”

레이넌이 에드윈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려는 찰나 에드윈이 다급하게 끼어들었다.

“어머니, 저는 괜찮아요. 공부도 재미있고, 아버지 말씀이 맞는걸요. 보통은 더 일찍 시작하니까 제가 더 열심히 해야죠.”

씩씩한 에드윈의 말에 안쓰러움이 밀려와 그를 꼭 껴안았다.

“지금도 공부하는 게 많잖아. 잠까지 줄이고 있는데 수업을 더 늘리면…….”

“괜찮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다부진 에드윈의 말에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여전히 귀여웠지만 어른에 가까워진 듯한 그의 모습이 기특하고도 안쓰러웠다.

그렇게 에드윈에게 잠시 집중한 사이, 나는 레이넌의 얼굴이 조금씩 구겨지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나 몰래 두 사람이 시선을 주고받았고, 두 사람 사이에 긴장감이 맴돌았다는 건 아주 나중에 레이넌에게 듣고서야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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