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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잘 키워보려고 했을 뿐인데 (120)화 (120/129)

“공작님?”

“응?”

책상 앞에서 집중하고 있던 레이넌은 내 부름에 곧장 고개를 들었다.

“제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야 하죠?”

“무슨 말이지?”

레이넌은 정말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되물었다. 나는 그런 그의 태도에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들어 보였다.

“제가 왜 여기에서 공작님의 일을 돕고 있나 해서요. 아니, 게다가 이건 공작님의 일을 돕는 것도 아니잖아요?”

레이넌에게 서류 봉투를 건네주고 잠들었다가 깨어났는데도 그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있었다.

자리를 떠나지 않은 건가 잠시 생각했지만 옷을 갈아입은 걸 보면 일찍 와 있었던 듯했다.

레이넌은 좀처럼 내 곁에서 떠나지 않더니 결국은 그의 집무실까지 나를 데리고 왔다.

제 일을 도와달라고 하더니 내 손에 들려준 건 천과 바늘, 그리고 실이었다.

내 의문을 이해한 듯 그는 아아, 하는 낮은 감탄사를 뱉어 낸 후 가벼운 말투로 말했다.

“에드윈에게 선물을 했다지?”

“아.”

독에 집중하느라 다른 건 신경 쓸 겨를이 없다고 여겼는데 그저 잠시 미뤄 둔 모양이었다.

“나도 못 받은 선물을 에드윈은 받았다니 서운해서 말이지.”

“그렇다고 이렇게 재료까지 쥐여 주면 선물의 의미가 퇴색되는 게 아닌가요?”

“받는 내가 즐거우면 된 거 아닌가?”

“그것도 그렇네요.”

나는 그의 말에 긍정하고는 손에 들었던 것들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레이넌도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 해 주겠다고?”

“아니요. 제 방에 공작님 선물도 있으니 가지고 올게요.”

레이넌에게 줄 선물은 하나 더 있다는 게 문득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은 서운해 보이는 그를 달랠 수 있을 것 같았다.

선물을 가지고 오겠다고 하면 기뻐할 줄 알았지만 뜻밖에도 레이넌은 나를 말렸다.

“그건 나중에. 지금 그대가 할 일은 에드윈에게 준 것보다 더 정성스러운 자수를 놓는 일이야.”

“그러니까 공작님 것도 제가 정성스럽게…….”

“내 눈앞에서 직접 놓는 모습이 보고 싶어서 그래.”

어쩐지 억지를 부리는 것 같이 들리는 말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무리 내가 독을 먹었다고 하나 오늘 레이넌은 조금 이상했다.

생각하고 보니 이상한 건 레이넌만은 아니었다.

어쩐지 어수선한 분위기도 그렇고, 무엇보다 지금까지 아멜리아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왜 그렇게 나를 수상하다는 눈으로 보지?”

레이넌은 의자에 몸을 기대며 내게 물었다.

생각에 빠진 나머지 나도 모르게 그를 가는 눈으로 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멜리아가 안 보이네요?”

“심부름 보냈어.”

“아멜리아를요?”

“그래.”

딱히 이상할 일은 아니지만 뭔가 찝찝한 이유는 뭘까.

아멜리아에게 심부름을 시켰다는 건 그만큼 중요한 일이라는 말이었다.

레이넌은 웬만하면, 특히 이런 시기에 아멜리아를 내 곁에서 떼어 놓는 일을 할 리가 없었으니까.

“여전히 눈은 그대로인데.”

“여전히 의심스럽지만 일단 넘어갈게요.”

“고맙군. 기왕 넘어간 김에 모른 척하고 하던 일도 계속해 주면 좋겠는데.”

“알았어요.”

아멜리아가 지금 내 곁에 없는 것도, 그가 이렇게 상황을 얼버무리며 나를 떼어 놓지 않는 것도 이유가 있을 터였다.

물론 단순히 아멜리아가 없으니 위험할 수도 있으니 그의 곁에 두려는 것일 수도 있었다.

뭔가 이유가 있다면 나중에라도 알려 주리라는 걸 잘 알았기에 나는 내려놓았던 천과 바늘을 다시 집어 들었다.

레이넌은 그제야 안심한 듯 다시 조금 전 보고 있던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그의 집중력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바늘을 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손가락이 찔렸기 때문이었다.

그간 에드윈과 레이넌의 선물을 준비하며 여러 번 찔렸던 터라 나는 자연스럽게 다시 바늘을 다잡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간 늘지 않았던 실력이 한 번에 늘었을 리 없었다.

몇 번을 더 바늘에 손가락이 찔리자 레이넌은 못 참겠다는 듯 내게 다가왔다.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니겠지?”

“설마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답하자 그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웃으며 내 손을 올리자 레이넌도 나를 따라 미소를 보였다.

그러고는 곧 아차 하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일단 치료부터 하지.”

“그 정도는 아니에요.”

레이넌은 잠시 내 손가락을 바라보더니 못마땅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의 손가락을 이렇게나 찔러 가며 주는 선물이라니.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알 수가 없군.”

“기대하세요. 공작님 선물은 특별히 두 개나 준비했으니까요.”

“일단 기뻐하는 쪽으로 마음을 정해야겠군.”

“그 쪽이 마음은 편하실 거예요.”

그대로 대화는 끝이었다. 하지만 레이넌은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돌아가는 대신 몸을 뒤로 기댔다.

“바쁘신 거 아니에요?”

“무척 바쁘지.”

바쁘다고 말하는 레이넌의 말투는 무척이나 여유로웠다.

하지만 레이넌의 말투보단 내용이 그의 상황을 제대로 알려 주고 있을 터였다.

날 데려오기까지 했는데 그는 내내 일만 했으니까.

이따금 나를 살피기도 했지만 대부분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해 서류를 넘겼다.

과연 제대로 읽기는 하는 걸까 의심스러울 속도로.

“일 안 하고 놀고 싶군.”

에드윈이 아닌 레이넌에게서 들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말이었다.

언젠가 에드윈에게 꾀병을 부리는 법을 알려 줄까 고민했던 적도 있었는데.

레이넌에게 알려 주어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하며 나는 작게 웃었다. 내 웃음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그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진심인데. 살면서 일하기 싫은 날이 올 줄은 몰랐군.”

“저는 늘 반대였는데요. 보통은 일하기 싫지 않나요?”

“그런가.”

그는 그대로 잠시 시간을 더 보낸 후 다시 책상으로 돌아갔다. 일하느라 바쁜 그를 지켜보는 건 꽤 재밌었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작게 인상을 쓴 얼굴도, 피곤한 듯 눈을 비비는 모습도 낯선 것이었으니까.

게다가 하루로 끝날 일이라 생각했으니 그를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은 잘 흘러갔다.

***

하지만 내 예상과 달리 그건 하루로 끝나지 않았다.

다음 날 역시 아멜리아는 보이지 않았고, 그는 나를 온종일 데리고 다닐 기세였다.

아멜리아가 이틀째 보이지 않는 것이나 레이넌이 나를 내내 끼고 있는 건 그렇다고 쳐도 나를 불안하게 하는 건 따로 있었다.

저택이 전체적으로 묘하게 어수선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분위기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대부분 이유는 알지 못한 채 흉흉한 분위기에 휘말려 불안함을 숨기지 못했다.

“아멜리아는 언제 돌아오나요?”

“오늘 중엔 돌아오겠지. 왜? 불안한가?”

“아멜리아가 없어서 그렇다기보다는 어제부터 분위기가 조금 뒤숭숭하네요.”

레이넌은 내 말에 하던 일을 멈추고 옆으로 와서 앉았다. 그러고는 내 손을 잡고 말했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일부러 그렇게 유도한 거니까.”

“유도요?”

“그래. 다들 실체 없이 술렁이고만 있지 않나.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을 뿐이야.”

“어쩐지. 구체적인 이야기는 없고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다, 그런 이야기만 나와서 저도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 그걸 바란 거지.”

슈나이더의 약점을 얻은 그는 모든 준비를 마쳤다. 이제 오래도록 기다렸던 일을 실행하는 일만 남은 듯했다.

내가 느끼는 이 어수선한 분위기 역시 그의 계획 중 일부분이라 그는 말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설명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넌의 말대로 실체 없는 불안은 사라졌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이 생겨나기도 했다.

과연 무사히 끝날 수 있을까.

아무도 다치지 않고 잘 끝날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그는 얼굴만 보고도 내가 어떤 생각 중인지 알아챈 듯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나를 달랬다.

“걱정하지 마. 그대가 도와준 덕에 잘 해결될 것 같으니까.”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내가 걱정을 한다고 한들 달라지는 것은 없었기에 나는 웃었다.

그때였다. 시종이 예고 없이 찾아온 손님의 방문을 알렸다.

“타나베른 후작님께서 공작님을 뵙고 싶어 하십니다.”

“타나베른 후작이?”

레이넌과 나는 동시에 서로를 바라봤다.

나와 마찬가지로 어리둥절한 레이넌의 표정을 보니 그 역시 예상치 못한 일인 듯했다.

“일단 응접실로 모시도록 해.”

“알겠습니다.”

시종이 타나베른을 안내하러 나간 사이 레이넌은 어떻게 할지 잠시 고민하는 듯 보였다.

“후작이 어쩐 일일까요?”

“그러게. 이렇게 약속도 없이 오는 사람이 아닌데.”

다른 때였다면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기쁘게 타나베른을 맞이했을 레이넌이었다.

그렇지만 중요한, 어쩌면 위험할지도 모를 이때 찾아왔으니 마냥 반기기도 어려운 듯 보였다.

“그럼 저는 제 방에 돌아가 있을 테니까 말씀 나누세요.”

“아니야. 같이 가지.”

“네?”

“이 기회에 제대로 인사라도 하지. 지난번엔 그럴 여유가 없었으니까.”

“그럴까요?”

레이넌은 찾아온 손님을 내칠 수 없는지 그를 만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기왕이면 나와 그를 다시 한번 제대로 소개할 생각을 한 듯 보였다.

레이넌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방을 나섰다.

***

레이넌과 함께 응접실에 가자 먼저 와 있던 타나베른이 허허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에게 다가왔다.

“말씀도 없이 어쩐 일입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약속도 없이 찾아왔는데 만나 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사람은 반갑게 악수를 했다. 타나베른은 레이넌과 함께 온 나를 보고는 사람 좋게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두 분의 시간을 제가 방해한 게 아니면 좋을 텐데요.”

“아닙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레이넌의 곁에 붙었다.

레이넌은 그게 마음에 들었던지 내 허리를 감고는 타나베른에게 자리를 권했다.

차가 들어오고 나서, 타나베른은 레이넌을 지긋이 바라보며 갑작스러운 방문의 이유를 밝혔다.

“예의가 아닌 줄 알지만 오늘은 꼭 얼굴을 뵙고 싶었습니다.”

“예의라니요. 그렇게 따질 사이는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젯밤 꿈에 전대 로에리안 공작님이 나오는 바람에……. 그냥 문득 얼굴이 보고 싶어졌습니다.”

“……그러셨군요.”

석연치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던 레이넌은 곧 다시 타나베른에게 물었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아닙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셨습니까?”

“이런 방문은 처음이시라 혹여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 게 아닌가 했습니다.”

“하하. 제가 앞으로 자주 찾아뵙겠습니다. 정말 갑자기 공작님이 뵙고 싶어서 온 겁니다.”

“별일 없으시다니 다행입니다.”

이제껏 한 번도 그런 적 없었던 타나베른이 급작스럽게 찾아온 이유를 알게 되자 레이넌은 한결 편안한 얼굴을 했다.

“그래도 덕분에 이렇게 얼굴을 뵙습니다. 조만간 한번 찾아뵐 생각이었는데요.”

“혹여 결혼식 날짜를 잡은 겁니까?”

타나베른이 반색하더니 나를 보며 물었다.

내가 눈에 띄게 당황하며 대답을 못 하자 그는 멋쩍게 웃으며 내게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나이가 드니 이렇게 주책만 늡니다.”

“아, 아닙니다. 아직 결혼까지는…….”

“곧 자세히 이야기해 봐야지요.”

나는 말을 흐렸지만 레이넌은 그 뒤를 이어 명확하게 자신의 의지를 표현했다.

그와 나의 말은 전혀 다른 뜻을 지니고 있었고, 타나베른은 우리 두 사람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그래요. 언제가 되었건 빨리 소식을 듣고 싶습니다.”

“바로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나저나 오랜만에 에드윈 님도 뵙고 싶은데 많이 바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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