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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잘 키워보려고 했을 뿐인데 (126)화 (126/129)

“지금은 슈나이더에게 집중하도록. 준비를 마치는 즉시 슈나이더가로 간다.”

레이넌의 말이 떨어진 후로 모두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다행히 모든 준비는 마친 뒤라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혼란스러워할 필요 없다! 하루 빨라진 것뿐이다! 다들 미리 이야기된 대로만 하되 본인들의 안전도 꼭 챙기도록 하라!”

“네!”

사기가 잔뜩 오른 로에리안의 기사들은 우렁차게 대답했다. 그리고 그들은 슈나이더가를 향해 망설임 없이 전진했다.

원래는 내일, 슈나이더가 로에리안저를 공격하면 황군과 함께 그를 제압하는 것이 계획이었다.

황군의 부재가 조금은 버거울 수도 있었지만, 어쨌거나 지금이 기회이기도 했다.

르네를 납치하려고 했던 것도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무서운 얼굴을 하고 거칠게 말을 몰아 슈나이더저로 향하는 기사들을 보고 사람들은 불안한 눈을 했다.

“결국은 이렇게 싸울 모양이야.”

“아무리 그래도 로에리안 쪽에서 갈 줄은 몰랐는데?”

“그건 그래. 슈나이더가 먼저 공격할 줄 알았는데 말이야.”

“에이, 그건 또 모를 일일세. 슈나이더가 먼저 공격했을지도.”

“이보게들, 지금 이렇게 수다를 떨 시간이 없네. 영 흉흉한 분위기니 괜히 우리도 휘말리기 전에 오늘은 일찍 정리하고 돌아가세.”

사람들은 두 가문이 드디어 맞붙으려는 기색이 보이자 잔뜩 긴장하며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로에리안저와 슈나이더저의 거리는 그리 가깝지 않았다.

하지만 레이넌과 기사들은 말을 재촉해 한달음에 슈나이더저에 도착했다.

뜻밖에도 슈나이더의 정문은 활짝 열린 채였다. 꼭 그들을 초대라도 하듯이.

문을 따라 나 있는 길 끝엔 슈나이더가 서 있었다. 레이넌은 속도를 낮춰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제 영역이라 과시하는 걸까. 문을 열어 놓은 걸로 보아 슈나이더는 레이넌이 기사들을 데리고 올 걸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알면서도 그는 홀로 이 많은 손님을 맞이했다.

“여기까지 다 찾아와 주시고. 영광입니다.”

목소리가 닿을 정도의 거리가 되자 슈나이더는 웃으며 레이넌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제 이런 연극은 집어치우지. 재미없으니까.”

“재미라. 재미.”

슈나이더는 잠시 레이넌의 말을 따라 하더니 웃음을 크게 터트렸다.

“무슨 배짱으로 내 저택에 제 발로 들어왔을까?”

“숨겨 놓은 애들이나 나오라고 하지?”

당당한 레이넌의 말에 슈나이더는 가소롭다는 듯 비웃으며 작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숨어 있던 슈나이더의 기사들이 순식간에 쏟아져 나왔다. 로에리안의 기사들은 그들에게 둘러싸인 모양새가 되었다.

“문이 열려 있다고 그리 덥석 들어오면 안 되지. 초대도 받지 않았는데.”

“어차피 예상했던 바라. 그보다 생각보다 말이 많군.”

레이넌이 빈정거렸지만 슈나이더는 기분 나쁜 내색 없이 오히려 더 많은 말을 하기 시작했다.

누구든 들으라는 듯이 목소리를 높여, 그리고 또박또박 천천히.

“저런, 저런. 로에리안 공작이 드디어 미친 모양이야. 벌건 대낮에 갑자기 들이닥쳐서 나를 죽이겠다고 난리를 치다니.”

난데없는 연극에 레이넌은 피식 웃음을 흘려 내고는 말에서 내려왔다. 슈나이더는 그런 레이넌을 똑바로 바라보면 말을 이었다.

“나도 내 몸을 지키는 데 급급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그를 죽이고 말았지 뭔가. 참 안타까운 일이야.”

“그게 르네를 납치하는 데 실패하면 대체할 계획인가 보군.”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데. 르네라면 자네 약혼녀가 아닌가. 납치라도 당했단 말인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처럼 가식적인 표정을 지어 보이는 슈나이더를 향해 레이넌은 싸늘하게 웃었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그렇게 없애고 싶던 내 손에 붙들려 황제 폐하께 끌려갈 줄은 상상도 못 했을 텐데.”

“하하하! 몰랐는데 허풍이 심한 편이군. 나를 폐하께 왜? 네가 가야겠지. 이렇게 무장하고 공격한 걸 그냥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은가?”

“두고 보면 알겠지.”

말을 마친 레이넌은 검을 빼 들고 슈나이더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는 레이넌과 직접 부딪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의 곁에 붙어 있던 기사들이 레이넌을 상대했다.

기사들 뒤에 서서 두 가문의 기사들이 맞붙는 것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던 슈나이더는 곧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레이넌이 무서운 기세로 기사들을 물리치고는 슈나이더를 향해 멈추지 않고 걸었기 때문이었다.

가까워지는 레이넌의 얼굴에 슈나이더도 검을 세웠다. 하지만 그에게서 싸울 의지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을 확인한 레이넌은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이제야 알겠군. 네가 왜 그렇게 뒤로만 수작질을 했는지.”

“수, 수작질이라니!”

“이런 겁쟁이 때문에.”

레이넌은 이를 악물고 뒷말을 꾹 삼켰다.

이런 겁쟁이 때문에 소중한 사람을 너무도 많이 잃었다. 그리고 잃을 뻔도 했다.

분노가 치밀어 오른 레이넌의 걸음엔 힘이 실렸다. 그만큼 슈나이더와의 거리도 쑥쑥 줄었다.

이제 슈나이더를 지킬 기사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들 역시 로에리안의 기사들을 상대로 제 목숨을 지키는 것만 해도 버거웠으니까.

“왜, 왜 아무도 없어! 얼른 와서 나를 지켜라! 제임스! 헨리!”

다급하게 눈에 보이는 이들을 불렀지만, 그들은 고개를 돌릴 틈도 없었다.

그사이 레이넌은 슈나이더의 바로 앞에 다가왔다.

레이넌이 슈나이더를 향해 검을 휘두르자 그는 일단 막아 냈다. 하지만 덜덜 떨리는 손을 보니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 뻔했다.

레이넌은 슈나이더를 밀어붙이지 않았다. 그대로 힘을 풀고 검을 거둬들였다.

슈나이더는 떨리는 다리로 조심스럽게 물러났다. 레이넌에게서 눈을 조금도 떼지 못한 채로.

레이넌은 작게 미소를 보이고는 다시 검을 들었다. 슈나이더는 얼른 레이넌의 검을 막으려 그와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렇지만 슈나이더가 그렇게 움직이리라 예상했던 레이넌은 재빨리 방향을 틀어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윽!”

이런 와중에도 검을 놓지 않는 건 칭찬할 만했지만 심한 상처도 아닌 걸 생각하면 엄살이 심했다.

“스친 정도로 엄살은. 뒷공작을 꾸미느라 정작 검술 익힐 시간은 없었나?”

울컥한 얼굴로 슈나이더가 뭐라 말하려는데 레이넌은 다시 검을 들었다. 그 후로도 같은 상황이 반복됐다.

레이넌의 비난과 조롱을 들으면서도 슈나이더는 단 한 마디도 되받아칠 수 없었다.

물론 그의 몸에 상처가 늘어 가는 것도 막지 못했다.

결국 레이넌의 검이 슈나이더의 허벅지를 스치자 그는 검을 떨어트리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버텼는지 땅에 몸을 웅크리고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려 냈다.

“확실히 엄살이 심하군.”

레이넌의 비웃음에 슈나이더는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럴 정신도 없는 것 같았다.

“그럼 진짜 고통이 뭔지 알려 줘야지.”

레이넌의 목소리에 슈나이더는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가 진심으로 자신을 죽일 수 있음을 깨달은 슈나이더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뒤로 기었다.

슈나이더를 봐줄 생각은 전혀 없었던 레이넌이 검을 하늘 높이 들었을 때였다.

“황제 폐하시다!”

오늘은 움직이지 않을 줄 알았던 황제가 여기까지 온 모양이었다. 황제를 알아본 누군가의 목소리에 주변은 술렁였다.

하지만 레이넌의 시선은 슈나이더에게 꽂혀 있었다.

황제가 왔다곤 하나 검을 휘두르는 것보다 빨리 제 앞에 나타나지는 못할 터였다.

‘일단 죽이고 간발의 차였다고 할까.’

아주 짧은 순간의 고민이었지만, 슈나이더에게는 아주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그건 안 될 일이지.”

인파를 헤치고 나타난 황제가 레이넌에게 말했다. 자신의 예상보다 빨리 나타난 황제의 모습에 레이넌은 작게 혀를 찼다.

반대로 슈나이더의 얼굴은 생명 줄이라도 잡은 것처럼 밝아졌다.

레이넌은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황제에게 인사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일어나라.”

“소, 송구합니다. 몸이 이래서…….”

슈나이더는 보란 듯이 제 상처를 이리저리 전시하였다.

황제는 찬찬히 슈나이더의 몸을 살피고는 레이넌에게 시선을 돌렸다.

황제는 레이넌에게 그새를 못 참고 이렇게 일을 벌였냐고 질책하는 눈빛을 보냈다.

레이넌은 그의 뜻을 이해했지만 전혀 알아듣지 못한 척 어깨를 으쓱했다.

다시 황제의 시선이 제게로 돌아오자 슈나이더는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조금 전 레이넌과 황제가 시선을 교환한 것에 담긴 의미를 착각한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무것도 모르는 피해자인 척 상황을 과장하는 일은 하지 않았을 터였다.

“로에리안 공작이 기사를 끌고 갑자기 제 저택에 쳐들어왔습니다! 제 기사들이 몇이나 저들의 손에 목숨을 잃었는지…….”

“벤자민 슈나이더.”

황제는 더 듣고 싶지 않다는 듯 그의 말을 끊었다. 슈나이더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담긴 근엄함에 몹시 당황했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렸는지 두 손을 바닥에 두고 엎드렸다.

“네, 폐하.”

“너를 반역죄로 체포한다.”

황제의 말이 끝나자 고요한 침묵이 주변을 채웠다. 다들 제 귀를 의심하는 눈치였다.

“제가 왜……? 로에리안을 체포한다는 말씀을 제가 잘못 들어나 봅니다.”

슈나이더는 넋이 나간 얼굴로 허허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황제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보며 다시 한번 또박또박 상황을 일러 주었다.

“아니. 제대로 들은 게 맞네. 나는 슈나이더 자네가 반역을 저지르려 했다고 말하는 중이야.”

“아닙니다. 제가 반역이라니! 그럴 리가 없습니다!”

슈나이더는 진지한 얼굴로 제 억울함을 토로했다.

그런 그를 보던 황제는 천연덕스럽게 제 품에서 슈나이더의 치부책을 꺼내 들었다.

“그래? 여기엔 분명 벤자민 슈나이더 네 이름이 있는데. 자네가 잘못 알고 있었던 모양이야.”

황제는 심지어 서류를 돌려 슈나이더의 이름이 적힌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기까지 했다.

“아, 아니 그걸 왜 폐하께서 가지고 계신 건지…….”

얼떨떨한 슈나이더의 혼잣말을 들은 레이넌은 작은 목소리로 빈정댔다.

“차라리 모르는 거라고 억지를 부리는 편이 나았을 텐데. 멍청하기도 하지.”

슈나이더는 그제야 정신이 든 듯 레이넌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로에리안이 저를 모함한 것입니다!”

잘못을 저지른 자들의 입에서 흔히 나오는 말을 그대로 하는 슈나이더를 황제도, 레이넌도 지겹다는 듯이 내려다봤다.

“서쪽 감옥의 가장 깊숙한 곳에 가둬라.”

더 들어 줄 필요가 없다는 듯 황제의 냉정한 명이 떨어지자 슈나이더의 얼굴엔 절망이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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