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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잘 키워보려고 했을 뿐인데 (122)화 (122/129)

에드윈 역시 나와 같은 충동을 느낀 듯했고, 그는 참지 못하고 그대로 내게 몸을 맡긴 듯했다.

내 무릎 위에 머리를 누인 에드윈은 순식간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타나베른의 상황 역시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곧은 자세로 앉아는 있었지만 그의 눈은 꼭 감긴 채였다.

내 시선은 절로 체이스에게 향했다.

그런 와중에도 분한 내 감정이 눈에 그대로 담겼는지 시선이 마주치자 그는 눈에 띄게 몸을 움찔거렸다.

희미해지는 시야 속에서도 체이스의 무표정한 얼굴에 드리운 미안한 감정은 꽤 명확하게 드러났다.

할 거 다 해 놓고서 미안해하기는.

소리를 내어 욕이라도 해 주고 싶었지만 눈을 뜨고 있는 것조차 힘든 상황이었다.

속으로 이런저런 욕을 하느라 기력을 다 쓴 탓일까.

아니, 어차피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수면제가 들어간 물을 벌컥 들이켰으니 말이다.

며칠 사이에 벌써 두 번째로 겪는 상황이었다.

정신이 아득해졌지만, 이미 한 번 겪어 봤다고 당황스럽거나 무섭지는 않았다.

오히려 분통이 먼저 터졌다.

아, 또 당했어. 이렇게 짧은 시간 동안 비슷한 수법에 두 번이나 당하니. 나는 정말 바보인가 봐.

수많은 배신자 중에 체이스, 네가 제일 나빠.

나는 나를 탓함과 동시에 체이스를 욕하는 것도 잊지 않으며 그대로 쓰러졌다.

***

르네는 꽤 오래 버텼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렇지 않았다.

에드윈이 가장 먼저 잠들었고, 그녀 역시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다.

르네가 쓰러짐과 동시에 체이스는 바람과 같이 움직였다. 그에게는 다행히도 응접실 안을 지키는 기사의 숫자는 많지 않았다.

아직 상황 파악이 되지 않은 기사들을 기절시키는 건 체이스에게 그리 어렵지 않았다.

기사들이 없다면 남은 사용인들을 제압하는 건 그보다 더 쉬운 일이었다.

순식간에 응접실에 있는 사람들을 기절시킨 뒤 체이스는 르네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르네의 무릎을 베고 잠든 에드윈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소파에 내려놓았다.

흐트러진 머리칼이 얼굴을 간지럽힐까 봐 정돈해 주는 것은 물론 낮은 쿠션을 머리 밑에 대어 주기도 했다.

꼼꼼히 에드윈을 챙기고 난 뒤 체이스는 르네를 안아 들었다.

“죄송합니다.”

작은 한숨과 함께 흘러나온 사과는 누구를 향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에드윈과 르네, 두 사람 모두에게 하는 말일지도 몰랐다.

잠시 괴로운 얼굴을 했던 체이스는 표정을 가다듬고 응접실을 나섰다.

“무, 무슨 일인가?”

정신을 잃은 르네를 보고 문밖에서 대기하던 이들은 하나같이 당황했다. 불과 며칠 전에 있었던 난리가 떠오른 탓일 터였다.

“아무래도 아직 회복이 덜 되셨는데 무리를 하신 모양이야. 내가 모셔 갈게.”

평소와 다를 것 없이 덤덤한 체이스의 설명에 그들은 조금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안에는?”

“공작님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티타임을 가지시겠다는군. 방해하지 말라고 하셨어.”

체이스의 태도는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누구도 의심을 품을 틈이 없었다.

그렇게 체이스는 당당하게 르네를 데리고 응접실에서 벗어났다.

사람들에게 말한 것과 달리 그는 르네의 침실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향했다. 오히려 본관을 벗어나는 쪽이었다.

그 모습이 누군가의 눈에 띄었더라면 이상하다고 여겼을지 모르나 바깥의 소동으로 다들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따라서 그를 본 사람이 있어도 크게 수상쩍게 여기는 사람은 없었다.

본관을 벗어난 체이스는 그 옆에 있는 작은 창고에 들어섰다.

문을 닫고 르네를 조심스럽게 눕힌 뒤 그는 그제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왜 오늘…….”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슈나이더는 원래 내일 들이닥칠 계획이라고 말했다.

바깥이 소란스러운 것을 깨닫고 체이스는 곧장 슈나이더가 계획을 바꿨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리고 체이스는 무척이나 당황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내일 제 팔을 검으로 그어서라도 르네와 에드윈에게서 떨어질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르네를 슈나이더의 손에 내어주는 것만큼은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그간 에드윈에게 치명상을 입히지 못했음에도 슈나이더에게선 딱히 질책이 없더라니.

체이스는 이를 아득 물었다. 어떻게든 슈나이더의 눈을 돌릴 방법을 찾아냈어야 했다.

나름 노력했지만 결국 제 노력은 안일하고 미온한 방책에 불과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아무래도 슈나이더는 체이스의 약한 마음을 알아차리고 그를 배제하기로 한 것이 분명했다.

“도대체 언제부터……?”

하필 르네와 함께 있을 때 슈나이더는 로에리안가를 휘저었다. 어쩔 수 없이 체이스도 약속된 일을 해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렸다.

슈나이더가 로에리안저를 공격하면 체이스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사람들 눈을 피해서 르네를 데리고 곧장 슈나이더와 합류하는 것이었다.

혹시 일이 잘되지 않을 경우를 위한 대비책도 있었다.

체이스는 첫 번째 계획을 일부러 실행하지 않고 대비책을 선택했다.

르네를 잠시 숨겨 두었다가 조용해지면 그때 슈나이더와 합류하는 것이 바로 그 대비책이었다.

상황이 여의치 않을 경우를 대비해 마련한 두 가지 계획이었지만, 체이스에게는 우선순위가 달랐다.

체이스는 곤히 잠든 르네를 빤히 내려보다가 조용히 읊조렸다.

“죄송합니다. 아무리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했어도……. 일단 최대한 시간을 벌어 볼 테니 그 전엔 깨어나시길 바랍니다.”

그러고도 체이스는 바로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잠시 망설였다.

몇 번을 벗어나려고 같은 자리를 서성이던 그는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억지로 옮기기 시작했다.

창고에서 벗어난 체이스는 잠시 어디로 갈지 고민에 빠졌다.

계획대로 움직일 것인지, 아니면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일 것인지…….

하지만 그에겐 선택의 기회가 없었다. 사실 이조차 그에게는 계획에서 크게 벗어난 상황이었으니까.

차라리 레이넌의 손에 잡히는 게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체이스는 고통스러운 한숨을 뱉어 낸 후 멀어졌던 계획으로 다시 돌아가는 한 걸음을 내디뎠다.

서둘러야 할 것이 분명했지만 그는 최대한 미적거리며 움직였다.

체이스가 창고에서 모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지고 나서야 누군가가 조용히 그곳으로 다가왔다.

굳게 걸어 잠근 것을 몇 번이고 확인한 것이 무색하게 그는 닫힌 창고의 문을 쉽게 열었다.

깊이 잠든 르네의 모습을 바라본 남자는 작게 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따로 빼돌릴 거라더니. 정말 그럴 줄이야.”

체이스에게 두 가지 계획이 있었듯 슈나이더 역시 그랬다.

슈나이더는 체이스에게 마치 그가 계획의 주된 요인인 것처럼 말했고, 체이스와 함께 상황에 따른 대비책까지 세웠다.

하지만 실제로 슈나이더에게 있어 체이스는 대응책에 불과했다.

“보고 싶어서 왔다는 말을 덥석 믿으면 어쩌십니까, 공작님.”

온화한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차갑게 웃는 이는 바로 타나베른이었다.

타나베른이 허공에 슬쩍 손짓했다. 그 순간 아무도 없었던 주변에서 몸을 숨겼던 이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조금 전 체이스가 느릿하게 움직였던 것과는 전혀 달리 그들은 민첩하게 움직였다.

누군가가 르네를 둘러메자 타나베른은 조용히 명령했다.

“눈에 띄지 않게 옮겨. 곧 합류할 테니.”

“알겠습니다.”

르네를 데리고 사람들이 사라지자 타나베른은 아쉬운 목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끝까지 공작님께는 좋은 사람으로 남았으면 좋았을 텐데요.”

표정과는 달리 그의 목소리에는 비정함이 가득했다.

체이스보다 훨씬 오래전에 슈나이더의 사람이 된 타나베른은 오늘의 계획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일부러 약속도 하지 않고 레이넌을 찾았고, 르네와 에드윈을 한자리로 불러들였다.

체이스가 일을 쉽게 진행할 수 있게끔.

체이스는 아마 타나베른 역시 수면제가 든 물을 마셨을 거라고 믿었을 터였다.

계획을 이미 상세히 알고 있었던 타나베른은 체이스가 볼 때 물 잔에 입만 댔다. 그리고 잠든 척 상황을 지켜봤다.

물에 수면제를 타서 그녀를 데리고 나갈 때만 해도 타나베른은 혹시나 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했다.

그러나 체이스가 그를 기다리고 있을 슈나이더의 사람에게로 가는 대신 르네를 숨기러 간다는 것을 알고는 실망감에 혀를 찼다.

슈나이더가 장담했던 대로 체이스는 르네를 건넬 생각이 없다는 걸 직접 확인한 꼴이 되었다.

그의 실망감은 제 손으로 레이넌의 소중한 사람을 빼돌려야 하는 이 상황에 대한 것은 아니었다.

만약 체이스가 제 일을 제대로 했다면 타나베른은 언제까지고 레이넌에게 좋은 사람으로 남았을 터였다.

그렇다면 슈나이더가 잘못되더라도 타나베른의 미래는 위협받을 일이 없었다.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 레이넌의 원한을 대놓고 사고 싶지는 않았던 것 역시 사실이었다.

“그러게 이런 존재는 약점만 된다는 걸 잘 아시는 분이 왜 그러셨습니까.”

타나베른의 얼굴은 아까 르네에게 안도감을 주었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버지와 같은 얼굴로, 진심으로 레이넌을 걱정하는 표정을 지어 보이고 있었다.

이제까지 레이넌마저 감쪽같이 속인 바로 그 표정이었다.

***

슈나이더가 이렇게 바로 움직이리라는 건 레이넌도, 로만도 예상하지 못한 바였다.

그래서 레이넌은 얼른 체이스부터 떼어 놓으라고 로만에게 명령한 것이었다.

로만도 무엇이 시급한지 알았기에 열심히 뛰어 응접실에 도착했다. 하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체이스가 르네 님을 데리고 갔다고?”

“……네.”

심각한 로만의 표정에 다들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사색이 된 로만의 얼굴이 체이스가 르네를 데려가서는 안 됐다는 걸 알려 주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로만은 응접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바깥을 지키던 이들은 놀라서 제대로 말도 하지 못했다.

정신을 차리고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들을 이렇게 만들 만한 실력자가 누구인지 모두 알고 있었다.

체이스의 실력을 모른다고 하더라도 응접실에서 제 발로 나간 사람은 그 하나였다.

더욱이 응접실 안을 이렇게 만든 체이스를 자신들이 고이 보내 줬다는 사실도 함께 떠올렸다.

“왜, 왜 체이스가……?”

“지금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지. 얼른 르네 님부터 찾아.”

로만의 말에 다들 헐레벌떡 체이스가 사라진 방향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잠시 사람들의 뒷모습만 보던 로만은 침울한 얼굴로 터덜터덜 걸음을 옮겨 레이넌에게로 돌아갔다.

“죄송합니다. 제가 늦었습니다. 이미 체이스가 르네 님을 데리고…….”

로만의 말에 레이넌은 이마를 짚었다.

“체이스를 그대로 두는 게 아니었습니다. 어떻게든 빨리 에드윈 님에게서 떼어 놓을 것을요.”

“지금 와서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지.”

레이넌도 씁쓸하게 말했다.

언젠가 마빈이 말한, 캐서린도 알지 못하는, 더욱더 은밀하게 숨어 있는 슈나이더의 사람이 바로 체이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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