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봐 온 만큼 레이넌의 성격을 잘 아는 타나베른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몸을 떨었다.
“그래도 안심하진 말게. 마지막 장엔 이니셜들이 나열되어 있었으니까.”
“이, 이니셜?”
“그게 뭘 의미하는지 몰랐는데 이제 알겠군. 물질적인 것이 아닌 그 외의 지원을 한 사람들의 이니셜이었던 모양이야.”
“어쩔 수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었다?”
타나베른의 변명에 레이넌은 실소했다.
그를 설득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지만 타나베른은 그래도 멈출 수 없었다.
“슈나이더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지 않습니까? 일이 이렇게 되어 버린 건 안타깝지만 전 진심으로 공작님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재미있군. 이렇게 궤변을 늘어놓는 모습도 다 보고.”
“진심이었습니다, 정말로. 형님과…….”
“감히 형님을 그 입에 올려?”
순식간에 얼굴을 차갑게 굳힌 레이넌이 힘주어 말했다.
레이넌이 이런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직접 마주할 기회가 없었던 타나베른은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레이넌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풀리길 바라야 했다.
지금의 그라면 어떤 일을 계획할지도 몰랐고, 그것이 무엇이든 끝내 이뤄 낼 것이 뻔했다.
“일단 일이 일단락될 때까지만이라도 여기서 머무르도록 하게. 부족한 것은 없을 것이네.”
레이넌의 말에 사람들이 다가와 타나베른의 양팔을 잡았다.
“아, 아니! 정말 아니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정말 저는 억울합니다!”
“억울이라. 재미있는 단어를 쓰시는군. 뭣들 하고 있어? 얼른 모셔 가지 않고.”
끝까지 반항하던 타나베른은 꽤 추하게 그 자리를 벗어났다.
레이넌은 타나베른의 모습이 사라지자마자 르네의 방으로 다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에드윈에게 오스틴이 붙어 있으니 당연히 르네의 곁엔 칼슨이 있었다.
“르네는?”
“잠든 것뿐입니다.”
“부작용은?”
“없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냥 푹 자고 나면 깨어나실 겁니다.”
칼슨의 확답을 듣고서야 레이넌은 힘이 풀린 듯 의자에 스르르 주저앉았다.
“괜찮으십니까?”
로만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레이넌을 살폈다.
그가 느꼈을 분노가 어떨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레이넌은 제법 그러한 감정을 잘 눌렀다.
무엇보다 이번에는 타격이 더 컸다. 레이넌은 타나베른을 아버지처럼, 형님처럼 생각했으니까.
“글쎄.”
방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새근새근 잠든 르네의 숨소리만 방을 가득 채웠다.
규칙적인 호흡에 조금씩 마음이 가라앉았다.
여전히 화가 나고, 분한 기분이 마음에 들어앉아 있었지만, 그래도 차분히 생각할 정도의 여유는 생겼다.
“저택을 지킬 최소한의 인원만 두고 모두 모이라고 해.”
“공작님, 폐하께서 내일까지 얌전히 기다리라고 당부를 거듭하셨는데요.”
지금 당장 슈나이더가에 쳐들어가겠다는 의지를 읽은 아멜리아는 화들짝 놀라 그를 말렸다.
황제까지 거론됐지만 레이넌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기다리라고? 이런 상황에 슈나이더가 내일까지 잠자코 기다려 줄 것 같나?”
레이넌이 지금 움직이려는 건 꼭 감정에 휘둘려서만은 아니었다.
르네를 납치하는 것에 실패했고, 타나베른은 여기서 나가지 못하고 있으니 곧 상황을 짐작할 터였다.
슈나이더가 상황을 알게 되면 그에게도 방법은 하나였다. 직접 맞붙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슈나이더라면 아주 빠르게 공격을 끝내려 할 터였다. 레이넌이 잠시 머뭇거리는 그 순간이 슈나이더에겐 기습적으로 역공할 기회였으니까.
로에리안이 그러했듯 슈나이더도 오래도록 기사들의 훈련에 큰 공을 들였을 것이 뻔했다.
그런 슈나이더가와 맞붙는다면 양쪽 가문 모두 큰 희생을 치를 것이 분명했다.
슈나이더가 상황을 알아차리지 못해 방심한 지금이 슈나이더가를 칠 적기였다.
그걸 알아들은 아멜리아와 로만은 더 이상 레이넌을 말리지 않았다. 하지만 걱정은 되는지 심란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봤다.
레이넌은 내내 응접실을 지키고 있던 체이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체이스는 자신도 함께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하는 듯한 눈빛으로 레이넌을 올려다봤다.
“이제 더는 르네나 에드윈에게 손을 댈 일은 없겠지.”
“물론입니다.”
“그럼 너는 방에서 기다리고 있어. 문 앞에 기사들이 있을 거야. 네가 마음만 먹으면 쉽게 나가겠지.”
“염치없는 것 잘 알지만 저도 데려가 주십시오.”
“아니. 배신을 한 번 한 네가 또 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지. 게다가 이런 자백 또한 슈나이더의 계획일지도 모르고.”
“아닙니다. 제발…….”
“도망가더라도 나는 너를 찾지 않을 것이다. 그간의 충성과 어떻게든 에드윈을 해치지 않으려던 네 노력에 대한 대가야.”
“공작님.”
“대신 도망간다면 절대 다시 내 눈앞에 띄지 말도록 해. 그땐 이런 아량은 기대할 수 없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체이스는 기운 없이 터덜터덜 응접실 밖으로 나섰다.
“체이스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아무래도 체이스와 함께 보낸 시간이 길었던 아멜리아는 조금 더 마음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조금 전 들은 대로야. 도망간다면 잡지 않을 거고, 만약 남아 있다면…….”
아멜리아도, 로만도 체이스가 남아 있을 경우에 레이넌이 어떻게 행동할지 궁금했다.
두 사람 모두 체이스가 떠나지 않으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로만과 아멜리아가 잔뜩 집중해서 레이넌의 입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을 눈치챈 레이넌은 슬쩍 웃어 보이고는 말했다.
“그때 가서 다시 이야기하지.”
레이넌의 대답에 김이 빠진 듯, 아멜리아와 로만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지금은 슈나이더에게 집중하도록. 준비를 마치는 즉시 슈나이더가로 간다.”
“알겠습니다.”
두 사람은 비장한 눈빛으로 레이넌의 명에 답했다.
***
잠에서 깨어나며 느껴진 건 바삭바삭한 이불의 감촉과 그 속에 파묻혀 느끼는 나른함이었다.
오늘따라 몸이 가벼웠다. 그래서일까. 다른 날보다 기분이 좋았다.
잠은 푹 잤지만 조금 더 이런 기분을 즐기고 싶었던 나는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한참을 그렇게 침대에서 뒹굴뒹굴하다 기지개를 켜면서 일어났다.
눈을 뜨기도 전에 뭔가가 내 품 안에 저돌적으로 들어왔다.
“에드윈?”
얼굴을 보지 않아도 주황빛 머리칼이 내 품에 안긴 사람이 누구인지 알려 주었다.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있으니 다시금 노곤함이 퍼져서 절로 눈이 감겼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놀라서 눈을 번쩍 떴다.
그가 얼굴을 묻은 곳에 서서히 물기가 퍼져 나가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 있어? 왜 울어?”
내 질문에도 에드윈은 얼굴을 묻은 채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에드윈, 얼굴 좀 보여 줘. 응?”
에드윈이 운다는 것을 알아차리자 그는 어쩐지 서러움이 복받쳐 오른 듯했다.
아예 소리를 내어 서럽게 우는 에드윈이 걱정되어서 달래 보려고 했지만 그는 좀처럼 고개를 들지 않았다.
당황한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에드윈이 우는 이유라도 찾을까 싶어 한 행동이었지만, 오히려 나는 더 당혹스러웠다.
주변에 사람이 많이 모여 있는 데다, 그들 모두 하나같이 미묘한 표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난데없는 분위기에 눈만 이리저리 굴리던 나는 화들짝 놀라 큰 소리를 냈다.
“공작님!”
레이넌은 여기저기 다친 흔적이 역력했다. 특히 얼굴에 남은 깊은 상처에 자꾸 눈이 갔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 내 볼이 쓰라려 올 정도였다.
“어쩌다 이렇게 다치셨어요. 게다가 잘생긴 얼굴에 누가 이런 짓을…….”
레이넌은 걱정과 놀람을 표현하는 나를 멍하니 바라보다 곧 허탈한 웃음을 뱉어 냈다.
“공작님?”
그는 내 부름과 의문에 대한 답을 주는 대신 나를 그대로 끌어안았다.
그의 손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갔고, 그게 너무도 간절하게 느껴졌다. 뭐라 말을 해도 그는 대답하지 않으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지금은 일단 그를 달래는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어 비어 있는 나머지 손으로 그의 등을 토닥였다.
그럴수록 레이넌은 더 힘주어 나를 끌어안았다. 답답했지만 지금 그를 밀어내서는 안 될 것만 같았다.
그래서 아무 말 없이 그의 등만 쓰다듬고 있을 때였다.
가운데 끼어 있던 에드윈이 조심스럽게, 동시에 힘겹게 입을 열었다.
“수, 숨을 못 쉬겠어요.”
에드윈의 말에 레이넌은 놀라 내게서 떨어졌다. 붉어진 에드윈의 얼굴을 보고 레이넌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나 역시 에드윈 덕에 조금은 편안해졌기에 다시 주변을 둘러봤다.
그사이 안정을 찾은 사람들 사이에서 유독 불안해 보이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아, 또 당했어.”
체이스의 얼굴을 보자마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한 번에 떠올랐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한다고 했던 게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내 말을 들은 체이스는 움찔했고, 레이넌과 에드윈은 매서운 눈으로 그를 노려봤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소란스러웠던 거랑 잠든 건 기억이 나는데요.”
“슈나이더가 그대를 납치하려고 로에리안저를 공격해 시선을 끌었어.”
“저를 납치하려고 했다고요?”
나도 모르게 원망의 눈길을 담아 체이스를 날카롭게 쏘아봤다. 슬쩍 고개를 들었던 그는 얼른 다시 바닥에 엎드렸다.
“그대가 이번엔 얼마나 잠들어 있었는지 아나?”
“하루 꼬박?”
“아니. 3일이야.”
“네?”
“3일이라고.”
“3일을 그냥 내리 잠만 잤다고요?”
“그래.”
“어쩐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는데 레이넌은 그걸 또 귀신같이 들었다.
“어쩐지?”
나는 잠시 그의 눈치를 살피고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엄청 푹 잔 것처럼 개운하더라고요. 엄청 푹 자서 그랬나 보네요.”
내 말에 레이넌은 옅은 미소를 보였다.
다른 때였다면 조금은 황당한 얼굴을 했을 테지만 지금은 오히려 이런 내 말이 그에게 안도를 준 모양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된 일인데요?”
레이넌은 그날 있었던 일을 차분히 설명해 줬다. 그리고 이야기를 듣는 나는 내내 놀라기만 했다.
더 놀라울 일이 있을까 싶었는데 몇 번을 더 놀랐는지 모른다.
“그래서 체이스가 저를 납치한 건가요?”
“납치 시도를 했지.”
“와. 그렇게까지 했다고요?”
“일단은 그럴 수 있었지만 그대를 숨겨 두기만 했어. 덕분에 그대를 구할 수 있었고.”
“그러니까 체이스가 저를 빼돌렸고, 어쨌든 저를 구한 데는 체이스가 한몫했다는 거네요.”
“그렇지.”
“참 모순적이어라.”
사실 레이넌을 비롯해 주변 사람들 모두 체이스가 슈나이더의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 아무래도 슈나이더의 사람이 에드윈의 매우 가까운 곳에 있는 모양이야.”
레이넌의 그 말이 나에겐 큰 실마리가 되었다. 매우 가까운 곳이라는 말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에드윈을 공격하는 슈나이더의 사람이 누군지 추측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심지어 에드윈도 체이스를 의심하고 있을 정도였다. 사실 에드윈이 의심한다는 사실은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하지만 어느 날인가부터 에드윈은체이스와 내 거리가 조금이라도 가까워지면 그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게 되풀이되다 보니 에드윈 역시 체이스를 의심한다는 사실을 모를 수 없었다.
작은 에드윈도 나를 지키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니 체이스가 정말 원망스러웠다. 에드윈이 그를 얼마나 따랐는데.
지난날들이 머릿속을 스쳐 가자 문득 억울해졌다. 그러다 보니 나도 모르게 체이스를 보며 빈정댔다.
그런 나를 말리는 사람은 없었고, 오히려 레이넌은 잘했다는 듯 내 어깨를 토닥였다.
“그래서 그다음엔 어떻게 됐어요?”
레이넌은 다시 설명을 이어 갔다. 듣는 내내 나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바로 슈나이더가로 가셨다고요?”
“그래.”
“잘생긴 얼굴에 상처를 낸 놈도 물론 슈나이더가의 사람이겠군요.”
“얼굴에 유독 집착하는 것 같은데, 착각인가?”
“착각이세요. 저는 공작님의 건강이 걱정될 뿐인걸요.”
나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듯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레이넌은 전혀 믿지 않는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살폈다.
입가에 걸린 미소가 조금씩 어색해질 무렵 레이넌은 겨우 내게서 시선을 거뒀다.
“그래서 그냥 슈나이더가에 쳐들어갔고, 이겼다. 이렇게 설명을 끝낼 건 아니죠?”
“설마. 그대도 모두 알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