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윈.”
“……네.”
에드윈은 레이넌의 부름에 풀 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레이넌은 에드윈이 습관처럼 손가락을 꼼지락대는 모습을 조용히 바라봤다.
이어지는 침묵에 에드윈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레이넌은 에드윈과 눈이 마주치고서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르네도 그렇지만, 너도 그래.”
“네?”
뜬금없는 말에 에드윈은 고개를 갸웃했다. 레이넌은 너무 앞뒤 없이 말했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자세히 설명했다.
“너도 당연히 당해서는 안 되는 일이야. 네 안위를 위협하는 어떤 것도 나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에드윈은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들은 듯 눈만 깜빡였다. 곧 그의 눈에는 감동과 행복이 넘실거렸다.
레이넌은 제게 빤히 와 닿는 시선에 조금 쑥스러워하며 말을 이었다.
“최대한 빨리 끝낼 테니 르네도, 너도 걱정할 일은 없을 거야.”
“하지만 그 전에 어머니가 크게 다치기라도 하면…….”
“그런 일은 없어. 그 전에 끝날 테니까.”
확신에 찬 레이넌의 말을 들은 에드윈의 눈에 총기가 차올랐다.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는 거죠?”
“그래.”
레이넌이 고개를 끄덕이자 에드윈은 다부진 얼굴을 하고 말했다.
“뭐든 말씀하세요.”
그들의 대화는 그리 길지 않았다. 레이넌은 무표정하게 이야기했고, 에드윈은 경청했다.
그리고 뒤에서 듣고 있던 로만은 불안한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과연 일이 그렇게 잘 풀릴까 걱정스러운 로만과 달리 레이넌과 에드윈은 의지가 넘쳤다.
이럴 때 보면 참으로 사이가 좋은 부자 같아서 로만은 흐뭇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무섭기도 했다.
그나마 레이넌은 어릴 때부터 아이다운 모습은 거의 없었지만, 에드윈은 아이처럼 보이기는 한다는 점이 다를까.
르네는 상상도 못 할 모습이었다. 지금 아무도 모르게 르네가 여기 숨어 있다가 들킨다면…….
그녀와 에드윈이 서로 어떤 반응을 보일까 로만은 문득 궁금해졌다.
“르네 님이 도망치기 전날 봤던 모습 같군요.”
르네를 어떻게 붙들 것인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던 모습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흘려 낸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에 두 쌍의 시선이 날카롭게 로만에게 닿았다.
“왜, 왜 그렇게 보십니까?”
“그날도 로만은 안 도와줬어. 오늘도 도와줄 거 아니면 쓸데없는 이야기는 하지 마. 어머니가 떠난다니……. 생각만 해도 슬프니까.”
“아, 아니 떠나실 거라는 게 아니라 예전에…….”
“그만. 떠난다는 말 자체를 하지 말라는 말이지 않나.”
“로만은 가끔 말을 너무 못 알아듣는다니까.”
말을 자주 못 알아듣는 르네에겐 관대한 두 남자가 로만에게는 가차 없었다.
한마디씩을 남긴 레이넌과 에드윈은 다시 대화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미 대화는 마무리에 들어섰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에드윈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맡겨만 주세요.”
에드윈은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사와 함께 씩씩하게 제 방으로 돌아갔다.
로만은 에드윈을 배웅하고 돌아와 씁쓸한 얼굴로 물었다.
“잘하실 수 있을까요?”
“그럼.”
로만과 달리 레이넌은 말해 뭐 하냐는 듯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마 네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잘 해낼걸.”
“물론 에드윈 님이 또래 아이들과는 다르시지만 그래도 아이입니다.”
“아이지만 로에리안의 차기 공작이야. 그리고 르네가 그런 걱정을 하면 모르겠지만 너는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에드윈이 르네에게만큼은 순진하고 천진한 아이같이 굴고 있지만 다른 사람은 달리 대했다.
특히 로만에게는 숨길 것이 없기에 제 모습을 그대로 내보이는 편이었다.
물론 에드윈의 아이 같은 면모가 모두 거짓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매서움과 냉정함 역시 에드윈이 가진 모습이기도 했다.
레이넌은 그 부분을 지적하는 것이었다.
“하긴, 그것도 그렇죠. 다만 너무 큰일에 끼어드시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되어 그럽니다.”
“이 정도로 끼어들었다고 볼 순 없지. 아마 에드윈도 내가 왜 제게 그 일을 맡겼는지 잘 알 테니 딱 시킨 그 정도만 하고 빠질 거야.”
“왜 에드윈 님입니까?”
“아이니까.”
“아…….”
“방심하겠지. 아무리 에드윈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하나 에드윈은 어쨌든 천진한 아이니까.”
“……그렇겠군요.”
“자, 그럼 이건 폐하께 보내 볼까?”
레이넌은 서류 봉투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런 레이넌의 말에 로만은 뜻밖이라는 듯 되물었다.
“소식을 전하는 게 아니라 이 서류 자체를 보내신다고요?”
“내가 가지고 있어 뭐 하겠나. 귀찮은 일은 폐하께 떠넘겨야지. 그리고 폐하께서 가지고 있어야 더 힘이 되는 물건이기도 하고.”
“그럼 누구를 보내야 할까요?”
로만의 질문에 레이넌은 입을 다물었다. 로만 역시 딱히 그의 대답을 재촉하거나 제 의견을 말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두 사람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적임자는 한 명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누구도 쉽게 떠오른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침묵이 한참 이어진 후 레이넌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아멜리아를 보내지.”
아멜리아만 한 적임자는 없었다.
슈나이더가 로만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두 파악하고 있을 것이 뻔했다. 로만의 움직임이 곧 레이넌의 움직임이기도 하였으니까.
무엇보다 중간에 공격을 받기라도 하면 로만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다.
로만은 여러모로 출중한 능력을 지녔지만 몸을 움직이는 것만큼은 어려서부터 처참할 정도로 어설펐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의 손에 들려 보내기도 마땅치 않았다.
혹여 미처 파악하지 못한 슈나이더의 사람이기라도 하면, 혹은 중간에 포섭되거나 나쁜 마음을 먹기라도 한다면…….
신뢰와 안전이라는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건 아멜리아가 유일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쉽게 그녀의 이름을 거론하지 못한 건 르네 때문이었다.
아멜리아가 자리를 비우게 되면 필연적으로 르네의 경호에 공백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물론 르네를 지키는 건 아멜리아 한 사람의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위와 같은 이유로 아멜리아가 르네의 경호에 있어 총책임을 맡고 있었다.
고로 아멜리아의 부재로 인한 위험을 무시할 수 없었다.
“일단 최대한 내가 붙어 있지. 그렇지 못할 땐 에드윈이랑 떨어지지 않게끔 하고.”
르네만큼 안전에 신경을 쓰고 있는 사람이 에드윈이기에 레이넌은 그렇게 결정했다.
그렇지만 로만은 그 역시 걱정스럽다는 듯 조심스럽게 물었다.
“에드윈 님과 함께라면 오히려 더 위험할 수 있지도 않겠습니까?”
“에드윈 주변에 일부러 사람을 더 많이 두지 않았나. 보는 눈이 많으니 쉽게 움직이진 못할 거야.”
“그렇긴 하지만…….”
“게다가 에드윈이 내 부탁을 잘 들어준다면 무모하게 움직이기보다는 기다리겠지. 적절한 때를.”
레이넌의 말에 로만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이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던 레이넌과 에드윈의 모습을 떠올렸다.
“르네까지 공격당해서 내가 무척이나 화가 났어. 로만은 고작 나흘만 참으면 된다고 나를 말리느라 무척 고생 중이지.”
책 읽듯 무미건조하게 레이넌은 제 상황을 읊었다. 물론 그건 사실과는 달랐다.
레이넌이 화가 난 건 맞지만 로만이 말리기 힘들 정도로 이성을 잃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에드윈은 그 이야기만으로도 레이넌이 무엇을 원하는지 바로 알아차렸다.
“나흘. 그걸 알려 주면 되는 거죠?”
로만은 제 생각보다 훨씬 영민한 에드윈의 모습에 놀랐다.
반면에 레이넌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믿는다.”
“네. 잘할 수 있어요.”
신뢰가 가득 담긴 레이넌의 말에 에드윈은 믿음직스러운 대답을 돌려줬다.
닮지 않은 듯 꼭 닮은 부자의 모습을 보며 로만은 생각했었다.
어쩌면 에드윈을 가장 정확하게 바라보고 있는 이는 레이넌일지도 모르겠다고.
“그러면 시간이 없으니 다시 한번 제대로 점검해야겠군.”
“알겠습니다.”
당장 내일 움직여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준비는 완벽했다.
그러나 레이넌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걸 다시 꼼꼼하게 점검해 볼 생각이었다.
로만 역시 며칠 간은 잠을 포기할 생각으로 확인해야 할 목록을 바삐 머릿속으로 그려 냈다.
***
한편, 에드윈은 로만의 걱정이 쓸데없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중이었다.
에드윈은 모두가 놀라서 다가오게 할 정도로 애처로운 표정을 한 채 제 침실로 들어섰다.
“에드윈 님?”
사람들의 부름에 에드윈은 잠시 그들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췄다. 하지만 그건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곧 에드윈은 입꼬리를 힘없이 끌어 올렸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미소처럼 보일 법했으나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건 아마 금방이라도 눈물이 맺혀 들 것만 같이 촉촉하게 젖은 눈가 때문일지도 몰랐다.
“응?”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니? 왜?”
에드윈이 딱 잘라 아무 일 없다고 말하자 다들 서로를 바라보며 그의 눈치만 봤다.
“나는 조금 쉴래.”
“쉬, 쉬신다고요?”
낯선 말이었다. 언제나 체력이 넘치는 에드윈은 쉬는 것보다는 몸을 움직이는 일을 즐겼다.
에드윈을 바라보는 이들은 웃고는 있지만 기죽은 에드윈의 모습을 보니 문득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다고 느꼈다.
사용인들과 기사들이 그런 에드윈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는 사이 에드윈은 이불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에드윈의 시야에서 벗어나자마자 침실에 있던 모든 이의 시선은 체이스에게 꽂혀 들었다.
다들 평소 에드윈과 가장 가깝게 지낸 그에게 무슨 일인지 물어보라고 눈으로 그를 압박했다.
체이스는 잠시 난감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드윈 님.”
“응.”
에드윈은 여전히 이불에서 나오지 않았다.
“르네 님은 많이 아프지 않으시다고, 조금만 쉬면 나으실 거라고 하던데요.”
“응.”
에드윈이 이렇게 슬퍼할 만한 일은 르네에 대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체이스는 그를 위로했다.
하지만 에드윈은 짧은 대답만 남겼다.
체이스는 당황한 얼굴로 뒤를 돌아봤고, 사람들은 눈에 힘을 주며 다시금 그를 재촉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기분이 안 좋으십니까.”
“어머니가 그렇게 된 게 나 때문이면……. 이제 어머니가 나를 안 보려고 하면 어쩌지?”
“르네 님이 에드윈 님을 얼마나 아끼는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체이스의 말에 에드윈은 한숨을 폭 내쉬고는 눈만 슬쩍 이불 밖으로 내밀었다.
그와 동시에 에드윈에게 집중하고 있던 이들이 모두 급하게 딴짓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들의 신경은 에드윈에게로 집중된 채였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못 만나게 할지도 몰라.”
“네?”
“아버지를 만나러 갔는데……. 로만한테 엄청 화를 내고 있어서 그냥 왔어.”
“그런데 그게 르네 님이랑 무슨 상관이 있는 겁니까?”
“왜 나흘이나 기다려야 하냐고, 당장 가만두지 않겠다고 하시는 걸 로만이 겨우 말렸어. 네 밤을 자면 나흘인 거지?”
“그렇습니다.”
“네 밤을 자고 나면 어머니를 못 보게 할지도 몰라.”
에드윈의 말에 체이스는 당황한 얼굴로 입을 벙긋거렸다. 하지만 금세 표정을 바꾸고 에드윈을 달랬다.
“에드윈 님 이야기가 아닐 겁니다. 일 이야기겠지요.”
“……그럴까?”
“그럼요. 가만두지 않겠다니. 공작님께서 에드윈 님에게 그런 말씀을 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체이스의 말에 에드윈은 불신의 눈길을 보냈다.
레이넌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것이라는 굳건한 믿음이 보여 체이스는 마음이 쓰라렸다.
“무엇보다 에드윈 님을 못 만나게 하면 르네 님이 가만히 계시지 않을 텐데요.”
체이스의 말에 에드윈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르네 님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정말 그렇게 생각해?”
“네. 에드윈 님께서 잘못하신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르네 님이라면 이렇게 말씀하셨을 겁니다.”
“응. 어머니라면 그렇게 말했겠지.”
에드윈은 비로소 조금 안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대로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체이스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운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
그런 그에게 다들 잘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서야 체이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기운 차리실 거야.”
“그래. 르네 님이 오시면 금세 괜찮아지시겠지.”
“잘했어.”
몇몇은 체이스에게 와서 조용히 한마디씩 건넸다.
르네와 관련된 일이면 영락없이 아이의 모습이 되는 에드윈을 다들 흐뭇하게 바라봤다.
하지만 그래도 역시나 그가 오래 기죽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같았다.
그들은 머리를 맞대고 어떤 핑계를 대야 자연스럽게 르네와 에드윈을 만나게 할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사용인들과 기사들의 걱정을 한 몸에 받은 에드윈은 이불 속에서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