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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잘 키워보려고 했을 뿐인데 (127)화 (127/129)

상황을 대충 들은 나는 무엇보다 기가 막힌 때에 나타난 황제의 등장에 감탄했다.

“폐하께서는 감이 엄청나게 좋으시네요.”

순수한 내 감탄에 레이넌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가 슈나이더저로 간다는 이야기는 못 들으신 거지.”

“그럼요?”

“슈나이더가 내 저택을 공격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회라고 여긴 모양이야.”

“그게 왜 기회가 되죠?”

“나를 미끼로 던져 놓고 빈집을 털 심산이었어. 하여간에 머리는 참 비상하시다니까.”

레이넌은 제 입으로 이용당했다고 말하는 것치고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아아, 결국 나를 도운 셈이 되지 않았나. 그 표정이 꽤 볼 만했거든.”

“무척 친하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정말 절친하신 모양이네요.”

“글쎄. 친우라는 표현을 쓸 수 있는 사이는 아니라. 어쨌든 폐하도 나도 이제 자유로워진 건 사실이지.”

“그럼 이제 끝인 거네요.”

“그래.”

“정말 끝인 거죠?”

쉽게 믿어지지 않아 같은 질문을 하자 레이넌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목소리에 힘주어 대답했다.

“드디어.”

짧은 한마디에 내 눈에서 눈물이 뚝 하고 떨어졌다. 갑작스러운 내 눈물에 모두가 당황스러운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특히 레이넌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이유를 묻는 듯한 눈빛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저었다.

“르네, 내가 무슨 실수라도 했나? 왜 갑자기 우는 거지?”

“아니…… 너무 잘됐잖아요.”

내 대답에 레이넌을 포함한 사람들의 긴장이 단번에 사라졌다. 다들 힘이 쭉 빠진 얼굴로 웃었다.

레이넌은 정말 긴장을 많이 한 듯 깊은숨을 내쉬며 내 손을 잡았다.

“이제 공작님도, 에드윈도 안전에 대해 걱정하지 않고 살 수 있잖아요.”

“슈나이더가 없다고 안전하다는 보장은 없어.”

“알아요. 그래도 심리적 안전을 얻었잖아요.”

“심리적 안전?”

“지금까지처럼 가족이 아닌 듯이 살지 않아도 되니까요. 적어도 솔직히 에드윈을 대할 수 있게 됐네요.”

“솔직히?”

“네. 숨기지 말고.”

내 말에 레이넌의 얼굴에 떠 있던 여러 감정이 자취를 감췄다.

괜한 이야기를 했나. 나는 어쨌건 가족이 아닌데 개입할 문제가 아니었나.

“그러니까 그게…….”

“다들 내가 에드윈을 버렸다고 했지.”

“슈나이더 때문이었잖아요. 에드윈이 후계자로 보이지 않게끔 해야 했죠.”

“외롭게 키웠지.”

레이넌의 목소리에는 안쓰러움과 미안함이 담겨 있었다. 이 방의 그 누구보다 레이넌이 에드윈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할 터였다.

“이제 에드윈도 실컷 느끼겠죠.”

나는 잠시 말을 마치고 에드윈을 바라봤다. 그는 낯선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인상을 잔뜩 찌푸린 얼굴은 꼭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얼굴이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걸 알았다. 나는 그런 에드윈을 따뜻하게 바라봤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가 마땅히 받아야 했던 애정을 듬뿍 담아서.

“에드윈은 태어날 때부터 크나큰 사랑을 받고 있었다는 걸요.”

내 말에 에드윈은 결국 눈물을 터트렸다. 주먹을 꼭 쥐고 부들부들 떠는 그는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나도, 레이넌도 에드윈에게 시간을 줬다. 그 스스로 감정을 추스를 수 있도록.

“공작님도, 에드윈도, 나아가 에드윈의 아이도 이제 이런 일에서 자유로워졌어요.”

내 말에 에드윈은 끝내 엉엉 울며 내 품에 안겨 들었다. 나는 어느 때보다 강한 힘을 실어 에드윈을 꼭 끌어안았다.

똑똑한 아이이니 아마 저를 둘러싼 상황을 대강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 감정을 느끼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어른도 힘든 상황을 아이가 겪어 내야 했다.

얼마나 서럽고 외로웠을까.

그의 눈물이 다른 때와 다르게 다가온 건 그가 홀로 보내 왔을 지난 시간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할 수 없어서였다.

오롯이 그가 감당해야 했던 외로움과 두려움이 에드윈의 서러운 울음을 타고 내 속에 밀려드는 것 같았다.

그때 에드윈의 뒤에서 레이넌이 다가와 나를 끌어안았다.

“그대가 우리 곁으로 와서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에요.”

레이넌의 애틋한 목소리에 대답을 한 건 에드윈이었다. 여전히 눈물을 머금었지만 그 속엔 안도가 가득했다.

그렇게 셋이 한데 모여 한참 동안 체온을 나눴다.

이번에도 역시 우리를 흩어지게 한 건 잔뜩 짓눌린 에드윈의 목소리였다.

“저, 저 진짜 숨이…….”

“어머, 미안해.”

얼른 품에서 에드윈을 빼내자 숨을 얼마나 참았던지 사과보다 얼굴이 더 빨개져 있었다.

놀란 나는 얼른 손으로 부채질을 해 주며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미안해. 안고 있는 게 좋아서 그만……. 다음부턴 조금 더 일찍 말해.”

“저도 좋아서 힘든 줄도 몰랐어요.”

에드윈은 쑥스러운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그렇게 마무리되는 것 같았지만 누군가가 다시 이렇게 만나 다행이라는 말을 꺼냈다.

그리고 또 껴안고, 에드윈은 숨이 막히고, 나와 레이넌은 놀라서 떨어졌다.

어째서인지 우리 셋은 같은 행동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처음엔 흐뭇한 얼굴로 지켜보던 사람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 질린 얼굴을 했다.

저 바보 같은 가족은 뭔가.

그런 생각이 여실히 드러났지만 우리 셋 중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그 순간만큼은 애틋하고 뿌듯한, 그리고 따뜻한 감정에 뒤덮여 행복했으니까.

한참을 그러다 겨우 진정한 우리 세 사람은 한동안 시선을 마주했다. 곧 편안하고도 긴 숨이 우리 세 명의 입에서 동시에 새어 나왔다.

아마 다들 같은 생각을 했을 터였다.

아. 이제 정말 모든 게 끝났다.

믿기지는 않지만 후련하고 가벼웠다. 앞으로 행복하기만 하면 될 것 같았다.

그때는 그런 생각으로 마냥 즐겁기만 했었다.

***

그렇게 모든 일이 잘 해결되고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이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현실은 그런 바람과 전혀 달랐다.

오랜 시간 쌓여 온 원한만큼이나 정리해야 할 일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내가 바쁠 만한 일은 없었다. 딱히 정리할 만한 인연도, 업무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원래도 바빴던 레이넌은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바빠졌다.

한 사람이 하루 안에 저 많은 일을 해결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입이 절로 떡 벌어질 정도였다.

다행히 그는 매일 정해진 양의 업무를 모두 소화해 냈다. 잠과 휴식을 내어준 결과였다.

그렇다면 레이넌을 만나기는커녕 소식 듣기도 어려워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나는 예전보다 그와 더 긴 시간을 함께 보냈다.

제대로 잠잘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쁜 와중에도 레이넌이 좀처럼 내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내가 조금이라도 보이지 않으면 불안함에 자리를 박차고 나와 나를 찾아다녔다.

결국 할 일이 없는 나도 레이넌의 집무실에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야 했다.

가끔 아주 조용히 자리를 비워 보기도 했다.

하지만 혼자만의 시간은 아주 짧았다. 내가 레이넌의 시야에서 벗어날 때마다 로만이 금세 나타나 나를 레이넌의 곁으로 데려갔다.

“제가 모시고 올 테니까 공작님은 일을 하고 계시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애써 나를 찾으러 나선 보람이 없다는 로만의 잔소리에도 레이넌은 언제나 내가 다시 나타날 때까지 하던 일을 멈췄다.

이렇듯 이상한 행동을 하는 건 비단 레이넌만이 아니었다.

에드윈 역시 레이넌과 아주 비슷한 모습을 보였다.

아니, 에드윈도 할 수만 있었다면 레이넌처럼 나를 종일 데리고 다녔을지도 몰랐다.

에드윈은 그렇게 좋아하는 수업도 빼먹고 나를 찾아오고는 했다.

그러고는 누군가가 에드윈을 찾아오기 전까지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물론 그럴 때마다 레이넌은 일에서 손을 놓을 수 없는 제 신세를 한탄하며 우리를 부러워했다.

고로 나에게는 혼자 있을 시간이라고는 전혀 주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잘 때조차도.

가끔 시선이 느껴져 잠에서 깨면 나를 애틋하게 바라보는 레이넌과 눈이 마주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르네 님도 끈질기시네. 또 도망쳐 나오신 거예요?”

세실이 방 정리를 하다가 침대와 창가 사이에 기대앉아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말했다.

워낙 조심스럽게 움직인 터라 온몸의 힘이 다 빠진 상태였다. 뭐라 대꾸할 힘도 없어서 힘겹게 손만 휘휘 저었다.

세실은 잠시 그런 나를 내려다보다가 곧 내 옆에 쪼그려 앉았다.

“한동안 그래도 얌전히 있었잖아.”

“그러셨죠. 조금만 시간이 더 지나면 괜찮아지실 거예요.”

“아니, 둘 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르네 님이 주무시는 동안 두 분이 어떠셨는지 몰라서 하시는 말씀이죠.”

“수면제 먹고 잠든 3일간 말이야?”

“네. 에드윈 님은 르네 님이 죽은 거 아니냐고 대성통곡하시고 공작님은…….”

“공작님은?”

“저승길을 찾아서 데리고 오겠다고…….”

세실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때 봤던 레이넌의 모습이 다시금 떠오르는지 몸을 부르르 떨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얼마나 살벌하고 정신없었는지 짐작도 못 하실 거예요.”

“그 정도였다고?”

“검까지 빼 드셨다고요. 저승길을 찾으려면 자신도 죽음의 목전에 다다라야 한다고.”

그 이야기를 하는 세실의 얼굴은 지극히 지쳐 보였다.

그녀의 표정으로도 어지간한 난리가 아니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독을 먹었을 땐 이 정도 아니셨잖아. 그런데 이번엔 수면제였는데?”

“에드윈 님이랑 비슷한 양을 드셨잖아요. 근데 에드윈 님은 몇 시간 후에 깨셨거든요.”

“다행이네.”

“그런데 르네 님은 곤히 잠들어서 하루가 지나도 깨어나지 않으니 슬 걱정이 된 거죠. 그리고 그 모습이 얼핏 편히 돌아가신…….”

세실은 제가 무슨 말을 한 건가, 싶었는지 멈칫하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런데 다음 날이 되어도 안 깨어나시니까 걱정하실 만했죠. 결국은 못 견디고 이런저런 난리를 치셨고요.”

“상상이 안 되네.”

“저는 칼슨 님이 소리치는 걸 처음 봤어요.”

“……그거야말로 정말 상상이 안 되네.”

“그만들 좀 하시지요!”

울던 에드윈도, 검을 빼 들었던 레이넌도 그대로 굳었다고 했다.

“얼마 전 드신 독의 영향입니다. 스스로 치유하기 위해 잠든 것뿐이니 그냥 편히 주무시게 조용히 하시는 게 르네 님을 위한 일입니다.”

세실은 그때의 상황을 재연까지 하며 생생히 전달해 주었다.

단호하고도 힘이 실린 목소리를 내는 칼슨이 여전히 상상이 잘되지 않기는 했다.

어쨌든, 그 덕분에 레이넌과 에드윈은 얌전히 내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렸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더 힘드셨을 수도 있어요. 불안함을 표현하는 게 더 편하잖아요.”

“그런 상황에서도 너무 잘 잤네.”

어색하게 웃고 있을 때, 아멜리아가 우리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역시 여기 계셨구나. 공작님이 얼른 찾아오라고 난리세요.”

“로만이 아니라 아멜리아가 왔네.”

“같이 찾고 있었어요.”

“……그랬구나.”

세실의 말을 들으니 당장 그의 곁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았지만 그렇게 선뜻 몸이 움직이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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