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를 잘 키워보려고 했을 뿐인데 (121)화 (121/129)

“아……. 그러고 보니 못 본 지 오래되셨겠군요.”

“아주 어리셨을 때 뵙고 못 뵈었으니까요.”

“그렇게나 되었던가요.”

“시간이 이렇게 빠릅니다. 오랜만에 이렇게 만난 김에 에드윈 님도 함께 티타임을 가지는 건 어떻습니까?”

타나베른의 제안에 선뜻 답을 내어주지 않던 레이넌은 나를 슬쩍 내려보고는 에드윈을 불러오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렇게 예상 밖의 손님으로 인해 예정에 없었던 티타임을 즐기게 됐다.

타나베른을 거의 처음 만나는 것과 다름없는 에드윈은 예의를 갖춰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훌쩍 자란 에드윈을 보고 감격했는지 타나베른은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에드윈은 그런 타나베른이 조금 낯선 듯했지만 그렇다고 크게 불편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게 꽤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저택 바깥에서 굉음이 들려왔다.

곧 큰 소리만큼이나 거대한 진동이 느껴졌다.

진동은 나만 느낀 게 아닌 모양이었다. 소리와 흔들림이 느껴진 후, 응접실에 있던 모두가 당황했다.

티를 내지 않은 건 레이넌 한 사람뿐이었다.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바삐 상황을 파악하러 응접실을 나섰고, 누군가는 창문을 통해 바깥의 동향을 살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굉음은 또다시 들려왔고, 동시에 로만이 다급하게 응접실로 들어와 레이넌에게 속삭였다.

“슈나이더가 쳐들어왔습니다.”

아주 작은 목소리였지만 바로 옆에 있던 내 귀에도 들렸다.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레이넌과 달리 나는 너무 크게 놀라고 말았다.

“뭐?”

갑자기 낸 큰 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모여들었고, 그제야 나는 뒤늦게 내 입을 막았다.

“다들 신경 쓸 것 없어.”

레이넌은 주변을 둘러보며 차분하게 말했고, 동시에 내 어깨를 토닥였다.

그러고는 타나베른을 보고 웃으며 양해를 구했다.

“확인을 좀 하고 올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시지요.”

“그럼요. 편히 다녀오십시오. 저야 여기 르네 님과 에드윈 님이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고요.”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레이넌이 자리를 떠난 후에도 굉음은 더 들려왔다. 응접실에 남은 사용인들이나 기사들도 역시 영문을 알 수 없는 건 마찬가지인 듯했다.

다들 능숙하게 표정을 숨기고는 있었지만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고, 또 어떤 이들은 겁을 내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와중에 내 눈에 가장 이상하게 보인 건 체이스였다.

평소 감정을 잘 드러내는 편이 아닌 체이스가 눈에 띄게 당혹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레이넌도 잠시 놀란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크게 당황한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다.

담담한 레이넌의 반응을 보면 체이스가 이렇게 당황스러워할 정도의 일은 아닐 터였다,

심지어 체이스는 감정을 그대로 표출하고 있는 것도 알아채지 못한 듯했다.

뭔가 생각에 잠겼다가 바깥을 보는 모습이 꽤 초조해 보였다.

“체이스?”

“네?”

“괜찮아?”

내가 체이스를 빤히 바라보고 있자 에드윈도 그의 상태를 눈치챈 모양이었다.

에드윈의 질문에 체이스는 한층 더 당황했다.

그러고는 나와 에드윈을 잠시 번갈아 보더니 애써 감정을 갈무리하며 대답했다.

“네. 이런 일은 처음이라.”

“으음. 체이스도 당황할 줄 아는구나.”

에드윈은 재미있다는 듯 그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며 말했다.

그런 에드윈의 시선을 제대로 마주 보지 못하고 체이스는 슬쩍 눈을 피하고는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저도 일단은 사람입니다.”

“일단 공작님께서 괜찮다고 하셨으니 다들 걱정은 말고 차나 드시지요.”

소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타나베른은 여유를 잃지 않고 차를 권했다. 그는 말뿐이 아니라 실제로 느긋하게 차를 즐기고 있었다.

***

“슈나이더라니?”

응접실을 나오자마자 레이넌의 얼굴에 떠올랐던 여유로운 미소는 사라졌다.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묻자 로만 역시 웃음기라고는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도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에드윈이 분명 나흘 뒤라고 잘 알려 줬다고 했는데. 왜지?”

에드윈의 이야기를 들었다면 슈나이더는 모레 레이넌이 쳐들어올 것으로 알고 있을 터였다.

그렇다면 굳이 레이넌을 먼저 공격하려 들기보다는 제대로 대비해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여겼다.

하지만 이틀 전에 로에리안가로 직접 쳐들어오리라는 건 레이넌도, 로만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피해는?”

“다행히 크지 않습니다. 어차피 저희가 움직이려고 했던 게 내일이었던지라 다들 단단히 준비하고 있었던 덕인 듯합니다.”

“그래. 내일 불시에 들이닥쳐서 순식간에 끝내 버리려고 했지.”

레이넌은 계획을 잠시 되짚다가 곧 웃음을 터트렸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 슈나이더는 정말 아무도 믿지 않는 것 같아서. 그렇지 않고서야 오늘 움직일 이유가 없지.”

“그런 걸까요?”

“선수를 친 거야. 우리에게 서류가 없다는 확신을 가진 건지, 혹은 뭐든 핑계를 댈 말을 찾은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한들 무모한데요? 저희가 가지고 있을 가능성도 배제하긴 어렵지 않습니까?”

“그래. 일단 이렇게 된 김에 그냥 진행하지. 잘됐군. 아멜리아는?”

“돌아오는 길일 겁니다.”

“아멜리아는 돌아오자마자 르네와 에드윈의 곁을 지키라고 해. 그리고…….”

매끄럽게 흘러나오던 지시가 중간에 뚝 멈췄다. 로만이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니 레이넌은 잔뜩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니, 그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그 모습에 놀란 로만이 무슨 일인지 물으려고 했다. 하지만 입을 열기 직전, 로만 역시 레이넌과 비슷한 얼굴을 했다.

로만은 뻣뻣하게 고개를 돌려 레이넌과 눈을 마주했다. 말할 틈도 없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만난 그 순간, 로만은 다급히 응접실로 향했다.

***

레이넌이 문제를 해결하러 나가고, 뭔가 터지는 듯한 굉음은 사라졌다.

하지만 이상하게 저택이 더 소란스러워진 듯했다.

소리를 들어 보니 저택의 바깥에서부터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았다. 그것도 꽤 심상치 않은 일이.

기분 탓인지 서늘한 바람이 방으로 밀려드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바람에는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뒤엉켜 있었다.

고통에 찬 신음이나 몸 깊숙한 곳에서 끌어 올린 기합 등이 바람에 옅게 묻어났다.

소리만 듣는 것도 불안했지만, 무엇보다 저 난리 속에 있을지도 모를 레이넌이 걱정되었다.

그래서일까.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초조한 마음만큼이나 급한 내 걸음이 창가로 향했지만 누군가가 재빨리 내 앞을 막아섰다.

“공작님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일단은 기다리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나를 말리는 사람이 체이스라는 점이 영 꺼림칙해서 나는 그를 밀치고 계속 걸었다.

하지만 그도 곧 멈춰야 했다.

불안한 건지, 내가 걱정된 건지 그새 나를 따라잡은 에드윈이 내 손을 꼭 붙들고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요. 안전한 곳에서 기다리는 게 공작님을 위한 일입니다.”

에드윈은 물론 타나베른까지 거들고 나서니 상황이 궁금해도 더는 움직이기가 곤란했다.

난감한 얼굴로 에드윈을 내려다보자 그는 상황을 꼭 알기라도 하듯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그리고 잡은 손에 힘을 실어 나를 다시 소파로 끌었다.

순순히 에드윈이 바라는 대로 조금 전 앉아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하지만 에드윈은 여전히 안심되지 않는지 잡은 손에 준 힘을 좀처럼 풀지 못했다.

“괜찮아.”

다른 손으로 에드윈의 손을 쓰다듬으며 말하자 그는 그제야 싱긋 웃으며 내 손을 놓았다.

그래도 에드윈 역시 여전히 뭔가 신경이 쓰이는지 바깥과 체이스를 번갈아 바라봤다.

“공작님이 돌아오시려면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으니 우리끼리 준비된 디저트나 들면서 기다리죠.”

손님인 타나베른이 오히려 주인인 것처럼 여유로운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넉넉한 풍채에 사람 좋은 인상을 지닌 그의 너털웃음을 보는 것만으로도 어쩐지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어쩌면 내가 해야 할 일을 타나베른이 대신한 게 아닌가 해서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지만 레이넌이 신뢰하는 사람이라는 점이 크게 와닿아서일까.

민망함이나 미안함보다는 알 수 없는 안도를 느끼며 한결 가볍게 대꾸했다.

“그럴까요, 그럼?”

자연스럽게 나는 앞에 놓인 찻잔을 들었지만 차마 차를 마시지는 못했다.

찻잔을 얼굴 높이로 든 내가 그대로 굳어서 작게 흔들리는 찻물을 바라보고만 있자 타나베른이 의아한 듯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찻잔을 내려놨다.

“에드윈 님?”

“저도 오늘은 차를 마시고 싶지 않아요.”

불과 며칠 전에 있었던 사건이 떠오른 건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닌 모양이었다.

에드윈은 원망스러운 눈으로 찻잔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주 잠시 그러한 시선이 체이스에게 닿은 것 같기도 했다.

괜히 에드윈에게 좋지 않은 기억을 심어 준 것 같아 한 모금이라도 차를 마셔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시 찻잔을 들려는데 에드윈이 다급하게 내 손을 붙잡았다.

놀란 그의 눈을 보고서야 차에 대한 기억은 당분간 바뀌기 힘들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렇다면 굳이 에드윈을 더 걱정시키지 않는 게 나았다.

생각을 마친 나는 찻잔을 들려던 손을 그대로 거뒀다.

“시원한 물 좀 가져다줄래? 에드윈은?”

“저도 어머니랑 같은 걸로 마실래요.”

나를 지켜 주겠다는 듯 에드윈은 어깨를 당당하게 폈다.

“알겠습니다.”

든든하면서도 귀여운 그의 모습에 시종은 흐뭇한 미소를 애써 무표정한 얼굴 속에 감추며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그는 곧 물을 내어왔다.

유리잔에 송골송골 맺힌 물방울과 물 위에 떠 있는 레몬 조각을 보자 문득 갈증을 느꼈다.

산뜻한 물이 목을 타고 온몸에 퍼지기 시작했다. 그런 나를 보더니 타나베른은 흐뭇하게 웃었다.

“물을 이렇게 맛있게 드시는 분은 처음 뵙는군요. 저도 한 잔 얻어 마시고 싶어질 정도로요.”

그의 말에 누군가가 눈치 빠르게 물 한 잔을 더 가져왔다.

에드윈도 목이 말랐는지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고는 먹던 쿠키를 마저 입에 넣었다.

손에서 쿠키가 사라지기 무섭게 에드윈은 다른 쿠키로 손을 뻗었다. 잘 먹는 모습을 보니 절로 흐뭇한 미소가 흘러나왔다.

평소 에드윈이 좋아하는 케이크가 눈에 띄어 그의 앞으로 끌어 줬다. 그러자 에드윈은 케이크와 나를 번갈아 보며 방긋 웃었다.

“천천히, 많이 먹어.”

“네!”

남은 쿠키를 얼른 한입에 집어넣은 그는 케이크로 손을 뻗었다. 그런 우리를 지켜보던 타나베른이 웃으며 말했다.

“정말 잘 어울리는 모자지간이네요. 제가 봐도 이렇게 흐뭇한데, 공작님께선 얼마나 기쁘시겠습니까.”

타나베른은 꼭 레이넌의 아버지라도 된 듯이 인자한 얼굴로 나와 에드윈을 눈에 담았다.

레이넌이 없어 어색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예상과는 달리 화기애애한 시간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런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갑자기 졸음이 밀려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분명 어제 잠도 많이 잤는데 참을 수 없을 만큼 잠기운이 몰려왔다.

어떻게든 버텨 보려고 눈에 힘을 줬지만 하릴없이 눈꺼풀이 내려앉았다.

이 정도 되니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생각과 달리 몸의 반응은 정직했다.

나도 모르게 몸이 천천히 뒤로 기울었다.

소파의 푹신한 감촉이 등에 닿자 그대로 눕고 싶은 충동이 강하게 일어났다.

그때 내 무릎 위에 무언가가 툭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