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슈나이더의 사람이 된 너를 위해 친히 그 소식을 알렸어야 했나?”
“적어도 말씀이라도 해 주셨어야…….”
“네가 슈나이더의 계획에 대해 내게 언질이라도 준 적이 있나.”
레이넌의 말에 체이스는 뭔가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벙긋거리다 그대로 다물었다.
“그런 너를 위해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싸늘하기 그지없는 레이넌의 말에 체이스는 입을 다물었다.
동생의 죽음에 잠시 감정을 다스리지 못했다.
레이넌이 말한 대로 체이스에게는 그에게 따질 권리도, 그를 원망할 자격도 없었다.
자신은 아주 크나큰 죄인일 뿐이었다. 로에리안가에서 슈나이더라는 이름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지 않았다.
그런데 에드윈을 다치게 했고, 르네에게 독을 먹였다. 그뿐인가. 그녀를 납치까지 한 상황이었다.
지금처럼 말로만 곱게 대해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했다.
머리로는 알았다. 하지만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동생이 죽었다는 것도, 자신이 죽은 동생을 위해 에드윈과 르네에게 위해를 가했다는 것도.
“거짓말! 지금 저를 설득하기 위해 거짓말하시는 걸 압니다!”
냉정한 평소의 모습을 잃은 체이스는 소리를 지르며 레이넌에게 달려들었다.
그렇지만 체이스는 레이넌의 가까이에 가지도 못했다. 레이넌 앞을 막아선 아멜리아의 발차기에 그대로 바닥에 엎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체이스의 멱살을 잡고 일으켰다. 그가 일어나자마자 아멜리아는 주먹으로 체이스의 얼굴을 후려쳤다.
“내가 너를 그렇게 가르쳤어?”
어쩌면 이 자리에 있는 사람 중 체이스의 배신에 가장 아픈 건 아멜리아일지도 몰랐다.
아멜리아는 화를 참지 못하고 체이스에게 다시 주먹을 날렸지만 이번엔 레이넌에게 가로막혔다.
“일단 르네부터.”
아멜리아의 손에서 벗어난 체이스는 넋을 놓은 채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녀의 공격에 방어조차 하지 않은 걸 보니 꽤 충격을 받은 듯했다.
레이넌은 말없이 체이스의 뺨을 여러 차례 내려쳤다. 그의 얼굴은 이미 엉망이었지만 레이넌의 손에는 조금의 자비도 없었다.
“정신 차려, 체이스. 르네는?”
체이스는 초점 잃은 눈으로 멍하니 대답했다.
“본관 옆 창고 건물에 계십니다.”
르네의 행방에 대한 답을 들은 레이넌은 곧장 아멜리아에게 눈짓했다.
“얼른 모시고 오겠습니다.”
레이넌의 뜻을 알아들은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방을 떠났다.
그리고 다시 응접실은 침묵이 가득 채웠다. 정적을 깬 건 나직한 레이넌의 목소리였다.
“차라리 말을 하지 그랬나.”
“어디까지 그의 손이 닿아 있는지 확신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 네 사정은 알겠다.”
“죄송합니다.”
이제야 이성을 찾은 듯 체이스는 바닥에 엎드려 흐느끼면서 사죄했다.
그간 마음고생을 얼마나 했는지 보여 주는 모습에 로만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상황이 그렇게 된 것이 안쓰럽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그가 한 일이 없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네가 한 선택이고, 네가 한 행동이라는 것은 변함없지.”
체이스의 상황에 공감한 것과는 달리 레이넌은 차갑게 말했다.
그의 상황을 모두 알고서도 용서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역력히 묻어났다.
체이스도 큰 기대는 없었는지 놀라는 모습은 아니었다. 그저 그대로 한참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그가 다시 고개를 들고 벌떡 일어난 건 르네를 데리러 간 아멜리아가 돌아온 뒤였다.
“르네 님이 없습니다.”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네주변까지 샅샅이 뒤졌는데 르네 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계셨던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다시 옮겨진 것 같습니다.”
“그, 그럴 리가!”
누구보다 놀란 이는 체이스였다. 엎드려 있던 체이스가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들었다.
“그, 그럴 리가 없습니다. 분명 그곳에 잘 모셔 뒀는데…….”
“그러니까 하려면 확실히 했어야지. 결국 나에게도, 슈나이더에게도 들킨 모양이군.”
“그, 그런…….”
“어디에 숨겨 둘 건지 미리 이야기했나?”
“……네.”
“얼른 찾지 않으면 슈나이더의 손에 넘어가겠군.”
레이넌의 고저 없는 목소리에 가장 창백해진 건 바로 체이스였다. 로만과 아멜리아도 화들짝 놀라 그를 바라봤다.
“누굴까. 누가 르네를 데려갔을까.”
레이넌은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누구보다 초조하고 걱정될 사람은 다름 아닌 레이넌이었다.
하지만 이럴 때 감정을 내세우는 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그는 너무도 잘 알았다.
“일단 저택 문부터 걸어 잠가야겠군.”
“네?”
“얼른 저택부터 봉쇄하도록 해. 내 허락이 떨어지기 전까진 누구도 이 저택을 나가서는 안 될 것이야.”
“알겠습니다.”
무엇 때문인지 정확하게 알지는 못했지만 확신에 찬 레이넌의 목소리가 신뢰를 줬다.
“로만은 나랑 후작을 만나러 가지. 손님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어.”
그러고 보니 다들 후작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로만은 돌아가겠다던 후작과 기다리라던 레이넌의 대치를 떠올렸다.
지금 이런 때에 손님맞이를 할 정신이 있는 건 아닐 터이니 타나베른과 오늘의 일이 관련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번에도 더 다급해 보이는 건 로만이었다.
급하게 걷다가 레이넌과 거리가 떨어졌다는 걸 깨닫고 다시 걸음을 늦추길 되풀이했다.
그래 봤자 후작이 있는 곳이 바로 옆에 위치한 곳이라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 기다리고 있어야 할 타나베른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타나베른 후작은?”
“아무래도 이렇게 정신없는 날 후작님까지 공작님을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다고 하시고는 돌아가셨습니다.”
“언제?”
“오래 기다리진 않으셨습니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기사의 말을 들은 레이넌은 거칠게 문을 걷어찼다.
겨우 참고 참았던 감정이 드디어 폭발한 것이었다.
“아직 저택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쫓아간다.”
“알겠습니다.”
레이넌의 안에서 분노와 불안이 걷잡을 수 없이 폭발했다.
이제까지 놓지 않고 있던 냉정함을 그대로 던져 버린 그는 얼른 건물 밖으로 뛰쳐나가 말 위에 올랐다.
레이넌이 그나마 빠르게 저택을 봉쇄하라는 명령을 내려서일까. 타나베른은 로에리안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일단 기다리라는 아멜리아와 왜 못 나가게 하냐는 타나베른의 실랑이를 보던 레이넌은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다행입니다. 아직 돌아가지 않으셨군요.”
거세게 말을 재촉하던 때와 달리 레이넌은 평정을 찾은 듯 보였다.
“이렇게까지 신경 쓰실까 봐 조용히 돌아가려고 했는데…….”
타나베른은 못내 미안한 표정을 하고서 말했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섭섭합니다. 일단 잠시라도 저랑 시간을 보내시고 돌아가시지요. 그래야 제 마음이 편할 것 같습니다.”
상냥하면서도 강건한 레이넌의 청에 타나베른은 슬쩍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 일정이 있어서 말입니다. 아쉽지만 다음에 다시 뵙는 걸로 하죠. 그때는 제대로 약속을 잡고 오겠습니다.”
“그러시다면 할 수 없죠.”
이제까지 완강하게 타나베른이 떠나는 걸 막던 레이넌이 한순간에 태도를 바꿨다.
타나베른은 얼떨떨한 얼굴을 하면서도 내심 안도하는 모습을 숨기지 못했다.
“대신 마차를 좀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제…… 마차를 말입니까?”
“네. 괜찮으시지요?”
레이넌은 웃으면서 그의 마차를 뒤져 보겠노라 말했다.
너무도 당당해서 그의 당연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타나베른 역시 그랬다. 아주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뒤늦게 이상함을 알아차리고는 얼굴을 굳혔다.
“이런 무례를 쉽게 저지르는 사람이 아니지 않았습니까.”
“무례인가요?”
“그것도 상당한 무례이지요. 제가 뭔가 훔쳐 가기라도 했다는 말씀과 무엇이 다릅니까. 정말 섭섭합니다.”
“훔쳐 가기라도 했다.”
타나베른이 언짢은 목소리로 제 입장을 말하자 레이넌은 차가운 웃음으로 응수했다.
“저야말로 섭섭합니다. 제가 언제 이런 부탁을 드린 적이 있었습니까. 꼭 뭔가를 숨겨 놓은 것처럼 화를 내시리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요.”
“숨겨 놨다니요. 정말 이렇게까지 하셔야겠습니까.”
“네. 잠깐이면 되니 보여 주시지요.”
타나베른은 아무런 대답도 않고 레이넌을 빤히 바라봤다.
그의 눈에는 노여움이 맹렬하게 나타났지만, 그 아래 있는 불안함을 레이넌은 볼 수 있었다.
허락은 떨어지지 않았지만 레이넌은 주변을 지키던 기사들에게 고갯짓을 했다.
동시에 그들은 마차 주변에 있던 타나베른의 사람들을 밀쳐 내고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허락도 없이 이럴 건가.”
타나베른은 뒤를 흘깃거리며 화를 냈다. 레이넌과 만난 뒤 처음으로 그는 존대를 하지 않았다.
레이넌 역시 기다렸다는 듯이 같은 수준으로 대응했다.
“아무래도 누군가가 내 것을 앗아 간 것 같은데. 후작의 반응이 좀 과하군.”
타나베른은 레이넌의 하대에 당황스러움을 숨기지 못했다.
이제까지 레이넌이 그에게 존대를 한 것은 타나베른에 대한 배려이자 공경의 의미였다.
레이넌이 제게 주었던 호의를 한순간에 거둬갔다는 것을 깨달은 타나베른은 다시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
“그래서 내가 공작님의 것을 앗아 갔다는 말입니까? 이제껏 제가 공작님을 어떻게 대했는지 잘 아시면서…….”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글쎄. 이제까지 내가 과연 후작을 제대로 본 것이 맞나 의심스럽군.”
레이넌의 담담한 말에 타나베른은 입만 벙긋거렸다.
레이넌의 말대로 마차를 뒤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안 계십니다.”
아멜리아는 곤혹스러운 얼굴로 레이넌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그럴 리가.”
여유로운 미소를 잃지 않던 레이넌은 금세 굳은 얼굴로 직접 마차 안에 들어섰다.
타나베른은 그런 그를 대놓고 비웃었다.
“지난 시간을 이렇게 스스로 짓밟으시는군요.”
레이넌은 마차에 르네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다급하게 이곳저곳을 뒤졌다.
그래 봤자 마차였다. 언뜻 봐도 보여야 하는 것이 샅샅이 살핀다고 해서 나타날 리가 없었다.
“이제 됐겠지요?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타나베른은 마차 문을 잡고 위풍당당하게 말했다. 레이넌은 그런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눈으로 다시 한번 천천히 마차 안을 훑었다. 레이넌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따라 타나베른의 눈동자도 함께 굴러갔다.
아주 짧은 순간 그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확인한 레이넌은 곧장 그곳을 향해 다가섰다.
“적당히 좀 하시지요.”
타나베른은 다급하게 레이넌을 붙들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손은 결국 허공을 가르고 말았다.
레이넌은 의자 아래를 한참 보더니 아멜리아에게 말했다.
“천을 뜯어 봐.”
“알겠습니다.”
의자 아래를 감싸고 있는 고급스러운 천을 뜯어내자 나무 판이 눈에 들어왔다.
아멜리아는 레이넌이 말하지 않아도 먼저 움직였다.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입니까!”
타나베른은 마차 안으로 뛰어들려고 했지만 레이넌의 기사가 그의 앞을 막았다.
동시에 타나베른이 데리고 온 기사들이 검을 뽑아 들었다.
아슬아슬한 대치 상황을 끝낸 건 레이넌의 목소리였다.
“이래도 아닌가?”
아멜리아가 뜯어낸 의자 아래에는 몸을 웅크리고 잠든 르네가 있었다.
“그, 그게……!”
“후작은 일정은 좀 미뤄야겠군. 정중하게 안으로 모셔라.”
하지만 타나베른은 평화롭게 레이넌을 따라나서지 않았다.
이런 일이 생기리라는 걸 예상이라도 한 듯, 시종 행세를 하고 있던 기사들이 검을 빼 들었다.
그를 따라온 이들은 모두 기사였고, 그들에게 쉽게 레이넌의 말을 따를 생각이 없다는 걸 앞으로 겨눈 검으로 알 수 있었다.
긴장 속에서 대치 상황이 이어졌다.
“뭣들 하는 것이야!”
다급한 타나베른의 호통에 그의 기사들이 먼저 달려들었다. 기합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양쪽 가문의 기사들이 한데 뒤엉켰다.
***
르네를 납치할 생각으로 로에리안저에 온 만큼 타나베른의 기사들도 만만치 않았다.
수는 적었으나 실력이 뛰어난 기사들만 추려온 듯했다. 그런 탓에 쉽게 끝날 것 같던 전투는 생각보다 길어졌다.
그렇지만 슈나이더와의 전투를 준비하던 레이넌의 기사들을 이기기엔 역부족이었다.
패배한 후작의 기사들은 모두 묶인 채 어디론가 끌려갔고, 타나베른은 그리도 떠나고 싶어 했던 응접실로 다시 돌아왔다.
“그래도 돈은 안 갖다 바친 모양이더군. 서류에 이름이 없던데…….”
레이넌의 말에 타나베른은 창백한 얼굴이 되어 식은땀까지 줄줄 흘렸다.
“그, 그걸 공작님이 어떻게……?”
“차라리 가만히 계셨다면 영원히 덮였을지도 몰랐겠군. 물론 그 편이 서로에게 좋았겠지.”
레이넌이 말한 대로였다. 서류에 타나베른의 이름은 없었다.
그 서류에 적힌 이름은 현물이나 금전을 직접적으로 제공한 자들의 것이었다.
타나베른의 이름이 없었다는 건 적어도 그는 물질적인 지원은 하지 않았다는 걸 의미했다.
“차라리 돈을 바치지 그랬나. 지금보다 더 나은 결말을 봤을 텐데.”
레이넌은 웃는 낯으로 말했다. 하지만 얼굴과 다르게 그의 목소리에는 한겨울의 서리보다 시린 기운이 가득 실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